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0882@hanmail.net 2022. 3. 20. 13:13

구례 천은사 금동불감

 

온 세상 여래가 모여 설법하는 ‘이동불전’

현존 불감 중 가장 큰 미니어처
정확한 제작연대 알 수 없지만
조각 기법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감제작 장인, 불상조성 스님
발원자들의 이름 새겨져 있어
조각·공예사 연구에 귀한 자료

불감내부 각면 후불탱 새기고
불상 봉안해 실제 불전 ‘연상’
집에 모시고 기도하고 싶어져

절정을 이룬 단풍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단풍으로 물든 육중한 지리산 자락에 아름다운 천은사가 있다. 문화재 조사를 하거나 혹은 전시에 선보일 문화재를 대여하러 갔었던 천은사는 지리산에 기대어 늘 사방으로 바람이 통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특히 저수지의 물결은 평화로웠으며,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들로 가득했다. 물과 바람이 어우러져 호젓하고도 여유로워 차안(현실세계)과 피안(깨달음의 세계)의 경계를 느끼게 해주었다.

구례 천은사 금동불감(金銅佛龕). 현존하는 불감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이동식 전각이라 할 수 있다.

물과 인연 깊은 천은사
천은사는 물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사찰 이름에서도 이를 알 수 있는데, 828년(흥덕왕 3) 인도에서 온 덕운(德雲)스님이 창건할 당시에는 앞뜰의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 뒤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여, 고려시대에는 대사찰의 사세를 누렸으나, 안타깝게도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다. 왜란이후 1610년(광해군 2)에 혜정(惠淨)스님과 1679년(숙종 5)에 단유(袒裕)스님이 중건했다. 이때 사찰명이 바뀌었다. 당시 감로사의 샘가에는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이를 잡아 죽였더니 그 뒤로부터는 샘물이 솟아나지 않아, 샘이 숨었다 해서 천은사로 하였다고 한다.

천은사에는 보물인 극락보전과 극락보전의 후불탱인 아미타회상도를 비롯하여 중요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오늘 소개할 성보는 보물 ‘천은사 금동불감(金銅佛龕)’이다.

이 불감은 고려말의 고승인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스님이 모시고 기도드리던 원불(願佛)로 전해온다. 재질은 금동으로 금동판을 오리고 이어 붙여 전각의 모습으로 기본형태를 만들었다. 그리고 타출기법으로 여러 불보살상과 화려한 문양들을 새긴 이 불감은 여닫이식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불감의 크기는 너비 34.7cm 높이 41.1cm 깊이 17.6cm로, 현재 남아 있는 불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나옹화상 원불 모신 ‘이동 전각’
불감은 불상을 안치한 전각을 이동이 가능하도록 작게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불전의 미니어처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불감은 이동하기 쉽도록 여닫이문을 닫으면 동그란 작은 통과 같은 모양과 전각 모양이 있다.

불감의 종류는 호신불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5cm정도의 작은 불감에서부터 10~20cm 정도의 불상들을 넣어 봉안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불감까지 다양하다. 재료는 금동부터, 은, 나무 등이 있다. 순천 송광사 불감, 동국대박물관 소장 불감, 전남 광양 상백운암 불감 등은 나무로 만든 것이다. 천은사 불감, 간송미술관 불감 등은 금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모두 희귀한 성보이다.

천은사 금동불감은 이른바 불전형식(佛殿形式)으로, 이런 형태의 불감은 고려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불전의 지붕은 기왓골이 촘촘하게 파인 우진각지붕 형태이다. 앞으로 열리는 문짝에는 아름다운 화문으로 장식된 꽃살문이 표현되어 실제의 전각을 연상시킨다. 불감은 보상당초문이 새겨져 있는 방형의 기단 위에 올려져 있다.

문짝은 2중의 동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을 열면 안쪽에는 돋을새김으로 양쪽에 불꽃모양의 광배를 하고 옷을 휘날리며 보검을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다. 부처님 세계를 호위하는 신장상인 금강역사를 입구에 가장 먼저 배치하여 불법(佛法)을 지키는 것을 상징하였다.

내부 각 면에 후불탱을 새기고 그 안에 불상을 봉안해 실제 불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줘 집안에 모시고 싶은 마음이 일게 한다.

