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왕실 연대표
代 |
왕 명 |
재 위 |
약 사 |
1 |
동명성왕(東明聖王, B.C 58~B.C 19) |
B.C 37 ~B.C 19 |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 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가섭원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
2 |
유리왕(榴璃王, ?~18) |
B.C 19 |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의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
3 |
대무신왕(大武神王, 4~44) |
18~44 |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
4 |
민중왕(閔中王, ?~48) |
44~48 |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
5 |
모본왕(慕本王, ?~53) |
48~53 |
이름은 해우(解憂), 해애루(解愛婁). 대무신왕의 원자(元子)이자 둘째 아들.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
6 |
국조왕(國祖王, 47~165) |
53 ~ 146 |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태조왕(太祖王).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 |
7 |
차대왕(次大王, 71~165) |
146 ~ 165 |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신대왕에게 시해됨. |
8 |
신대왕(新大王, 89~179) |
165~179 |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
9 |
고국천왕(故國川王, ?~197) |
179~197 |
휘는 남무(南武). 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신대왕의 둘째아들. |
10 |
산상왕(山上王, ?~227) |
197~229 |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 |
11 |
동천왕(東川王, ?~248) |
227~247 |
휘는 우위거(憂位居).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동양왕(東襄). |
12 |
중천왕(中川王, ?~270) |
247~270 |
동천왕의 아들. 휘는 |
13 |
서천왕(西川王, ?~292) |
270~292 |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
14 |
봉상왕(烽上王, ?~300) |
292~300 |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왕2년과 5년에 연나라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서천왕의 맏아들. |
15 |
미천왕(美川王, ?~331) |
300~330 |
휘는 을불(乙弗), 우불(憂弗).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王). 서천왕의 차남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 |
16 |
고국원왕(故國原王, ?~371) |
331~371 |
휘는 사유(斯由), 쇠(釗). 미천왕의 아들.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
17 |
소수림왕(小獸林王, ?~384) |
371~384 |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왕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
18 |
고국양왕(故國壤王, ?~391) |
384~391 |
휘는 이련(伊連). 요동과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19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3) |
391~413 |
휘는 담덕(談德). 불교를 신봉하였고, 영토를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王), 영락대왕(永樂大王).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 |
20 |
장수왕(長壽王, 394~490) |
413~490 |
휘는 거련(巨連), 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
21 |
문자명왕(文咨明王, ?~519) |
491~519 |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王). 문자왕. |
22 |
안장왕(安藏王, ?~531) |
519~531 |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
23 |
안원왕(安原王, ? ~545) |
531~545 |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
24 |
양원왕(陽原王, ?~559) |
545~559 |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안원왕의 맏아들. |
25 |
평원왕(平原王, ?~590) |
559~590 |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양원왕의 맏아들. |
26 |
영양왕(瓔陽王, ?~618) |
590~618 |
휘는 원(元). 영양왕9년에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섬멸 하였음. 평양왕(平陽王). 평원왕의 맏아들. |
27 |
영류왕(榮留王, ?~641) |
618~641 |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평원왕의 둘째 아들, 영양왕의 이복동생. |
28 |
보장왕(寶藏王, ?~681) |
642~668 |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평원왕의 셋째 아들, 영류왕의 아우인 대양(혹은 태양이라고도 함.)의 맏아들. |
代 |
왕 명 |
재 위 |
약 사 |
1 |
온조왕(溫祚王, ?~28) |
B.C 18 |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 8년 마한을 병합함. |
2 |
다루왕(多婁王, ?~77) |
28~77 |
온조왕의 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
3 |
기루왕(己婁王, ?~128) |
77~128 |
다루왕의 맏아들. 기루왕 29년 신라에 강화요청, 화평 성립됨. |
4 |
개루왕(蓋婁王, ?~166) |
128~166 |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
5 |
초고왕(肖古王, ?~214) |
166~214 |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
6 |
구수왕(仇首王, ?~234) |
214~234 |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 귀수왕. |
7 |
사반왕(沙泮王, ? ~?) |
234 |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
8 |
고이왕(古爾王, ?~286) |
234~286 |
초고왕의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
9 |
책계왕(責稽王, ?~298) |
286~298 |
