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문수사 대웅전 보물2263호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고수면 칠성길 135(은사리 48) 문수사
「고창 문수사(文殊寺) 대웅전(大雄殿)」은 문수도량인 문수사(文殊寺)의 주불전(主佛殿)으로, 고창 문수사(文殊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이다. 고창 문수사(文殊寺)는 644년(백제 의자왕 4)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나라의 청량산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자장(慈藏)은 꿈속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땅의 형세가 당나라의 청량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절을 짓고 문수사(文殊寺)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문수사 창건기(文殊寺 創建記, 1758년)」에 따르면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1607년(선조 40)에 중창(重創,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새롭게 지음)되었고, 1653년(효종 4) 회적(晦跡) 성오화상(性悟和尙)에 의해 3중창을 하고, 그 다음해 1654년 제자인 상유(尙裕)가 삼불좌상과 시왕상 등을 조성한 기록으로 볼 때 「문수사(文殊寺) 대웅전(大雄殿)」 또한 이 시기에 중창(重創)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1920호 「고창 문수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내 후령통에서 2004년 발견된 「시왕조성발원기」를 통해 1654년(효종 5)에 조성된 기록이 발견돼, 창건기 기록과 대웅전 중창을 뒷받침 한다. 회적(晦跡) 성오화상(性悟和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승군으로 활약하며 1624년(인조 2)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전쟁으로 소실된 전국의 사찰을 중건했던 승려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제자로, 성오화상(性悟和尙)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고창 문수사(文殊寺)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포작은 내외 3출목 다포(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놓은 건축양식) 형식으로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의 형태와 짜임에서는 단순하면서도 강직한 조선 전기∼중기에 이르는 양식과 전라도의 지역적 특색이 나타난다. 지붕가구는 4면에 공포를 배열하고, 충량(衝樑, 팔작지붕의 측면에서 평주와 대량에 걸쳐 대는 보 부재)과 활주(活柱, 팔작지붕에서 추녀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추녀 끝단에 설치한 보조기둥)를 사용한 팔작지붕(맞배지붕 옆에 삼각형의 합각을 남기고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리는 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후대에 맞배지붕으로 형태가 변화함에 따라, 다포계 맞배지붕(지붕면의 앞뒤로만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리는 지붕으로, 옆에는 판재를 이어 붙여서 비바람을 막음)의 기법과 양식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다. 또한, 대웅전의 단청은 전통무기안료와 아교가 사용된 옛 기법이 남아 있어,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