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바다를 건넌 불교

남인도 말라바르 아라비아해의 불교

7390882@hanmail.net 2022. 5. 25. 07:22

남인도 말라바르 아라비아해의 불교

 

말라바르의 케랄라에서 발견된 전신의 절반이 사라진 불상. 9~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식으로 미루어 자이나교 불상으로 짐작된다.

“연못 옆 천궁이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오가며 …”

“동쪽에 포타라카산이 있다. 길은 위험하고
암곡은 가파르다. 산꼭대기에 연못이 있는데
그 물이 거울처럼 맑으며, 이 물이 흘러내려
큰 강을 이룬다. 산을 감싸고 흘러내리며
20겹을 휘돌아서 남해로 들어간다. 연못 옆에는
돌로 만들어진 천궁이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오가며 머무는 곳. 보살을 뵙기를 원하는 자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물을 건너고 산을 오른다…”

포타라카산이 있는 말라바르
남인도 서쪽의 아라비아해에 면한 말라바르는 인도양 교역의 거점이다. 또한 향신료의 본향이다. 말라바르 케랄라 지역의 후추는 오래전부터 광범위하게 길렀으며 인도 전체의 4분의3을 차지한다. 또한 정향과 생강이 생산된다. 이들 향료는 수많은 외국 상선을 끌어들이는 원인이 됐으며, 말라바르 해안의 부를 축적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동안 말라바르 권역 역시 불교와 무관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한국인의 인도불교 인식은 대체로 부처님 행적이나 구법승의 순례지, 혹은 대규모 사원 유적이 남은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도 전역에 생각 이상으로 불교가 퍼져 있었다. 인도불교를 타자가 아니라 인도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인도 아라비아해를 찾아나서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대당서역기> 권10의 마라구타(羅矩)가 송 시대의 남비국(南毗國), 즉 말라바르다. 7세기에 현장스님이 찾았을 때, ‘가람의 옛 터는 매우 많지만 남아 있는 곳이 적고 승려들 또한 매우 적다’고 했으며 이미 사찰이 쇠락했다. 성(城) 동쪽에 옛 가람이 있는데 뜰과 건물은 황폐해졌고 그 터만 남았다. 아쇼카왕의 이복동생 마헨드리가 세운 것이라고 했다. 동쪽에 스투파가 있는데 기단은 허물어졌고 발우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이 당시까지 남아있었다. 이 역시 아쇼카왕이 세웠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을 설하시며 신통력을 나타내셔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셨는데, 이를 기념해 세운 것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기도하면 이따금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고 했다.

“동쪽에 포타라카(Potalaka)산이 있다. 길은 위험하고 암곡은 가파르다. 산꼭대기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물이 거울처럼 맑으며, 이 물이 흘러내려 큰 강을 이룬다. 산을 감싸고 흘러내리며 20겹을 휘돌아서 남해로 들어간다. 연못 옆에는 돌로 만들어진 천궁이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오가며 머무는 곳이다. 보살을 뵙기를 원하는 자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물을 건너고 산을 오른다. 그 험난함을 무릅쓰고 도달하는 자가 매우 적다. 이 산에서 동북으로 가면 해안에 성이 있는데 남해 싱할라국(스리랑카)으로 가는 길이다. 바다로 3000여 리 남짓 가면 당도한다.” 현장스님의 기록이다.

남인도 포타락카산(일명, 補陀落迦山, 普陀落伽山)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옛 지도의 한 부분.

오랜 국제항이었던 코치의 옛 항구. 코치는 말라바르의 핵심 도시였다.

 

정화 대함대가 기록한 코치 불교
말라바르 해안에는 아라비아 배와 중국 배가 속속 닿았다. 코치(Kochi, Cochin)는 말라바르의 핵심 도시로 600년 이상 상인이 찾아오던 활기찬 도시다. 코치의 명물은 중국식 어망이다. 1400년에 쿠빌라이 칸 황실 상인이 처음 전했다고 한다. 15세기 초반, 정화가 아프리카로 갈 때도 말라바르 해안에 자주 들렀다. 남인도 서해안이 그만큼 중국에게 페르시아나 아랍세계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는 증거다.

