태조2(太祖二) 17년~18년
17년(934) 봄 정월 갑진(甲辰).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북방의 진(鎭)을 두루 순시하였다.
여름 5월 을사(乙巳). 왕이 예산진(禮山鎭)에 행차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날 신라(新羅)의 정치가 쇠퇴하자 도적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 백성은 어지러이 흩어지고 거친 들판에는 해골이 나뒹굴었다. 전왕이 다투는 무리를 복속시켜 나라의 터전을 열었으나, 말년이 되어서는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사직(社稷)을 기울여 엎어버렸다. 내가 그 위태로운 계통을 이어받아 이처럼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으니, 병든 백성을 다시 힘들게 하는 것이 어찌 나의 뜻이겠는가? 다만 나라를 열던 때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비바람 맞으며 주진(州鎭)을 순시하여 살피고 성책(城柵)을 완전하게 수리한 것은 백성들이 도적들[綠林]의 어려움을 면하게 하려 함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내는 전부 군대로 나가게 되고 아낙은 오히려 부역에 동원되니, 수고로움과 고통을 참지 못해 깊은 산으로 도망쳐 숨거나 관청에 호소하는 자가 그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왕실의 친족이나 권세 있는 집안에서 포악하게 굴며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없는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한 몸으로 어찌 집집마다 이르러 눈으로 살펴볼 수 있겠는가? 미천한 백성들은 호소를 할 수가 없어 저 푸른 하늘에 대고 울부짖고 있다.
마땅히 너희들 공경(公卿)이나 장상(將相)과 같이 나라의 봉록을 받는 이들은 내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려 너희들의 녹읍(祿邑)에 편제되어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만약 가신(家臣) 가운데 아는 것 없는 무리를 녹읍(祿邑)에 보낸다면,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힘써 마음대로 약탈할 것이니 너희 또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비록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금지하거나 제어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 중에 문제 삼고 고소하는 자가 있는데도 관리가 정에 이끌려 가리고 보호하므로, 원망하는 소리가 일어나고 바로 다투는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가르친 것은 이를 아는 자는 더욱 힘쓰고 알지 못하는 자는 경계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 명령을 어긴 자는 따로 염권(染卷)을 행하였는데도 오히려 남의 허물을 숨겨주는 것을 어질다 여겨 이에 다 아뢰지 않으니 선하고 악한지의 진실을 어떻게 들어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데 어찌 절개를 지켜 잘못을 고치는 자가 있겠는가? 너희는 내가 가르친 말을 따르고 내가 내리는 상벌을 받도록 하라. 죄 있는 자는 귀천(貴賤)을 논하지 않고 벌이 자손까지 미칠 것이며, 공이 많고 죄가 적다면 헤아려 상벌을 행할 것이다. 만일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 녹봉(祿俸)을 추징(追徵)하고 혹 1년이나 2~3년, 5~6년에서 죽을 때까지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공무(公務)를 열심히 받들려는 뜻을 지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흠이 없으면 살아서는 영예와 녹을 누리게 하고, 뒤에는 명가(名家)로 일컫게 하며 자손에 이르기까지 우대하여 표창하고 상을 줄 것이다. 이는 다만 오늘뿐만 아니라 만세(萬世)에 전하여 법령으로 삼도록 할 것이다. 백성이 고소를 한 사람이 불러도 오지 않으면 반드시 명령으로 재차 소환하고, 먼저 장(杖) 열 대를 쳐서 명령을 어긴 죄를 다스린 후에 범한 바를 논하라. 관리가 고의로 멈추어 나아가지 않으면 그 날짜를 헤아려 벌하고 꾸짖을 것이며, 또 권력을 믿고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자는 그 이름을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가을 7월 발해국(渤海國)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무리 수만(數萬)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자, 성명(姓名)을 하사하여 왕계(王繼)라 하고 종실(宗室)의 족보에 넣었다. 특별히 원보(元甫)로 임명하여 백주(白州)를 지키면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를 따르는 측근 인물에게는 관직을,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9월 정사(丁巳).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運州)를 공격하여 견훤(甄萱)과 싸워 크게 이기자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풍문(風聞)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겨울 12월 발해(渤海)의 진림(陳林) 등 160인이 귀부(歸附)해 왔다.
