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1(太祖一) 2년~10년
2년(919) 봄 정월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어 3성(三省)과 6상서관(六尙書官), 9시(九寺)를 두었다.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였으며, 5부(五部)를 나누고 6위(六衛)를 두었다.
3월 법왕사(法王寺)·왕륜사(王輪寺) 등 10개의 절을 도성(都城) 안에 창건하고, 양경(兩京)의 탑묘(塔廟)와 초상(肖像) 중 사라지거나 부서진 것은 모두 수리하게 하였다.
신사(辛巳). 3대(三代)의 시호(諡號)를 추존(追尊)하여 증조부를 시조 원덕대왕(始祖 元德大王)이라 하고 비(妃)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고 하였으며, 조부를 의조 경강대왕(懿祖 景康大王)이라 하고 비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고 하였으며, 부친을 세조 위무대왕(世祖 威武大王)이라 하고 비를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
가을 8월 계묘(癸卯). 청주(靑州)가 진심으로 귀부(歸附)하지 않고 기회만 엿보며[首鼠順逆] 유언비어가 자주 일어나므로, 왕이 직접 행차하여 위무(慰撫)하니 드디어 성을 쌓게 명령할 수 있었다.
9월 계미(癸未) 오월국(吳越國)의 문사(文士) 추언규(酋彦規)가 내투(來投)하였다.
겨울 10월 평양(平壤)에 성을 쌓았다.
3년(920) 봄 정월 신라(新羅)에서 처음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강주(康州) 장군(將軍) 윤웅(閏雄)이 그 아들 일강(一康)을 인질로 보내자, 일강(一康)을 아찬(阿粲)으로 임명하고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처로 삼게 하였다. 낭중(郞中) 춘양(春讓)을 강주(康州)로 파견하여 귀부(歸附)한 이들을 위로하고 타일렀다.
가을 9월 신축(辛丑). 견훤(甄萱)이 아찬(阿粲) 공달(功達)을 보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에서 나는 대나무 화살(竹箭)을 바쳤다.
겨울 10월 견훤(甄萱)이 신라(新羅)를 쳐서 대량군(大良郡)과 구사군(仇史郡) 두 고을을 빼앗고 진례군(進禮郡)까지 이르렀다. 신라(新羅)가 아찬(阿粲) 김률(金律)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해주었는데, 견훤(甄萱)이 그 소식을 듣고 물러갔으며 비로소 우리와 틈이 생겼다.
이 해에 북계(北界)를 순행(巡幸)하였다.
4년(921) 봄 2월 갑자(甲子).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고자라(高子羅)가 17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임신(壬申). 달고적(達姑狄) 171명이 신라(新羅)를 공격하러 가는데, 길이 등주(登州)를 통과하니 장군(將軍) 견권(堅權)이 맞아 싸워 크게 패배시켜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명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 1인당 곡식 50섬씩을 하사하니, 신라왕(新羅王)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사례하였다.
여름 4월 을유(乙酉). 흑수(黑水)의 아어간(阿於閒)이 20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가을 9월 기해(己亥). 낭중(郞中) 찬행(撰行)을 보내 변방 고을을 가서 돌아보고 백성을 위무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정묘(丁卯). 오관산(五冠山)에 대흥사(大興寺)를 창건하고 승려(僧) 이언(利言)을 맞이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임신(壬申).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12월 신유(辛酉). 아들 왕무(王武)를 책봉하여 정윤(正胤)으로 삼았으니, 정윤(正胤)은 곧 태자(太子)이다.
백제인(百濟人) 궁창(宮昌)과 명권(明權) 등이 내투(來投)하자 집과 땅을 하사하였다.
5년(922) 봄 2월 거란(契丹)이 낙타와 말(駝馬), 모직물[氈]을 보내왔다.
여름 4월 궁성(宮城) 서북쪽에 일월사(日月寺)를 창건하였다.