고이왕의 아들. 위례성을 쌓았으며, 고구려가 대방을 침공할 때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쳤다. 일명 청계(靑稽) 또는 책체(責替)라고도 한다. |
10 |
분서왕(汾西王, ?) |
298~304 |
책계왕의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
11 |
비류왕(比流王, ?~344) |
304~344 |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
12 |
계왕(契王,? ~346) |
344~346 |
분서왕의 맏아들, 契(계 또는 설로 읽음). 자질이 강직, 용감하며 기사(騎射)에 능함.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
346~375 |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384) |
375~384 |
근초고왕의 맏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
15 |
침류왕(枕流王, ?~385) |
384~385 |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
16 |
진사왕(辰斯王, ?~392) |
385~392 |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 다가 병사함. |
17 |
아신왕(阿莘王, ?~405) |
392~405 |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
18 |
전지왕(琠支王, ?~420) |
405~420 |
아신왕의 아들. 휘는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427) |
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
20 |
비유왕(毘有王, ? ~455) |
427~455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
21 |
개로왕(蓋鹵王, ?~475) |
455~475 |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
22 |
문주왕(文周王, ?~477) |
475~477 |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
23 |
삼근왕(三斤王, ? |
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 여금 토평하게함. |
24 |
동성왕(東城王, ?~501) |
479~501 |
휘는 모대(牟大). 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
25 |
무령왕(武寧王, ?~523) |
501~523 |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
26 |
성왕(聖王, ? ~554) |
523~554 |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 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
27 |
위덕왕(威德王, ?~598) |
554~598 |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
28 |
혜왕(惠王, ? ~599) |
598~599 |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
29 |
법왕(法王, ? ~600) |
599~600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을 착수함. |
30 |
무왕(武王, ? ~641) |
600~641 |
휘는 장(璋), 서동(暑童).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법왕의 아들. |
31 |
의자왕(義慈王, ?~660) |
641~660 |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代 |
왕 명 |
재 위 |
성 |
약 사 |
1 |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
BC57 |
朴 |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
2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
4~24 |
朴 |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3 |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
24~57 |
朴 |
남해왕의 아들.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함.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
4 |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BC19~80) |
57~80 |
昔 |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탄생. 남해왕의 사위. |
5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112) |
80~112 |
朴 |
유리왕의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6 |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 |
112~134 |
朴 |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王) |
7 |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
134~154 |
朴 |
유리왕의 형인 일지갈문왕의 아들.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8 |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184) |
154~184 |
朴 |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 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일성왕의 맏아들. |
9 |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196) |
184~196 |
昔 |
탈해왕의 손자<탈해왕 아들인 구추(仇鄒) 각간(角干)의 아들>. |
10 |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230) |
196~230 |
昔 |
벌휴왕의 손자<벌휴왕(伐休尼師今)의 둘째아들인 이매(伊買)의 아들. |
11 |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47) |
230~247 |
昔 |
제귀왕(諸貴王). 벌휴왕의 손자<벌휴왕의 맏아들인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의 아들. |
12 |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261) |
247~261 |
昔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13 |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284) |
262~284 |
金 |
김씨 왕가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6대손이며,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아들로 조분왕의 사위. |
14 |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298) |
