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유서(명함) 앞면
민영환 유서(명함) 뒷면
민영환 유서(명함)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 3면
민영환 유서(명함) 국가등록문화유산854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고려대학교 박물관
「민영환(閔泳煥) 유서(명함)」는 대한제국의 외교관이며 독립운동가인 충정공(忠靖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순절할 당시 2천만 동포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가 적힌 명함이다. 민영환(閔泳煥)의 옷깃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마지막에 「결고(訣告) 아(我) 대한제국(大韓帝國) 이천만(二千萬) 동포(同抱)」라고 적혀 있어 동포들에게 남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명함의 크기는 세로 9.2, 가로 6.0 cm로 양면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은 ‘육군부장정일품대훈위(陸軍副將正一品大勳位)’ ‘민영환(閔泳渙)’이 세로 2줄로 인쇄되었고 민영환 이름 하단에는 원형의 인장이 있다. 후면에는 ‘Min Young Hwan.’이 영어 필기체로, 그 아래에는 한글로 ‘민영환’이 인쇄된 형태이다. 인장은 중앙에 한자로 민영환(閔泳渙)이라고 쓰고, 그 바깥쪽으로 원을 두르고 한글과 영어로 ‘민MIN영YOUNG환WHOAN’이라고 새겼다. 인장 실물과 인장을 넣는 인장합은 전래되고 있다. 한편, 명함은 봉투에 보관되어 있는데 봉투 전면에는 검은색 테두리를 둘러 세로로 ‘대감명함한장’이 붓글씨로 적혀있고 후면은 봉인선에 검은색 테두리를 둘렀다. 「민영환(閔泳煥) 유서(명함)」는 유족이 소장한 전래가 명확하고 상태가 양호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자결 순국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민충정공의 정신을 후세들에게 알릴 수 있는 사료적 및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민영환(閔泳煥)은 자결 당시 국민, 재경외국사절, 황제에게 올리는 유서를 작성하였는데 자결 다음날인 1905년 12월 1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국한문)에 ‘순국(殉國)한 민영환씨의금중(閔泳煥氏衣衿中)에 수출(搜出)한 각공간(各公舘)에 소기서(所寄書)와 경고한국인민(警告韓國人民)한 유서전문(遺書全文)이 여좌(如左)하니’라는 기사와 함께 국민 각성을 요망하는 ‘경고한국인민유서(警告韓國人民遺書)’, 외국 사절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각관관귀서(各舘舘寄書)’가 수록되었다. 유서가 적힌 명함은 봉투에 넣은 채로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가 1958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자결 순국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민충정공의 정신을 후세에게 알릴 수 있는 사료적·문화유산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산이다.
원문
“嗚呼, 國恥民辱, 乃至於此, 我人民, 行將殄滅於, 生存競爭之中矣, 夫要生 者必死, 期死者得生, 諸公豈不諒只, 泳煥徒以一死仰報, 皇恩,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 泳煥死而不死, 期助諸君於九泉之下, 幸我同胞兄弟, 千萬倍加於奮勵, 堅乃志氣, 勉其學問, 結心戮力, 復我自由獨立, 則死者當喜笑於冥冥之中矣, 嗚呼, 勿少失望,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번역문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다.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에서 모두 죽어서 사라질 것이다. 대개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도리어 살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한다.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지하에서라도 여러분을 기어이 도울 것이다.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나 마음과 기운을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서로 돕고 힘을 모아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라. 그러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영결을 고하노라.”
출처;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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