6월 정사(丁巳). 하지현(下枝縣) 장군(將軍) 원봉(元奉)이 내투(來投)하였다.
가을 7월 무술(戊戌). 명주(溟州) 장군(將軍) 순식(順式)이 아들을 보내 항복하고 귀부(歸附)하였다.
겨울 11월 신사(辛巳). 진보성(眞寶城) 성주(城主) 홍술(洪術)이 사신를 보내 항복하기를 요청하자 원윤(元尹) 왕유(王儒)와 경(卿) 함필(含弼) 등을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다.
이 해에 대승(大丞)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父兄子弟]과 여러 군현(郡縣)의 양가(良家) 자제를 이주시켜 서경(西京)을 충실하게 하였다.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새로 관부와 관리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직접 아선성(牙善城) 백성이 거주지를 정하였다.
6년(923) 봄 3월 갑신(甲申). 하지현(下枝縣) 장군(將軍) 원봉(元奉)을 원윤(元尹)으로 임명하였다.
신축(辛丑). 명지성(命旨城) 장군(將軍) 성달(城達)이 동생 이달(伊達)·단림(端林)과 함께 귀부(歸附)해왔다.
여름 6월 계미(癸未). 복부경(福府卿) 윤질(尹質)이 양(梁, 후량)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오백나한(五百羅漢)의 화상(畵像)을 바치자 명하여 해주(海州) 숭산사(崇山寺)에 두게 하였다.
계사(癸巳). 오월국(吳越國)의 문사(文士) 박암(朴巖)이 내투(來投)하였다.
가을 8월 임신(壬申). 벽진군(碧珍郡) 장군(將軍) 양문(良文)이 생질 규환(圭奐)을 보내 투항해오자 규환(圭奐)을 원윤(元尹)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1월 무신(戊申) 진보성(眞寶城) 성주(城主) 홍술(洪術)이 아들 왕립(王立)을 보내 갑옷 30벌을 바치자 왕립(王立)을 원윤(元尹)으로 임명하였다.
7년(924) 가을 7월 견훤(甄萱)이 아들 수미강(須彌康)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 조물군(曹物郡)을 공격하자 장군(將軍) 애선(哀宣)과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애선(哀宣)은 전사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굳게 지켜 수미강(須彌康) 등이 이득 없이 돌아갔다.
8월 견훤(甄萱)이 사신을 보내 절영도(絶影島)의 총마(驄馬) 1필을 바쳤다.
9월 신라왕(新羅王) 박승영(朴昇英)이 훙서하고 아우 박위응(朴魏膺)이 즉위하여 국상(國喪)을 알려왔다. 왕이 애도하고 재(齋)를 지내 명복(冥福)을 빌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이 해에 외제석원(外帝釋院)·구요당(九曜堂)·신중원(神衆院)을 창건하였다.
8년(925) 봄 3월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였다.
가을 9월 병신(丙申). 발해(渤海)의 장군(將軍) 신덕(申德) 등 50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경자(庚子). 발해(渤海)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과 대균로(大均老), 사정(司政) 대원균(大元均),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었으나 당(唐) 무후(武后, 측천무후) 때 고구려인(高句麗人) 대조영(大祚榮)이 달아나 요동(遼東)을 지키자 당(唐 예종(睿宗)이 봉(封)하여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발해국(渤海國)이라 칭하고 부여(扶餘)와 숙신(肅愼) 등 10여 개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문자와 예악(禮樂), 관부제도(官府制度)가 있으며 5경(京)·15부(府)·62주(州)에 땅이 사방 5,000여 리이고 인구가 수십만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와 국경을 접하였으며 거란(契丹)과는 대대로 원수 사이였다. 이에 이르러 거란(契丹)의 왕이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원수를 아직도 씻지 못하였으니 어찌 편안히 있는 것이 마땅한가?”라고 하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발해(渤海)의 대인선(大諲譔)을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대인선(大諲譔)이 패배하여 항복하기를 청함으로 드디어 발해(渤海)는 멸망하였다. 이에 그 나라 사람들 중 다투어 오는 자들이 계속 이어졌다.