284~298 |
昔 |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15 |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289~310) |
298~310 |
昔 |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
16 |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356) |
310~356 |
昔 |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 내해왕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우로(于老)의 아들. |
17 |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 |
356~402 |
金 |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함.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며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 |
18 |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417) |
402~417 |
金 |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로 미추왕의 사위. |
19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58) |
417~458 |
金 |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20 |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479) |
458~479 |
金 |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눌지왕의 맏아들. |
21 |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500) |
479~500 |
金 |
자비왕의 맏아들.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이라고도 한다. |
22 |
지증왕(智證王, 437 ~514) |
500~514 |
金 |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갈문왕(卜好葛文王)의 손자이자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 |
23 |
법흥왕(法興王, ? ~540) |
514~540 |
金 |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지증왕의 아들. |
24 |
진흥왕(眞興王, 534 ~576) |
540~576 |
金 |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 |
25 |
진지왕(眞智王, ? ~579) |
576~579 |
金 |
휘는 사륜(舍輪). 진흥왕의 둘째 아들. |
26 |
진평왕(眞平王, ?~632) |
579~632 |
金 |
휘는 백정(白淨)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의 아들. |
27 |
선덕여왕(善德女왕 , ?~647) |
632~647 |
金 |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
28 |
진덕여왕(眞德女王, ?~654) |
647~654 |
金 |
휘는 승만(勝蔓).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
29 |
무열왕(武烈王, 604 ~661) |
654~661 |
金 |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진지왕의 손자이고,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의 아들. |
30 |
문무왕(文武王, ?~681) |
661~681 |
金 |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무열왕의 맏아들. |
31 |
신문왕(神文王, ?~692) |
681~691 |
金 |
휘는 정명(政明)·명지(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
32 |
효소왕(孝昭王, 643 ~702) |
692~702 |
金 |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33 |
성덕왕(聖德王, ?~737) |
702~737 |
金 |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신문왕의 둘째 아들. |
34 |
효성왕(孝成王, ?~742) |
737~742 |
金 |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
35 |
경덕왕(景德王, ?~765) |
742~765 |
金 |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성덕왕의 아들이며 효성왕(孝成王)의 동생. |
36 |
혜공왕(惠恭王, 765 ~780) |
765~780 |
金 |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37 |
선덕왕(宣德王, ?~785) |
780~785 |
金 |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해찬(海飡) 김효방(金孝芳)의아들. |
38 |
원성왕(元聖王, ?~798) |
785~798 |
金 |
휘는 경신(敬信). 태종무열왕의 셋째 아들 김문왕의 6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일길찬 효양(孝讓)의 아들. |
39 |
소성왕(昭聖王, ?~800) |
798~800 |
金 |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40 |
애장왕(哀莊王, 788 ~809) |
800~809 |
金 |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소성왕의 아들. |
41 |
헌덕왕(憲德王, ?~826) |
809~826 |
金 |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소성왕의 동생. |
42 |
흥덕왕(興德王, ?~836) |
826~836 |
金 |
휘는 수종(秀宗)·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
43 |
희강왕(僖康王, ?~838) |
836~838 |
金 |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이찬 헌정의 아들.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 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44 |
민애왕(閔哀王, ?~839) |
838~839 |
金 |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희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원성왕의 증손이며, 대아찬(大阿飡) 충공(忠恭)의 아들. |
45 |
신무왕(神武王, ?~839) |
839 |
金 |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원성왕의 손자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의 종제(從弟). |
46 |
문성왕(文聖王, ? ~857) |
839~857 |
