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仁宗二) 16년

 

〈무오〉 16년(1138) 봄 정월 갑오. 금에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두의(杜誼)를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2월 계해. 지례사(持禮使)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최면(崔沔)을 금 동경(東京)에 파견했다.

갑자. 명인전(明仁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5일간 열었다.

을해.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임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제왕의 덕은 무엇보다 겸손을 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왕(王)과 공(公)은 스스로를 고(孤)·과(寡)·불곡(不穀)이라고 칭한다.’라고 하셨다. 또 한(漢) 광무제(光武帝)는 조서에서 신하들이 상서할 때 〈황제를〉 성인(聖人)이라고 칭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공자께서도 역시 인자(仁者)나 성인(聖人)이라고 자처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오늘날 신하가 임금을 높이고 찬미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이는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상소나 공문서[公行案牘]에서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
라고 하였다.

3월 무술. 진숙(陳淑)을 우복야(右僕射)로, 이중(李仲)을 이부상서 판어사대사(吏部尙書 判御史臺事)로 삼았다.

경자.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송 상인 오적(吳迪) 등 63명이 송 명주(明州)의 첩문(牒文)을 가지고 와서 휘종황제(徽宗皇帝)와 영덕황후(寧德皇后) 정씨(鄭氏)가 금에서 붕어(崩御)하였음을 알렸다.

임자. 이대유(李大有) 등을 급제시켰다.

여름 4월 계해.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정묘. 우박이 쏟아졌다.

5월 갑오.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경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죄수들의 죄상을 조사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덕이 부족하고 우매하여 존위(尊位)에 앉기는 하였지만 하늘의 뜻에 맞는 덕이 없어 만물에 은택을 입히지 못하였다. 나라의 기강은 날로 폐하여져가고 백성들은 시름시름 앓고 피폐해지니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매우 두려워 감히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다. 원하건대 지성(至誠)을 다하여 천지의 화기(和氣)에 맞추고자 하니 마땅히 유사에서는 제물을 갖추어 국내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5월 16일 새벽을 기하여 그 이전에 전국에서 사형 이하의 죄를 범한 자들을 풀어주도록 하고 전의 죄로 유배 중에 있는 자는 사면(赦免)하여 배소(配所)를 형편이 좋은 곳으로 옮겨주도록 하라. 제색군인(諸色軍人)과 잡류(雜類)에게는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도록 하라. 전국의 관사와 안찰사 등으로 하여금 청렴을 권장하고 더러움을 씻도록 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경술 여러 전각(殿閣) 및 궁문(宮門)의 명칭을 고치고 왕이 직접 현판을 썼다. 회경전(會慶殿)은 선경전(宣慶殿)으로, 건덕전(乾德殿)은 대관전(大觀殿)으로, 문덕전(文德殿)은 수문전(修文殿)으로, 연영전(延英殿)은 집현전(集賢殿)으로, 선정전(宣政殿)은 훈인전(薰仁殿)으로, 응건전(膺乾殿)은 건시전(乾始殿)으로, 장령전(長齡殿)은 봉원전(奉元殿)으로, 선명전(宣明殿)은 목청전(穆淸殿)으로, 함원전(含元殿)은 정덕전(靜德殿)으로, 만수전(萬壽殿)은 영수전(永壽殿)으로, 중광전(重光殿)은 강안전(康安殿)으로, 건명전(乾明殿)은 저상전(儲祥殿)으로, 연친전(宴親殿)은 목친전(穆親殿)으로, 현덕전(玄德殿)은 만보전(萬寶殿)으로, 명경전(明慶殿)은 금명전(金明殿)으로, 자화전(慈和殿)은 집희전(集禧殿)으로, 오성전(五星殿)은 영헌전(靈憲殿)으로, 정양전(正陽殿)은 숙화전(肅和殿)으로, 수춘궁(壽春宮)은 여정궁(麗正宮)으로, 망운루(望雲樓)는 관상루(觀祥樓)로, 선춘루(宜春樓)는 소휘루(韶暉樓)로, 창합문(閶闔門)은 운룡문(雲龍門)으로, 신봉문(神鳳門)은 의봉문(儀鳳門)으로, 춘덕문(春德門)은 체통문(棣通門)으로, 태초문(太初門)은 태정문(泰定門)으로, 회동문(會同門)은 이빈문(利賓門)으로, 창덕문(昌德門)은 흥례문(興禮門)으로, 좌우승천문(左右承天門)은 통가문(通嘉門)으로, 연수문(延壽門)은 돈화문(敦化門)으로, 장녕문(長寧門)은 조인문(朝仁門)으로, 선화문(宣化門)은 통선문(通仙門)으로, 개경문(開慶門)은 황극문(皇極門)으로, 경양문(景陽門)은 양화문(陽和門)으로, 금마문(金馬門)은 연명문(延明門)으로, 천우문(天祐門)은 자신문(紫宸門)으로, 통천문(通天門)은 영통문(永通門)으로, 안우문(安祐門)은 순우문(純祐門)으로, 흥태문(興泰門)은 분방문(芬芳門)으로, 양춘문(陽春門)은 광양문(廣陽門)으로, 태평문(大平門)은 중명문(重明門)으로, 백복문(百福門)은 보화문(保和門)으로, 통경문(通慶門)은 성덕문(成德門)으로, 동화문(東華門)은 여경문(麗景門)으로, 서화문(西華門)은 향성문(向成門)으로, 영안문(永安門)은 흥안문(興安門)으로, 대청문(大淸門)은 청녕문(淸寧門)으로, 좌우선경문(左右宣慶門)은 부우문(敷祐門)으로, 좌우연우문(左右延祐門)은 봉명문(奉明門)으로 고쳤다. 경녕전(慶寧殿)과 비서각(秘書閣)만은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6월 을묘.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갑자.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기사. 예종(睿宗)의 귀비(貴妃) 왕씨(王氏)가 죽었다.

