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1(太祖一) 11년~13년
11년(928) 봄 정월 임신(壬申). 명주(溟州) 장군(將軍) 김순식(金順式)이 내조(來朝)하였다.
을해(乙亥). 원윤(元尹) 김상(金相)과 정조(正朝) 직량(直良) 등이 강주(康州)를 구원하러 가는 길에 초팔성(草八城)을 지나다가 성주(城主) 흥종(興宗)에게 패배하여 김상(金相)이 전사하였다.
이 달에 왕이 견훤(甄萱)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오월국(吳越國)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 1통과 아울러 족하(足下)께서 보낸 장문의 편지를 삼가 받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사신이 이렇듯 제서(制書)를 가지고 오니 편지와 좋은 말씀, 겸하여 충고까지 잘 받았습니다. 귀한 글[芝檢]을 받드니 비록 감격은 더하나 봉투를 열어보니 혐의를 떨치기 힘들어, 지금 돌아가는 사신 편에 부쳐 품은 뜻을 말하는 바입니다. 나는 위로는 하늘이 준 것을 받들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에 밀려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차지하여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즈음 삼한(三韓)에 액운이 모여 온 나라에 기근이 드니 백성의 다수가 반란군[黃巾]에 가담하고 토지는 황무지가 아닌 것이 없어, 이에 전쟁에 대한 우려[風塵之警]를 그치고 나라를 재앙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이웃과 친목하고 우호관계를 맺으니, 그 결과로 수천 리에 걸쳐 농상(農桑)을 즐거이 하는 것이 보이고 7~8년간 군사들은 편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을유년(乙酉年, 925) 10월[陽月]에 이르러 갑자기 사달이 일어나 결국 교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족하께서는 처음부터 상대를 가볍게 보고 곧장 앞으로 가는 모습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서는 것[螗蜋之拒轍]과 같았으나, 결국 어려움을 알고 용기 있게 물러났으니 이는 모기가 산을 짊어지려는 것[蚊子之負山]과 같았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사죄의 말을 늘어놓으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부터는 영원히 기쁘게 화친할 것이며 만약 맹약을 어기면 신이 죽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 또한 창날을 그치게 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살육하지 않는 인(仁)을 바랐기에, 드디어 겹겹이 에워싼 것을 풀고 피곤한 군사들을 쉬게 하였으며 인질마저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엇보다 백성의 편안함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인데, 어떻게 하여 삽혈(歃血)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위세를 다시 지으며 벌이나 전갈 같은 독으로 생령(生靈)들을 침해하고 이리나 호랑이와 같이 미쳐 날뛰며 왕도 주위[畿甸]까지 쳐들어 와 금성(金城)을 핍박하고 신라(新羅)의 왕실[黃屋]을 놀라게 할 줄 알았겠습니까? 의리에 기대어 종주(宗主)를 떠받드는 일을 누가 문공(文公)의 패업(霸業)과 비슷하다 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한(漢)을 도모하였던 간악한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과 같아, 지존(至尊)의 왕으로 하여금 족하에게 굽혀서 아들이라고 자칭하게 부르도록 하였다니 존비(尊卑)의 순서를 잃고 위아래가 모두 근심하고 있습니다. 원로[元輔]의 충순(忠純)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사직(社稷)을 다시 편안히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마음에는 숨겨진 간악함이 없고 신라왕을 존중하는 간절한 뜻이 있어, 장차 조정을 도와 안정시키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바로잡으려는 것을 도우려 합니다. 족하께서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하늘과 땅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서, 임금을 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관리들을 죽여 젓갈을 담그고 백성을 도륙하였습니다. 궁녀들은 취하여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은 빼앗아 가득 싣고 갔으니, 으뜸가는 흉악함은 걸(桀)이나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잔인한 맹수[獍梟]보다 심합니다. 나의 원한은 하늘이 무너지니 극에 달하고 나의 정성은 해를 멈추게 할 만큼 깊습니다.