이 해에 서경(西京)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이 번졌다.
18년(935) 봄 3월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비를 금산사(金山寺)에 유폐(幽閉)시키고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처음 견훤(甄萱)에게는 잉첩(媵妾)이 많아 아들이 10여 인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도 많아서 견훤(神劒)이 특히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 싶어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과 양검(良劒)·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서 근심하고 고민하였다. 이때 양검(良劒)과 용검(龍劒)은 변방에 나가 있고 신검(神劒)이 홀로 곁에 있었는데, 이찬(伊粲) 능환(能奐)이 사람을 시켜 양검(良劒)·용검(龍劒)과 함께 음모하여 신검(神劒)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여름 6월 견훤(甄萱)이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 폐첩(嬖妾) 고비(姑比) 등과 더불어 나주(羅州)로 달아나 입조(入朝)를 요청하였다.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과 대광(大匡) 만세(萬歲), 원보(元甫) 향예(香乂)·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을 보내 군선(軍船) 40여 척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맞이하게 하였다. 도착하자 그를 다시 일컬어 상보(尙父)라 하고 남궁(南宮)을 객관(客館)으로 주었다. 지위를 백관의 위에 두고 양주(楊州)를 내려 식읍(食邑)으로 삼았으며, 금과 비단 및 노비 각 40구과 내구마(內廐馬) 10필을 내려주고 앞서 투항한 신강(信康)을 아관(衙官)으로 삼았다.
가을 9월 갑오(甲午).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황주(黃州)·해주(海州)를 순시(巡視)하였다.
겨울 10월 임술(壬戌).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입조(入朝)를 요청하였다. 왕이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 가서 알리게 하였다.
11월 갑오(甲午) 신라왕(新羅王)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출발하자 백성이 모두 그를 따랐다.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걸쳐 이어져 도로가 꽉 메워졌으며 보는 이들이 담을 두른 듯하였다. 가는 길에 자리한 고을에서는 매우 융성하게 접대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위문(慰問)하였다.
계묘(癸卯) 신라왕(新羅王)이 왕철(王鐵)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자 왕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위로하였으며, 태자와 여러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호위하여 들어오게 하고 유화궁(柳花宮)에 묵도록 하였다.
계축(癸丑) 왕이 정전(正殿)에 나아와 백관(百官)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新羅王)과 결혼을 시켰다.
기미(己未) 신라왕(新羅王)이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본국(本國)이 오래도록 위태로운 난리를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다시 왕실[基業]을 보전하기를 바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이제 신하의 예로 알현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신유(辛酉). 여러 신하가 아뢰어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데[天無二日, 土無二王],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一國二君, 民何以堪] 바라건대 신라왕(新羅王)의 요청을 들어 주소서.”라고 하였다.
임신(壬申).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거둥하여 백관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신라(新羅)와 피를 입술에 바르며 동맹을 맺은 것은 두 나라가 길이 우호(友好)를 유지하고 각자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신라왕(新羅王)이 굳이 신하로 있겠다고 요청하고 그대들도 그것이 옳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렵다.”라고 하고, 이어 신라왕(新羅王)이 뜰에서 알현(謁見)하는 예를 받으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여 함성이 궁궐[宮掖]을 진동하였다. 이에 김부(金傅)를 정승(政丞)으로 임명하여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두고, 해마다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으며 신란궁(神鸞宮)을 지어 하사하였다. 그의 시종자도 수록(收錄)하여 토지와 녹봉을 넉넉히 하사하였다. 신라국(新羅國)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그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이 해에 예빈경(禮賓卿) 형순(邢順) 등을 후당(後唐)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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