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삼국유사

기이(紀異) 위만조선(衛滿朝鮮)

7390882@hanmail.net 2019. 1. 29. 14:48

위만조선(魏滿朝鮮, 衛滿朝鮮)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른다. “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 (秦)나라(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변방(邊方)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漢)나라가 일어났지만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遼東)의 옛 요새(要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燕)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라고 하였다. (燕)나라 임금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자, (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亡命)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要塞)를 빠져 달아나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障)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眞番)·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燕)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왕검(王儉)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하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우거(右渠)가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이다.”라고 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이다.”라고 하였다.
원봉(元封) 2년에 (漢)나라에서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右渠)를 타일렀으나 끝내 그는 천자의 명령 받들기를 거부하였다. 섭하(涉何)가 떠나 국경까지 와서 패수(浿水)에 이르자, 마부를 시켜 자기를 바래다 준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게 하고는 곧 패수(浿水)를 건너 요새(要塞) 안으로 말을 달려 들어와 드디어 보고를 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바래다 준 자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섭하(涉何)를 요동(遼東)의 부도위(部都尉)로 임명하였다. 조선(朝鮮)은 섭하(涉何)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涉何)를 죽였다. 천자가 누선장군(樓舡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니 군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요동(遼東)에서 나와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右渠)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누선장군(樓舡將軍)은 제(齊)나라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도착하였다. 우거(右渠)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樓舡將軍)의 군사가 적은 것을 살펴보고 곧 나가서 누선장군(樓舡將軍)을 치니 패하여 달아났다. 양복(楊僕)은 무리를 잃어버리고 산중으로 도망하여 면하게 되었다. 좌장군(左將軍)조선(朝鮮)패수(浿水) 서군(西軍)을 습격하였으나 이를 깨뜨릴 수 없었다.

천자는 두 장군이 불리하다고 여겨 곧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력으로써 가서 우거(右渠)를 타이르니, 우거(右渠)가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 사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하자 사자(使者)와 좌장군(左將軍)을 변고가 있을까 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을 하였으니 병기를 소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使者)가 속이는가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浿水)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衛山)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은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격파하고 이에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樓舡將軍)도 역시 가서 회합하고는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右渠)는 성을 굳게 지켰으므로 몇 달이 지나도 항복시킬 수 없었다. 

천자가 오랫동안 싸움을 결판낼 수 없었기 때문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가서 치도록 하되, 그에게는 편의에 따라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손수(公孫遂)가 도착하자 누선장군(樓舡將軍)을 체포하고 그의 군대를 병합하여 좌장군(左將軍)과 함께 조선(朝鮮)을 급히 쳤다. 조선(朝鮮)의 相) 노인(路人),  상相) 한도(韓陶), 이(尼谿)의 상(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이 서로 의논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이계(尼谿)는 땅 이름이므로 네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한도(韓陶)와 왕겹(王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하여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路人)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에 (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을 시켜 왕 우거(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王倹城)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右渠)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이 우거(右渠)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이르자, 모의하여 성기(成己)를 살해하므로 드디어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진번(真畨)·임둔(臨屯)·낙랑(樂浪)·현토(玄菟) 4군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