金 |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아들.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47 |
헌안왕(憲安王, ?~861) |
857~861 |
金 |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신무왕의 이복동생. |
48 |
경문왕(景文王, ?~875) |
861~875 |
金 |
휘는 응렴(膺廉). 헌안왕의 사위.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계명(啓明)의 아들. |
49 |
헌강왕(憲康王, ?~886) |
875~886 |
金 |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경문왕의 아들. |
50 |
정강왕(定康王, ?~887) |
886~887 |
金 |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51 |
진성여왕(眞聖女王, ?~897) |
887~897 |
金 |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경문왕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 |
52 |
효공왕(孝恭王, ?~912) |
897~912 |
金 |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53 |
신덕왕(神德王, ?~917) |
913~917 |
朴 |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대아찬(大阿飡) 예겸(乂兼)의 아들. |
54 |
경명왕(景明王, ?~924) |
917~924 |
朴 |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아들.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
55 |
경애왕(景哀王, ?~927) |
924~927 |
朴 |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신덕왕(神德王)의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동생. |
56 |
경순왕(敬順王, ?~978) |
927~935 |
金 |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伊飡) 효종(孝宗)의 아들. |
가락(금관가야) 왕실 연대표
代 |
왕 명 |
재위 기간 |
약 사 |
1 |
수로왕(首露王, 42 ~199) |
42~199 |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 허황옥과 결혼함. |
2 |
거등왕(居登王, ?~253) |
199~259 |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
3 |
마품왕(麻品王, ?~291) |
259~291 |
거등왕의 아들. |
4 |
거질미왕(居叱彌王, ?~346) |
291~346 |
마품왕의 아들. |
5 |
이시품왕(伊尸品王, ?~407) |
346~407 |
거질미왕의 아들. |
6 |
좌지왕(坐知王, ?~421) |
407~421 |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
7 |
취희왕(吹希王, ?~451) |
421~451 |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
8 |
질지왕(銍知王, ?~492) |
451~492 |
취희왕의 아들, 일명은 김질왕(金銍王). |
9 |
겸지왕(鉗知王, ?~521) |
492~521 |
질지왕의 아들. |
10 |
구형왕(仇衡王, ? ~?) |
521~532 |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함안)·고령가야(高寧伽耶: 함창)·대가야(大伽耶: 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 성주)·소가야(小伽耶: 고성)·금관가야(金官伽耶: 김해)·비화가야(非火伽耶: 창녕) 등
발해 왕실 연대표
代 |
왕 명 |
재위 기간 |
약 사 |
1 |
고왕(高王, ? ~719) |
699~719 |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
2 |
무왕(武王, ? ~739) |
719~737 |
휘는 대무예(大武藝). 대조영의 아들. 연호를 인안이라 했다. 무력을 양성, 흑수말갈, 당나라 등주를 공격했다. |
3 |
문왕(文王, ? ~793) |
737~793 |
휘는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아들. 내치에 치중하여 관직제도 제정, 사적(史籍) 수입, 주자감 설립 등 정치, 문화발전에 힘썼다. |
4 |
폐왕(廢王, ? ~794) |
793~794 |
휘는 대원의(大元義). 문왕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대굉림(大宏臨)도 일찍 사망하였다. 굉림의 아들인 대화여의 나이가 어려 세력이 강했던 그가 왕위에 올랐지만, 정통성 문제로 1년도 못되어 살해되었다. 문왕의 족제. |
5 |
성왕(成王, ? ~795) |
794~795 |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로 대굉림(大宏臨)의 아들. 폐왕이 포악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폐하고, 성왕을 옹립하였다.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수도를 이전 도읍지였던 상경(上京)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
6 |
강왕(康王, ? ~809) |
795~809 |
휘는 대숭린(大崇隣). 성왕(成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일본 등과 문물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결과 외교사절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연호를 정력(正曆). 문왕의 둘째아들. |
7 |
정왕(定王, ? ~812) |
809~812 |
휘는 대원유(大元瑜). 강왕의 아들. 재위기간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며, 치적으로서 특기할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연호를 영덕(永德). |
8 |
희왕(僖王, ? ~817) |
812~817 |
휘는 대언의(大言義). 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왕으로 책봉받았다. 814년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제도를 받아들였으며,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였다. 연호를 주작(朱雀). 정왕의 동생. |
9 |
간왕(簡王, ? ~818) |
817~818 |
휘는 대명충(大明忠).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행적은 별로 없다. 연호는 태시(太始). 희왕(僖王)의 동생. |
10 |
선왕(宣王, ? ~?) |
818~830 |
휘는 대인수(大仁秀).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渤)의 4세손이며, 간왕의 종부(從父). 고구려와 부여 등의 옛 영토까지 강토로 삼아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였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일본과의 사신교환도 매우 활발하였다고 한다. 연호는 건흥(建興). |
11 |
대이진(大彛震, ? ~?) |