매와 솔개가 새떼를 모는 것[鷹鸇之逐]을 본받아 견마(犬馬)와 같이 충성을 다해 다시 전쟁을 일으켜 해[槐柳]가 두 번 바뀌었습니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번개처럼 재빨리 적군을 쳤으며, 수공(水攻)에서는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용처럼 솟구치니,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성공하였고, 군사를 일으켜 헛되이 발병(發兵)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윤빈(尹邠)을 쫓았을 때는 갑옷 쌓인 것이 산과 같았고, 변방의 성에서 추조(鄒祖)를 사로잡았을 때는 엎어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습니다. 연산군(燕山郡) 근처에서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길환(吉奐)을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언저리에서는 독기[纛旗] 아래에서 수오(隨晤)를 도륙해 버렸습니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킨 날에는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던졌고, 청주(靑州)를 깨뜨렸을 때에는 직심(直心) 등 4~5명이 목을 내놓았습니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달아났고, 경산(京山)에서는 옥을 입에 물고[含璧] 스스로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찾아와 귀부(歸附)하였고, 나부(羅府, 나주)는 서쪽에서 옮겨와 예속되었습니다. 쳐들어 나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수복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汦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가 천반(千般)의 한을 씻고, 오강정(烏江亭) 위에서 한왕(漢王)이 한 번의 전투를 통해 이룩한 것처럼, 반드시 풍파를 그치게 하고 길이 천하[寰海]를 맑게 할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데, 천명(天命)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吳越王) 전하가 큰 덕으로 변방을 감싸고 깊은 인애(仁愛)로 작은 나라를 보살피고자 특별히 궁성[丹禁]에서 윤음(綸音)을 내려 청구(靑丘)에서 전쟁을 그치라고 유시(諭示)하시었습니다. 이미 교훈과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족하께서 그 밝은 뜻을 삼가 받들어 흉악한 기략(機略)을 모두 거둔다면, 상국(上國)의 인자로운 은혜에 부합할 뿐 아니라 또한 동해(東海)의 끊어진 계통을 잇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 과오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3월 무신(戊申). 발해인(渤海人) 김신(金神) 등 60호가 내투(來投)하였다.
여름 4월 경자(庚子). 탕정군(湯井郡)에 행차하였다.
5월 경신(庚申). 강주(康州)의 원보(元甫) 진경(珍景) 등이 고자군(古子郡)으로 양곡을 옮기러 떠나자, 견훤(甄萱)이 몰래 군사를 보내 강주(康州)를 습격하였다. 진경(珍景) 등이 돌아와 싸웠으나 패배하여 죽은 자가 300여 인이었고, 장군(將軍) 유문(有文)이 견훤(甄萱)에게 항복하였다.
6월 갑술(甲戌). 벽진군(碧珍郡)에 지진이 났다.
계사(癸巳). 이찬(伊餐) 진경(進慶)이 사망하자, 대광(大匡)으로 추증(追贈)하였다.
가을 7월 신해(辛亥). 발해인(渤海人) 대유범(大儒範)이 백성을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병진(丙辰).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청주(靑州)에 행차하였다.
8월 충주(忠州)에 행차하였다.
견훤(甄萱)이 장군(將軍) 관흔(官昕)에게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자, 왕이 명지성(命旨城)의 원보(元甫) 왕충(王忠)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공격하여 쫓게 하였다. 관흔(官昕)이 퇴각하여 대량성(大良城)을 지키며 군사를 풀어 대목군(大木郡)의 벼이삭을 베어갔고, 드디어 오어곡(烏於谷)에 부대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竹嶺)의 길이 막혔다. 왕이 왕충(王忠) 등에게 명하여, 조물성(曹物城)으로 들어가 염탐하도록 하였다.
신라(新羅)의 승려(僧) 홍경(洪慶)이 당(唐, 후당)의 민부(閩府)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를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에 이르자 왕이 친히 맞이하여 제석원(帝釋院)에 모셔두었다.
9월 정축(丁丑). 대상(大相) 권신(權信)이 사망하였는데, 일찍이 황산군(黃山郡)을 격파한 공으로 중아찬(重阿粲)에 제수되었다.
정유(丁酉). 발해인(渤海人) 은계종(隱繼宗) 등이 귀부(歸附)해왔는데, 천덕전(天德殿)에서 왕을 알현하며 세 번 절을 하자 사람들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대상(大相) 함홍(含弘)이 말하기를, “나라를 잃은 사람이 세 번 절하는 것은 옛날의 예법이다.”라고 하였다.
