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2(太祖二) 16년

 

16년(933) 봄 3월 신사(辛巳) 후당(後唐)에서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왕을 책봉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왕이라는 것은 하늘을 본받아 온 백성을 기르고 땅을 본떠 천하[八紘]를 편안하게 하는 존재이니, 성실히 큰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 온 천하에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다. 북두칠성[斗極]은 바르므로 뭇 별이 다 그리로 향하고, 큰 바다는 넓으므로 온 골짜기가 모두 그리로 흘러간다. 그런 까닭에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 세상에 살면서 해가 내리비추는 곳을 다 살피며, 도를 넓히고 덕을 닦으며 자신을 공손히 하여 마음을 비워야 한다. 진심으로 귀부(歸附)한 사람은 돌보아 왕의 백성으로 삼고, 향화(嚮化)한 사람에게는 풍교(風敎)를 입혀야 한다. 그러므로 봉작하는 명을 거행하고 표창하는 글을 계고하는 것이니,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감히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대는 차지한 땅을 평양(平壤)이라 일컬었으며 군사를 장악하고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족(五族)의 강한 우두머리를 통합하고 삼한(三韓)의 비옥한 땅을 지배하여, 진정시키는 데 힘쓰고 성명(聲明)을 받들고자 뜻하였으니 이에 상례[彛章]를 따라 은총의 예를 더한다.
아! 그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王建)은 자질이 웅대하고 용맹하며 지혜는 기략[機鈴]에 통달하였고, 변방에서 으뜸으로 빼어나게 태어났고 장대한 포부를 가지고 드러내었다. 산하(山河)가 내려준 바, 터전이 지극히 풍요하다. 주몽(朱蒙)이 건국한 상서로움을 계승하여 저들의 왕이 되고, 기자(箕子)가 번국(蕃國)을 이룬 자취를 밟아서 은혜와 조화를 펼치고 있다. 풍속이 두텁고 글을 알기에 능히 예의로 이끌 수 있으며, 기풍이 용감하고 무예를 숭상하므로 위엄으로 정중히 할 수 있다. 봉토가 이에 고요하고 편안해졌고 백성은 이로써 온전히 모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다시 이와 입술같이 긴밀해지고 피부와 터럭같이 돈독해지게 되었다. 교활한 오랑캐가 재앙을 일으키는 데 분노하고, 이웃 나라를 걱정하여 근심에서 구원하였다. 또한 진심으로 순종하며 절의를 붙잡고 충성을 바치면서, 인덕(仁德)으로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것을 사모하여 시절을 평안히 하고, 경륜과 도덕[文思]을 본받아 운수(運數)를 어루만졌다. 깊은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을 넘어와 예물을 나르고 보배를 바쳤으며, 자기 사업을 보고하는 절차를 이행하여 근왕(勤王)의 업적을 잘 드러내었다. 무릇 지극한 정성을 넓히면 풍성한 보답을 누리는 것이 떳떳한 도리이고, 실제 봉작을 정하여 열국(列國)을 드러내는 것이 큰 예절일 것이다. 공로가 지극하므로 나는 아낄 것이 없다.
이제 정사(正使) 태복경(太僕卿) 왕경(王瓊)과 부사(副使) 대부소경 겸 통사사인(大府少卿 兼 通事舍人) 양소업(楊昭業) 등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는 명을 내린다.
아! 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리고, 바른 도리를 지키면 신(神)이 복을 주는 법이다. 무기는 위태로울 때 신중히 사용하고 통일된 제도[文軌]는 원대한 계책의 바탕이 되니, 길이 후당(後唐)의 신하가 되어 대대로 왕의 작위를 누리라. 이제 그 지위를 내리니 그대는 공경히 받으라.”
라고 하였다.