830~858 |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손자로 왕권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인 신덕이 사망함으로 인하여, 동궁(東宮)으로 책봉되기 전에 '권지국무'라는 칭호로 즉위했다. 그는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고, 10여 차례 조공(朝貢)하는 등 경제와 문화의 교류에 힘썼다. 연호를 함화(咸和). |
12 |
대건황(大虔晃, ? ~?) |
858~871 |
대이진(大彛震)의 동생이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13 |
경왕(景王, ? ~893) |
871~894 |
휘는 대현석(大玄錫), 대건황의 아들. 당(唐)나라 의종 때 세 차례 스스로 당나라에 들어가 국교를 강화하고,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어 교역을 넓혔다. |
14 |
대위해(大瑋瑎, ? ~?) |
894~906 |
연호와 시호, 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
15 |
애왕(哀王, ? ~?) |
906~926 |
휘는 대인선(大諲譔). 재위 시절의 발해는 거란(요)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925년 야율아보기가 친정(親征)을 감행하였다. 926년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는 멸망하였다. |
후백제 왕실 연대표
代 |
왕 명 |
재 위 |
약 사 |
1 |
견훤(甄萱, 867 ~936) |
900~935 |
견훤은 상주(尙州)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서남해의 방수군(防戍軍)으로 파견되어 전공을 세우고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국정이 문란하여 각지에 도둑이 창궐하였는데, 견훤은 기회를 포착하여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에 쳐들어가 이를 점령하였다(889년). 892년에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
2 |
신검(神劍, ? ~936) |
935~936 |
견훤(甄萱)의 장남.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935년(고려 태조 18) 3월 두 아우 양검(良劍)과 용검(龍劍)의 권유를 받아들여 능환(能奐) 등과 모의, 부왕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라 대왕(大王)이라 칭하였다. |
태봉(후고구려) 왕실 연대표
代 왕 명 재 위 약 사 1 궁예(甄萱, 857~918) 901~918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의 승려가 되어 선종(善宗)이라 불렸다.
기 간
代 |
왕 명 |
재 위 |
약 사 |
1 |
태조(太祖, 877 ~943) |
918~943 |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
2 |
혜종(惠宗, ? ~945) |
943~945 |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
3 |
정종(定宗, 923 ~949) |
945~949 |
휘는 요(堯).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태조의 둘째아들. |
4 |
광종(光宗, 925 ~975) |
949~975 |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정종의 동생. |
5 |
경종(景宗, 955 ~981) |
975~981 |
휘는 주(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
6 |
성종(成宗, 960 ~997) |
981~997 |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태조의 손자이고, 추존왕 대종(戴宗)의 아들이며 경종의 사촌동생. |
7 |
목종(穆宗, 980 ~1009) |
997~1009 |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
8 |
현종(顯宗, 992 ~1031) |
1009~1031 |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태조의 손자이고, 추존왕 안종(安宗)의 아들. |
9 |
덕종(德宗, 1016 ~1034) |
1031~1034 |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현종의 맏아들. |
10 |
정종(靖宗, 1018 ~1046) |
1034~1046 |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현종의 둘째아들. |
11 |
문종(文宗, 1019 ~1083) |
1046~1083 |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현종의 셋째아들. |
12 |
순종(順宗, 1046 ~1083) |
1083 |
휘는 훈(勳).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13 |
선종(宣宗, 1049 ~1094) |
1083~1094 |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14 |
헌종(獻宗, 1084 ~1097) |
1094~1095 |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선종의 맏아들. |
15 |
숙종(肅宗, 1054 ~1105) |
1095~1105 |
휘는 옹(顒).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16 |
예종(睿宗, 1079 ~1122) |
1105~1122 |
휘는 우(俁).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숙종의 아들. |
17 |
인종(仁宗, 1109 ~1146) |
1122~1146 |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예종의 맏아들. |
18 |
의종(毅宗, 1124 ~1173) |
1146~1170 |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19 |
명종(明宗, 1131 ~1202) |
1170~1197 |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이며 인종의 둘째아들.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
20 |
신종(神宗, 1144 ~1204) |
1197~1204 |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 최충헌(崔忠獻)이 옹립한 왕임. |
21 |
희종(熙宗, 1181 ~1237) |
1204~1211 |
휘는 영(韺).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
22 |
강종(康宗, 1152 ~1213) |
1211~1213 |
휘는숙(璹), 정(貞), 오(祦).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23 |
고종(高宗, 1192 ~1259) |
1213~1259 |
휘는 철(皞).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강종의 맏아들. |
24 |
원종(元宗, 1219 ~1274) |
1259~1274 |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고종의 맏아들. |
25 |
충렬왕(忠烈王, 1236 ~1308) |
1274~1308 |