갑인(甲寅). 매조성(買曹城) 장군(將軍) 능현(能玄)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겨울 10월 기사(己巳) 고울부(高鬱府) 장군(將軍) 능문(能文)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는데, 그 성이 신라(新羅)의 왕도(王都)와 가까워서 힘써 위로하여 돌려보내고 오직 휘하의 시랑(侍郞) 배근(盃近)과 대감(大監) 명재(明才)·상술(相術)·궁식(弓式) 등만 남게 하였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백제(百濟, 후백제)를 공격하였다.
을해(乙亥).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甄萱)과 조물군(曹物郡)에서 싸우자 유금필(庾黔弼)이 군사를 끌고 와서 같이 모였다. 견훤(甄萱)이 겁을 먹고 화친을 요청하여 처남[外甥] 진호(眞虎)를 인질로 삼자 왕도 사촌동생[堂弟] 원윤(元尹) 왕신(王信)을 인질로 교환하고, 견훤(甄萱)이 10살 위라 하여 상보(尙父)라고 일컬었다. 신라왕(新羅王)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견훤(甄萱)은 변덕이 심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화친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11월 기축(己丑). 탐라(耽羅)에서 토산물을 바쳤다.
12월 무자(戊子). 발해(渤海)의 좌수위소장(左首衛小將)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000호를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9년(926) 여름 4월 경진(庚辰). 견훤(甄萱)의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시랑(侍郞) 익훤(弋萱)을 파견하여 시신을 보내 주었다. 견훤(甄萱)은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며 왕신(王信)을 죽이고 웅진(熊津)으로 진군하였다. 왕이 여러 성에 명하여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도록 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견훤(甄萱)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도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진격의 북을 울려 위세를 떨치신다면 견훤(甄萱)은 반드시 스스로 질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사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견훤(甄萱)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이 넘쳐나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뿐이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들은 도참(圖讖)에 이르기를, ‘절영(絶影)의 명마(名馬)가 이르면 백제(百濟)가 망하리라.’라고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후회하며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왕이 웃으며 그것을 허락하였다.
겨울 12월 계미(癸未).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고 주진(州鎭)을 두루 둘러보았다. 이 해에 장빈(張彬)을 당(唐, 후당)에 파견하였다.
10년(927) 봄 정월 을묘(乙卯). 친히 백제(百濟, 후백제)의 용주(龍州)를 정벌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 때 견훤(甄萱)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여러 번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략하였지만 왕은 오랫동안 참아왔다. 견훤(甄萱)이 더욱 악행을 쌓으며 자못 강제로 삼키고자 하므로, 왕이 그를 공격하였고 신라왕(新羅王)도 군대를 내어 도왔다.
을축(乙丑). 견훤(甄萱)이 왕신(王信)의 시신을 보내자 왕신(王信)의 아우 왕육(王育)을 보내어 맞이하도록 하였다.
3월 갑인(甲寅). 발해(渤海)의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50인과 승려(僧) 재웅(載雄) 등 6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신유(辛酉). 왕이 운주(運州)를 공격하여 성 아래에서 성주(城主) 긍준(兢俊)을 격파하였다.
갑자(甲子).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름 4월 임술(壬戌).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강주(康州)를 치게 하니, 전이산(轉伊山)·노포(老浦)·평서산(平西山)·돌산(突山) 등 4향(鄕)을 함락시키고 사람과 물자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을축(乙丑). 왕이 웅주(熊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무오(戊午).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김락(金樂) 등을 보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장군(將軍)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인을 사로잡았다.
8월 병술(丙戌). 왕이 강주(康州)를 순시(巡視)하자,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귀부(歸附)하였다. 이에 백제(百濟, 후백제)의 여러 성주[城守]가 모두 항복하고 귀부하였다.