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그대는 재주가 빛나며 하늘이 내리신 도움으로[金鉤協兆], 해 뜨는 곳 동방을 거느리며 해외의 영웅 중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군사의 마음은 모두 무마하는 데 감동하고, 백성의 뜻은 은혜로이 기름을 함께 노래하였습니다. 또한 참으로 큰 나라를 섬김[事大]이 굳건하고 뜻이 이웃 나라를 도우려는 데 있으니, 말에게 꼴을 먹이고 무기를 날카롭게 해 견훤(甄萱)의 무리를 꺾었고 옷을 나누고 밥을 덜어서 발해 사람들[忽汗之人]을 구제하였습니다. 연이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글월을 바치고, 매번 뜰에 가득히 공물을 이르게 하였습니다. 금석(金石) 같은 정성과 밝음은 해를 꿰뚫었고 풍운(風雲)과 같이 높은 기개는 하늘을 능가하였으며, 이름은 일시에 뿌려지고 미덕은 사방에 흘러갔습니다. 충성스런 마음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상전(賞典)을 어찌 잊겠습니까? 특별히 봉해줄 것을 결정하여 높은 지위로 올리려 합니다. 제후에 책봉[桐圭]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동쪽 봉래산[蓬山]을 아득히 바라보고, 도야(桃野)를 돌아보며 생각을 기울이니 마음은 제수(濟水)를 따라갑니다. 특별한 예우를 힘써 받들어 높은 훈업(勳業)을 길이 보전하시오. 이제 그대에게 특진 검교태보 사지절현도주도독 상주국 충대의군사(特進 檢校太保 使持節玄菟州都督 上柱國 充大義軍使)를 내리고 고려국왕(高麗國王)에 봉합니다. 이제 정사(正使) 태복경(太僕卿) 왕경(王瓊)과 부사(副使) 대부소경(大府少卿) 양소업(楊昭業) 등을 보내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을 내리며, 아울러 국신(國信)으로 은그릇과 비단 등을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어 내리니 이르는 대로 마땅히 받으십시오.”
라고 하였다.

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그대는 동방[長淮]의 대족(大族)으로 큰 바다 너머 웅대한 번국[雄蕃]에서 문무(文武)의 재주로 그 땅을 다스렸으며 충효의 절의로써 교화의 풍도(風度)를 받아들였습니다. 변함없는 충절은 이미 기폭(旗幅)에 새겨지고 은총의 예수(禮數)는 간책(簡冊)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자(天子)의 윤음(綸音)에 위험한 곳에서 얻은 영화가 기록되었으며, 집안이 화목하여 부인의 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탕목(湯沐)을 나누어 줌으로써 결혼[絲蘿]을 경하(慶賀)하니 길이 보좌의 공을 빛내어 나의 큰 명을 삼가 돕도록 하십시오. 그대의 진실된 마음으로 헤아린다면 나의 두터운 은혜를 알 것입니다. 그대의 부인 유씨(柳氏)를 이제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봉합니다.”
라고 하였다. 또 삼군(三軍)의 장교와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왕건(王建)은 성운(星雲)과 같이 빼어난 자질로 금석(金石)과 같은 충성을 다하였으며,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서 신의(信義)를 나타냈고 큰 나라를 섬겨[事大] 충효를 현창(顯彰)하였다. 삼한(三韓)의 낙토(樂土)를 거느리고 매번 중원(中原)의 정삭[周正]을 받들었으며, 만 리 넓은 파도를 건너와 늘 공물[禹貢]을 바쳤다. 공훈과 명성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작위가 아직 높지 않으니, 마땅히 은총을 내려 제후로 책봉하고[桐圭] 더하여 도야(桃野)에 실봉(實封)을 내린다. 이제 왕건을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고 사신을 그곳으로 보내 예를 갖춰 책명(冊命)을 내렸으며 그들로 하여금 위유(慰諭)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모두 알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또한 역서(曆書)를 보내주니, 이때부터 천수(天授)의 연호(年號)를 폐지하고 후당(後唐)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