겨울 11월 견훤(甄萱)이 경졸(勁卒)을 뽑아 오어곡성(烏於谷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수졸(戍卒) 1,000명을 죽이니, 장군(將軍) 양지(楊志)와 명식(明式) 등 6인이 나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명하여 모든 군사를 구정(毬庭)에 모으고, 6인의 처자를 군사들 앞에 조리돌린 뒤에 저자에서 처형하여 버려두었다.
이 해에 북계(北界)를 순행(巡幸)하였다.
12년(929) 여름 4월 을사(乙巳).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주진(州鎭)을 두루 순시(巡視)하였다.
6월 임인(壬寅). 원보(元甫) 장필(長弼)을 대상(大相)으로 임명하였다.
계축(癸丑). 천축국(天竺國)의 삼장법사(三藏法師) 마후라(摩㬋羅)가 오자,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고 맞이하였는데 이듬해에 구산사(龜山寺)에서 죽었다.
경신(庚申). 발해인(渤海人) 홍견(洪見) 등이 배 20척에 사람과 재물을 싣고 귀부(歸附)해왔다.
가을 7월 기묘(己卯). 기주(基州)에 행차하여 주진(州鎭)을 두루 순시(巡視)하였다.
신사(辛巳). 견훤(甄萱)이 갑옷 입은 병사 5,000명으로 의성부(義城府)를 쳐들어오자, 성주(城主)인 장군(將軍)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왕은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양 손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또 견훤(甄萱)이 순주(順州)로 쳐들어오자 장군(將軍) 원봉(元奉)이 도망쳤다.
9월 을해(乙亥). 강주(剛州)에 행차하였다.
병자(丙子). 발해인(渤海人) 정근(正近) 등 300여 인이 내투(來投)하였다.
겨울 10월 병신(丙申). 백제(百濟, 후백제)의 일길간(一吉干) 염흔(廉昕)이 내투(來投)하였다. 견훤(甄萱)이 가은현(加恩縣)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2월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을 에워싸자,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구하였다.
13년(930) 봄 정월 정묘(丁卯). 재암성(載巖城) 장군(將軍) 선필(善弼)이 내투(來投)하였다.
병술(丙戌),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甄萱)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서로의 거리가 500보 남짓이었다. 드디어 더불어 싸우다가 저녁이 되자 견훤(甄萱)이 패하여 달아났으며,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죽은 자가 8,000여 인이었다. 이 날 고창군(古昌郡)에서 아뢰기를, “견훤(甄萱)이 장수를 보내 순주(順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민가를 약탈한 후 물러갔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바로 순주(順州)에 행차하여 그 성을 수리하고 장군(將軍) 원봉(元奉)을 처벌하였다.
경인(庚寅)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
이에 영안(永安)·하곡(河谷)·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군현(郡縣)이 서로 차례로 투항해왔다.
2월 을미(乙未). 신라(新羅)에 사신을 보내 고창(高昌)의 승리를 알리자, 신라왕(新羅王)도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서한을 보내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에 신라(新羅)의 동부 해변의 주군(州郡)과 부락(部落)이 모두 투항해왔는데, 명주(溟州)부터 흥례부(興禮府)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경자(庚子). 일어진(昵於鎭)에 행차하였다. 북미질부성주(北彌秩夫城主) 훤달(萱達)이 남미질부성주(南彌秩夫城主)와 함께 투항해왔다.
3월 무진(戊辰). 백서성낭중(白書省郞中) 행순(行順)과 영식(英式)을 모두 내의사인(內議舍人)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임진(壬辰).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6월 경자(庚子). 서경(西京)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창건하여 대광(大匡) 왕신(王信)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기해(己亥), 대목군(大木郡)에 행차하여 대승(大丞) 제궁(弟弓)을 천안도독부사(天安都督府使)로, 원보(元甫) 엄식(嚴式)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였다.
계묘(癸卯). 청주(靑州)에 행차하였다.
병오(丙午).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백길(白吉)을 정위(正位)로, 토두(土豆)를 정조(正朝)로 임명하였다.
9월 정묘(丁卯). 개지변(皆知邊)에서 최환(崔奐)을 보내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겨울 12월 경인(庚寅).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學校)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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