가을 8월 을묘. 김부식(金富軾)을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이중(李仲)을 참지정사 판삼사사(叅知政事 判三司事)로, 최진(崔溱)을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 知樞密院事)로, 김정순(金正純)과 이지저(李之氐)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임술. 왕이 흥왕사(興王寺) 천복원(薦福院)으로 나아가 머물렀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이자덕(李資德)이 사망하였다.

무진. 현종(顯宗)과 문종(文宗)의 진전(眞殿)을 참배하였다.

겨울 10월 임술. 왕이 국청사(國淸寺)로 거처를 옮겼다.

갑자. 왕이 새 궁궐로 돌아왔는데, 앞서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므로 해당 관청에 명하여 수리하게 한 것이다. 이 날 백관이 하례를 올리자 왕이 편전에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제왕(諸王)과 재추(宰樞), 시종관(侍從官)이 모두 참석했으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정묘. 대관전(大觀殿)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을 3일간 열었다.

11월 을유. 금 동경지예빈사사(東京知禮賓司事) 하목(夏睦)이 보빙사(報聘使)로 왔다.

기축.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김신련(金臣璉)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갑오.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유방우(劉邦遇)를 사신으로 보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계묘. 집현전(集賢殿)에 행차하여 김부식(金富軾)에게 『역경(易經)』의 「대축(大畜)」, 「복(復)」 두 괘(卦)를 강론하게 하고 여러 학사에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왕도 『역경』을 보며 강론과 토론을 듣고 이어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12월 기미. 김부식(金富軾)을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태사(檢校太師 集賢殿大學士 太子太師)로, 최유(崔濡)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임원애(任元敱)를 검교태부(檢校太傅)로, 이중(李仲)을 검교사도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호부사 태자소사(檢校司徒 守司空 尙書左僕射 判戶部事 太子少師)로, 이지저(李之氐)를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 同知樞密院事)로, 김정순(金正純)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았다.

계해. 명인전(明仁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5일간 열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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