9월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불태운 후, 신라(新羅)의 고울부(高鬱府)를 기습하고 나아가 수도 부근까지 바짝 이르자 신라왕(新羅王)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려왔다. 왕이 시중(侍中) 공훤(公萱)과 대상(大相) 손행(孫幸) 및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新羅)는 우리와 서로 좋았던 지가 이미 오래인데 지금 위급함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공훤(公萱) 등에게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르기도 전에 견훤(甄萱)이 갑자기 신라(新羅)의 수도로 들어갔다. 그 때 신라왕(新羅王)은 비빈(妃嬪)‧종척(宗戚)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으로 놀러나가 술자리를 벌여 즐기고 있었는데, 문득 적병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왕은 부인과 더불어 달아나 성의 남쪽에 있는 이궁(離宮)에 숨었으나, 따르던 신하와 악공(樂工) 및 궁녀(宮女)는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견훤(甄萱)은 군사를 풀어서 마음껏 약탈하게 하였으며, 왕궁(王宮)에 들어가 앉아서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아내고 군영(軍營)에 두어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자신은 강제로 왕비(王妃)를 욕보였으며 자기 부하들은 빈첩(嬪妾)을 강간하게 하였다. 왕의 외사촌 동생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고 경애왕(景哀王)의 동생 박효렴(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백성과 각종 장인, 병장기와 진귀한 보물을 다 거두어 돌아갔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직접 정예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형세가 불리하였다. 견훤(甄萱)의 군사가 왕을 포위하여 매우 위급해지자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전군이 패배하였고 왕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견훤(甄萱)이 승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을 함락하고, 들판에 쌓아놓은 노적가리를 다 불태워 버렸다.
겨울 10월 견훤(甄萱)이 장수(將帥)를 보내어 벽진군(碧珍郡)을 침략하였고, 대목군(大木郡)과 소목군(小木郡) 두 고을의 곡식을 베어갔다.
11월 벽진군(碧珍軍)의 벼와 곡식을 불살랐는데 정조(正朝) 색상(索湘)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2월 견훤(甄萱)이 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번에 신라(新羅)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왕경(王京)으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鼈應黿聲]과 같은데, 이는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쪼고자 달려드는 것[鷃披隼翼]과 같아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고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이로써 내가 먼저 조적(祖逖)의 사례와 같이 채찍을 잡고[先著祖鞭], 한금호(韓擒虎)가 홀로 부월(斧鉞)을 휘두르는 것[獨揮韓鉞] 같이, 백관에게 밝은 햇빛과 같이 맹서(盟誓)를 받고, 6부(六部)에는 의로운 기풍을 유시(諭示)하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간신은 숨거나 도망쳐버리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고, 결국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동생[表弟]이며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였습니다.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을 있게 한 것은 이에 있습니다. 족하께서는 충고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수단을 써서 틈을 엿보다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쳐들어와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이 묶인 듯이 패배했고, 같은 달에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볕에 쪼이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포획한 자가 많았으며 쫓아가 잡은 자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다면 승부는 알 만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였는데, ‘경(卿)과 고려(高麗)는 오랫동안 소통하고 좋아하면서 함께 이웃으로 맹약(盟約)을 맺은 것으로 안다. 근래 두 인질이 다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하였던 옛 관계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卿)의 나라에 가게 하고 또 고려(高麗)에는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화친하여 길이 평화를 아름답게 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고 왕을 존중하며,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으므로 그 조유(詔諭)를 듣고서 곧 지시를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족하께서 싸움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고, 곤란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싸우려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조서를 베껴 보내드리니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번갈아 이기는 것[㕙獹迭憊]도 끝내 반드시 남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맞버티는 것[蚌鷸相持]도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迷復]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스스로에게 남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해 임언(林彦)을 후당(後唐)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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