정화 함대의 기록관 마환(馬歡)은 <영애승람(瀛涯勝覽)>에서 코치를 가지국(柯枝國)으로 표기했다. 이 나라 국왕과 백성이 모두 촐라(銷俚) 사람이라 했다. 정화 함대가 들렸을 당시, 해상강국 촐라의 힘이 남인도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다. 마환은 무슬림으로서 각 나라를 순방하면서 풍습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영애승람>이란 신빙성 있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말라바르의 불교를 주목한 것은 15세기 초반까지도 남인도 아라비아해에 불교 신앙이 전승되고 있었다는 중요성 때문이다. 마환이 방문했을 당시에 국왕이 불교를 신봉하여 코끼리와 소를 존경하며, 불전(佛殿)을 세웠다고 했다.

청동을 주조하여 불상을 만들고 청석(靑石)을 쌓아 불좌를 만들었으며, 불좌 둘레에도 벽돌을 쌓아 도랑을 만들고 그 옆에 우물을 하나 팠다. 날마다 동이 틀 무렵에 종을 울리면 북을 치며 우물물을 길어 불상의 머리에 두세 번 부은 후, 모두 둘러서서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또 요기(Yogi)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는데 아내와 자식도 있다. 요기는 힌두교의 고행하는 승려를 말하며, 소를 존경한다는 표현을 미루어보아 불교와 힌두교가 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와 힌두교의 습합 양상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은 송·원 시대에 중국 상선이 자주 찾아오는 항구였다. 중세 캘리컷은 아시아 향신료의 주요 교역지로 ‘향신료의 도시’로 불렸다. 옥양목이라고 하는 유명 고급 면직물 이름도 이 항구에서 유래했다. 말라바르에 모여드는 중국과 이슬람 상인의 상호 이익, 새로 부상한 통치자 자모린의 정치적 야망 등이 캘리컷 항구의 번영을 촉진했다. 마환은 <영애승람>에서 캘리컷을 고리국(古里國)으로 기록했으며, ‘서양에서 큰 나라’라고 했다.

“국왕은 청동으로 나이나르(乃納兒)란 불상을 주조하고 불전을 짓고 청동으로 기와를 주조하여 불좌의 지붕을 얹었으며, 그 옆에 우물을 팠다. 날마다 새벽이면 왕이 물을 길어 불상을 목욕시키고 절을 올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황소의 깨끗한 똥을 가져와서 구리 대야에 넣고 물을 섞어 풀처럼 만들게 한 후에 불전 안의 땅바닥과 벽에 두루 문질러 바른다. 이것은 부처와 소를 공경하는 정성이라고 여긴다(僞敬佛敬牛之誠).” 이처럼 캘리컷 역시 앞의 코치의 경우와 같다. 부처와 소를 공경하는 불교-힌두교 습합 양상도 동일하다. 또한 캘리컷에는 인도양을 건너온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고대적 발라보살
고고학 발굴이 속속 이루어지면서 불교의 흔적도 세상에 드러나는 중이다. 캘리컷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폰남바라메두(Ponnambalamedu) 언덕에 트리카이파타(Trikaipata) 사원 유적이 있다. 말라바르 지방에서 ‘폰(pon)’이 붙는 지명은 불교와 자이나교와 관련된 언어학적 증거다. 케랄라와 스리랑카에서만 발견되는 스투파 유적이 발굴되었다. 현재는 힌두교의 트리카이파타 수브라마냐 사원으로 불린다. 6~8세기 인도 남부에서의 대승불교 전승기에 제 보살이 모셔졌던 불전이다. 그러나 힌두교가 이들 제 보살을 하위신으로 흡수하여 힌두교를 확장하는 기반으로 활용했다. 그 이후 어떤 일정한 불교 탄압이 있었을 것이다.

파손된 채로 발굴된 불두(佛頭) 장식은 인도 남부의 대승불교와 관련된 보살 형상 및 도상학과 분명히 연결된다. 이곳에서 모셔졌던 무루칸(Murukan) 또는 안다반(Andavan)은 시바의 아들로 힌두교 신으로 좌정하기 전에는 발라보살(Bala Boddhisatva)이었다. 발라보살은 중인도에서 전신상이 처음 발굴되었다. 고대적 보살 신앙과 힌두교의 접합점이 보여진다. 말라바르에서 불교와 힌두교가 습합되어 모셔진 것으로 후대의 15세기 마환은 이같이 혼재된 오랜 전통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도불교를 이해하는 방식 안에 힌두교와의 습합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 습합을 ‘불순물’ 보듯이 대하는 태도는 협소한 사고일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와 무속과 많이 습합되어 있는 것과 비견된다. 힌두교는 신앙이기도 하지만 인도인의 있는 그대로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