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영 김병기 일가 옷 국가민속문화유산6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夫人宋氏),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이 입었던 옷이다. 김병기(金炳冀)는 자(字)가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潁),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다. 판돈녕 김영근(金泳根)의 아들로 순조(純祖)18년(1818)에 태어나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에게 입양(入養)되었다. 헌종(憲宗)13년(184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하(勢道政治下)에서 훈련대장(訓練大將)을 거쳐 이조(吏曹)·예조(禮曹)·형조(刑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한 후 철종(哲宗)13년(1862) 판교령부사(判敎寧府使)가 되었으나 고종원년(高宗元年, 1864)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執政)하자 정계(政界)에서 거세(去勢)되어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다시 등용(登用)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고종(高宗)12년(1875)에 졸(卒)하니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다. 장남(長男) 김용규(金龍圭)는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장손(長孫) 김승진(金升鎭)은 세마(洗馬) 정9품(正九品)를 지냈다. 유품에는 김병기(金炳冀) 조복과 제복이 각각 1점씩, 구군복 2점, 쾌자 2점, 땀받이용 배자류 1점,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관복 각각 1점씩, 부인 송씨의 원삼 2점과 그 밖에 아들 김용규(金龍圭)의 호패와 술이 남아있다. 조복은 신하가 왕에게 아침 문안을 드릴 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입던 옷이며,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이다. 구군복은 문관과 무관이 입던 군복이며, 쾌자는 전복이라고 부르는 옷으로 구군복을 차려 입을 때 협수 위에 입는 옷이다. 배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이며, 원삼은 궁중의 여인들과 사대부인들의 대례복일 뿐만 아니라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의 예복으로도 사용하였던 옷이다.

 

조복 국가민속문화유산6-1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유품과 함께 발견된 조복(朝服)이다. 이 옷은 김병기(金炳冀)가 입었던 조복(朝服)으로, 왕에게 아침문안을 드릴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신하들이 입었던 옷이다. 조복을 입을 때에는 머리에 양관이라는 금관을 쓰고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 형태의 옷을 입고, 겉에는 무늬가 없는 붉은색 비단에 검은색으로 테를 두른 적초의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대대를 둘렀다. 아래에는 치마 형태의 적초상을 입었고 무릎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폐슬을, 뒤쪽에는 후수를, 양옆에는 옥으로 만든 옥패를 늘어뜨리고 손에는 홀을 쥐었다.

 

구군복 국가민속문화유산6-2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유품과 함께 발견된 구군복(具軍服)이다. 이 옷은 김병기(金炳冀)의 것으로, 조선 후기의 문관과 무관이 입던 군복(軍服)이다. 구군복(具軍服)을 입을 때는 머리에 벙거지라고도 부르는 가죽으로 만든 전립을 쓰고, 겉에 소매와 무, 앞섶이 없는 전복을 걸치고, 안에는 포의 일종인 붉은색의 동달이를 입었다. 등에는 가죽으로 만들어 활과 화살을 넣어 두던 통개를 메고, 오른손에는 채찍이 달린 지휘봉인 등채 들고, 사슴가죽으로 만든 목화를 신었다.

 

전복 국가민속문화유산6-3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유품들과 함께 발견된 전복(戰服)이다. 전복(戰服)은 군복을 차려 입을 때 협수(夾袖, 동달이)위에 입던 옷으로 쾌자(快子)라고도 부른다. 하나는 검은색 비단옷에 안은 붉은색이며, 다른 하나는 남색옷에 흰색 명주로 안을 대었다.

 

소례복 국가민속문화유산6-4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유품들과 함께 발견된 소례복(小禮服)으로, 김병기(金炳冀)와 손자인 김승진(金升鎭)의 것이다. 이 옷은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입던 평상복의 일종으로 간단한 형식을 취하며, 깃은 둥글게 만든 단령이며 자주색의 비단으로 만들었다. 겨드랑이 아래쪽에 다른 천으로 덧댄 무의 앞과 뒤가 같고, 소매통은 좁다. 가슴과 등 쪽은 다른 천으로 덧대었으며, 가슴에는 수놓은 흉배가 없다. 또다른 하나는 넓은 소매로 되어있고 한 마리의 학 그림이 있는 흉배가 있는 것으로, 손자인 김승진(金升鎭)이 25세 때 재혼하면서 입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머리에 썼던 검은색의 흑사모와 흰색의 백사모가 각 1점씩 남아있다.

 

제복 국가민속문화유산6-5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유품들과 함께 발견된 제복(祭服)이다. 제복(祭服)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으로, 머리에는 양관을 쓰고 푸른색 청초의를 입었다. 이 유품은 검은 옷에 가장자리도 검은 선으로 두르고 있다. 원래의 제복은 푸른 옷에 검은 선을 두르는 청초의였는데, 언제부터 이런 형태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외에 무릎을 가리기 위해 달았던 폐슬은 왼쪽에 고정되어 달렸으며, 흰 베로 만들어 목에 걸었던 방심곡령은 가슴 위에 드리웠다.

 

배자 국가민속문화유산6-6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사영(思潁) 김병기(金炳冀, 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金龍圭)와 손자 김승진(金升鎭)의 유품들과 함께 발견된 배자(褙子)이다. 배자(褙子)란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을 말하는데, 이 배자(褙子)는 청색 무명 땀받이이다. 웃옷의 속옷으로 입었는데 양옆이 모두 트여있고, 고리로서 품을 조절하였다.

 

대례복(남) 국가민속문화유산6-7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김병기(金炳冀)의 손자 김승진(金升鎭)이 입었던 단령(團領)이다. 김승진(金升鎭)의 단령(團領)은 넓은 소매로 되어있고 겉감은 붉은색 화문사(花紋紗), 안감은 다듬이질한 붉은색 명주로 만든 겹홍단령으로 매우 호사롭다.  

대례복(여) 국가민속문화유산6-8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김병기 부인(金炳冀夫人)의 녹원삼(綠圓衫)이 2착(着)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김병기(金炳冀)가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정부인(貞夫人) 가자(加資)를 받았을 때 하사(下賜)받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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