내부에 후불탱…실제전각 묘사
문을 열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찬란한 세계를 불감 내부에 구현하고 있다. 불감 내부의 모든 면들을 금으로 입혀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천정을 포함한 각 면마다 빈틈없이 불보살의 세계를 다채롭게 새겼다.

여러 부처님이 설법하는 장면을 새긴 벽을 배경으로 하여, 현재 16.5cm 크기의 금동불좌상이 2구가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들의 대좌 밑면과 불감의 밑면에는 2개씩의 구멍을 뚫어 고정시킨 흔적이 남아 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불상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한 장치이다. 그런데 불감 밑면에 고정시킨 흔적이 5군데가 남아 있어, 원래 봉안된 불상은 5구였음을 알 수 있다.

2구의 불상 수인은 모두 아미타설법인을 하고 있는데, 올린 손이 대칭이다. 대좌는 연주문(連珠文)이 돌려진 연화대좌이다. 상대의 앙련좌와 하대의 복련좌가 서로 마주 붙어있는 형태로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에 걸쳐 유행했던 대좌형식이다. 머리에는 나발이 표현되어 있고, 통통하고 둥근 얼굴에 목은 가늘고, 좁고 둥그런 어깨에 대의를 입고 있다. 불상의 특징으로 보아 이 불감의 조성 시기는 고려말로 추정된다.

전각에서 불상 뒤에 불화를 봉안하듯이, 불감 내부 중앙 벽에는 비로자나불회도가, 향우측 벽에는 약사불회도, 향좌측에는 아미타불회도가 각각 타출기법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로자나불회도에는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인 문수와 보현보살이, 그 주변에 십대제자입상이 새겨지고 뒤쪽의 구름 사이로 사천왕이 얼굴과 상체 일부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약사불회도에는 약합을 든 약사불이 중앙에, 그리고 좌우에 협시보살인 일광, 월광보살상이 구름 위에 놓인 높은 대좌에 앉아 있다. 아미타불회도에는 아미타불이 설법인을 짓고 있으며,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비슷한 구도로 새겨져 있다.

불감 천정에는 한 쌍의 봉황이 운문과 함께 표현되어 있고, 각 불회도의 아래에는 구름과 칠보 등의 보석 문양을 새겨 부처님이 계신 세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처럼 중앙 벽에 비로자나불회도가, 향우측 벽에 약사불회도, 향좌측에 아미타불회도를 모신 삼불상의 구성 형식은 조선 후기 유행했다. ‘천은사 금동불감’을 통해 이러한 구성이 여말선초부터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불교도상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법신불인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동방정토를 주재하는 약사불과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이 결합된 것이다. 이는 결국 대승불교가 발전한 이래 모든 시간과 모든 세상에 항상 여래가 존재한다는 다불(多佛)신앙이 축약된 세 불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천은사 불감은 모든 시간과 온 세상에 존재하는 여래가 모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불감 정면(사진 왼쪽)과 불감 뒷면 명문.

제작·시주자 명문…유일 불감
천은사 불감에는 조성과 관련된 명문이 남아 있어 더욱 가치가 크다. 뒷면 왼쪽 상단에 조성한 작가와 시주자가 새겨져 있다. 남아 있는 불감 가운데 이러한 명문이 남아 있는 사례로는 유일하다.

명문에는 세로 6줄로 “조상신승 조장금치 조수박어산 시주박씨양주 연화신음중보 신선해옥(造像信勝 造藏金致 造手朴於山 施主朴氏兩主 緣化信音重寶 信禪海玉)”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불상은 신승(信勝)이, 불감은 김치(金致)와 박어산(朴於山)등이 조성한 것으로, 불상과 불감을 만든 작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주자로는 박씨부부, 신음, 중보, 신선, 해옥 등의 스님들이 등장한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 불감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감을 제작한 장인과 불상을 조성한 스님, 발원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어 조각사와 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천은사 금동불감’은 나옹화상이 원불로 모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시는 곳 어디나 늘 함께 모시고 다니며 경배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불감 안 각 면에 후불탱을 새기고 그 안에 불상을 봉안하여, 마치 실제 불전에서 기도하는 것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나도 이런 불감을 조성하여 내 집안에 모시고 매사에 여여하게 지내라고 기도드리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 [불교신문36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