휘는 거(昛). 원종의 맏아들.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26 |
충선왕(忠宣王, 1275~1325) |
1308~1313 |
휘는 장(璋). 충렬왕의 아들.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
27 |
충숙왕(忠肅王, 1294~1339) |
1313~1330, 1332~1339 |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충선왕의 둘째아들. |
28 |
충혜왕(忠惠王, 1315~1344) |
1330~1332, 1339~1344 |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충숙왕의 아들. |
29 |
충목왕(忠穆王, 1337~1348) |
1344~1348 |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충혜왕의 아들. |
30 |
충정왕(忠定王, 1337~1352) |
1348~1351 |
휘는 저(㫝).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충혜왕의 아들로 충목왕의 이복동생. |
31 |
공민왕(恭愍王, 1330~1374) |
1351~1374 |
휘는 전(顓).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 (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충숙왕의 둘째아들. |
32 |
우왕(禑王, 1364 ~1389) |
1374~1388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33 |
창왕(昌王, 1380 ~1389) |
1388~1389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
34 |
공양왕(恭讓王, 1345~1394) |
1389~1392 |
휘는 요(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20대 신종(神宗)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王鈞)의 둘째아들. |
조선왕실 연대표
代 |
왕 명 |
재 위 |
약 사 |
1 |
태조(太祖, 1335 ~1408) |
1392~1398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2 |
정종(定宗, 1357 ~1419) |
1398~1400 |
휘는 방과(芳果). 태조의 둘째아들.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1369 ~1422) |
1400~14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의 다섯째아들.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1397 ~1450) |
1418~1450 |
휘는 도(祹).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1414 ~1452) |
1450~1452 |
휘는 향(珦). 세종의 맏아들.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1441 ~1457) |
1452~1455 |
휘는 홍위(弘暐).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문종의 아들. |
7 |
세조(世祖, 1417 ~1468) |
1455~1468 |
휘는 유(瑈). 세종의 둘째아들.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
8 |
예종(睿宗, 1441 ~1469) |
1468~1469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1457 ~1494) |
1469~1494 |
휘는 혈(娎). 세조의 장남인 추존 덕종(德宗)의 둘째아들.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
1494~1506 |
휘는 융(㦕). 성종의 맏아들. 폭군으로 무오사화,갑자사화,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1488 ~1544) |
1506~1544 |
휘는 역(懌). 성종의 둘째아들.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1515 ~1545) |
1544~1545 |
휘는 호(峼). 중종의 맏아들.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1534 ~1567) |
1545~1567 |
휘는 환(峘). 중종의 둘째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
14 |
선조(宣祖, 1552 ~1608) |
1567~1608 |
휘는 균(鈞),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1575~1641) |
1608~1623 |
휘는 혼(琿). 선조의 둘째아들.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1595 ~1649) |
1623~1649 |
휘는 종(倧).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 추존 원종(元宗)의 아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17 |
효종(孝宗, 1619 ~1659) |
1649~1659 |
휘는 호(淏).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1641 ~1674) |
1659~1674 |
휘는 연(棩). 효종의 맏아들.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1661 ~1720) |
1674~1720 |
휘는 순(焞). 현종의 맏아들.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1688 ~1724) |
1720~1724 |
휘는 윤(昀). 숙종의 맏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1694 ~1776) |
1724~1776 |
휘는 금(昑). 숙종의 넷째아들.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22 |
정조(正祖, 1752 ~1800) |
1776~1800 |
휘는 산(祘). 영조의 손자로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1790 ~1834) |
1800~1834 |
휘는 공(玜). 정조의 둘째아들.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24 |
헌종(憲宗, 1827 ~1849) |
1834~1849 |
휘는 환(奐).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 추존 익종(翼宗)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1831 ~1863) |
1849~1863 |
휘는 변(昪).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㼅)의 아들.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26 |
고종(高宗, 1852 ~1919) |
1863~1907 |
휘는 희(熙).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아들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 일어남. |
27 |
순종(純宗, 1874 ~1926) |
1907~1910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