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발리푸람
마하발리푸람
거대한 코끼리와 아르주나 고행상.
팔라바왕국의 해상교역 1번지 마하발리푸람
달마가 남중국 광저우로 떠난 출발지는
수도 칸치푸람보다는 국제항구로 번성하고
큰 배 대기 적당한 마하발리푸람이 아닐까
타밀나두의 ‘초문화적 기념비’로 호칭될 만한
마하발리푸람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7세기
타밀인의 원초적 조각술이 그 정점을 찍은 곳
수도 칸치푸람서 불교가 번영을 구가할 당시
사원군은 바위산을 그대로 조각, 코끼리 사자
다양한 신, 인물 군상 최고 조각술로 장엄…
팔라바왕국의 두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
팔라바(향지국, 香至國)의 수도이자 달마가 태어난 칸치푸람이 있던 첸나이에서 해변을 따라 남쪽 56㎞ 지점에 마하발리푸람(Mahabalipuram)이 있다. 마말라푸람(Mamallapuram)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강대한 힘의 도시’ 뜻한다. 옛 이름은 티루카달말라이(Thirukadalmallai)이며, 칸치푸람과 더불어 팔라바왕국의 두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였다. 타밀나두 ‘해상교역 1번지’로 여겨진다.
팔라바왕조의 3대 마헨드라 1세는 마하발리푸람을 항구로 개발하고 동남아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마하발리푸람은 팔라바 왕조의 교역 중심지가 되어 이곳으로부터 팔라바의 문화적 영향이 동남아로 확산되었다. 동남아 왕국들이 받아들인 브라마 문자의 팔라바 버전은 크메르문자, 타이문자, 라오문자, 미얀마문자, 자와-카위(자바의 고어)문자의 모태가 되었다.
마하발리푸람에서 4세기 중국 주화와 로마 주화들이 발견되었다. 고대 후기에 이 항구가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마하발리푸람에서 스리하리(Srihari)와 스리니디(Srinidhi)로 읽히는 전설이 새겨진 팔라바 주화 2개가 발견되었다. 팔라바왕은 칸치푸람에서 마하발리푸람을 통치했다. 3세기부터 9세기까지 팔라바왕조는 항구를 사용하여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 무역과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아마도 달마가 남중국 광저우로 떠난 출발지는 수도였던 칸치푸람보다는 국제항구로 번성하고 큰 배를 대기에 적당한 마하발리푸람으로 비정(比定)된다.
항구 유적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조금 떨어져 있다. 해안에는 쇼어(Shore) 사원이 있다. 벵골만이 들이치는 해안가에 탑을 세워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 마하발리푸람이 마르코 폴로 시대 이후로 선원들에게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은 해안에 서 있던 일곱 탑을 암시하는 ‘일곱 탑 사원’이다. 그 중 두 개가 사원에 남아 있다. 쇼오 사원 남서쪽에는 석재를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선박 독(dock) 유산도 남아있다. 고대와 중세에 상선이 배를 정박하던 독이다. 배를 묶어두던 돌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최근까지도 독 시설로 이용되었다는 증거다.
팔라바왕은 주요 항구 마하발리푸람에 팔라바 건축의 백미인 라트 사원을 세웠다. 7세기 초반에 만든 아르주나 고행상을 비롯한 뛰어난 동굴사원은 훗날 타밀건축과 예술의 전범이 된다. 팔라바왕국이 존속한 시기는 275년부터 897년이므로 불교가 번성하던 시기에 힌두교도 공존하면서 번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타밀나두는 전통적으로 힌두 세력의 본거지이며, 오늘날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다. 그러나 팔라바 시대에는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팔라바가 멸망하고 촐라왕국이 이 지역을 지배한 이후에도 불교를 인정하는 일부 국왕에 힘입어 14세기까지 불교가 힌두와 공존했다. ‘타밀나두는 힌두교’라는 단절적 사고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타밀나두 불교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연구조사가 더 필요한 대목이다.
쇼어사원의 수문장 드바라팔라.
쇼어 사원의 탑은 힌두 양식이다. 그런데 탑 앞에 세워진 드바라팔라(Dva Rapala)는 불교 사원의 수문장과 동일하다. 무기를 들고 무장한 전시 또는 괴력난신의 거인으로 묘사되는 문의 수호자가 탑 앞에 서있다. 드바라팔라는 힌두나 불교, 자이니교 사원에 공통으로 등장하며, 동남아 자바 등지에서도 발견된다.
코끼리는 불교와 힌두의 공동의 수호신
마하발리푸람은 타밀나두의 ‘초(supreme) 문화적 기념비’로 호칭될 만한 도시다. 국제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7세기 팔라바왕국 타밀인의 원초적 조각술이 그 정점을 찍은 곳이다. 7세기는 팔라바왕국의 수도인 칸치푸람에서 불교가 번영을 구가할 당시다. 안쪽의 사원군은 바위산을 그대로 조각하여 코끼리와 사자 등 동물, 다양한 신과 인물 군상을 최고의 조각술로 장엄하고 있다. 바위를 뚫어서 석실사원을 만들고 거대한 입체 조각으로 힌두신에게 헌정했다.
아르주나 고행상은 거대한 암벽에 코끼리와 인간군상을 무려 길이 29m, 높이 13m로 새겼다. 동물들이 신에게 경배하고, 고뇌에 찬 아르주나는 한 발을 들고 고행을 한다. 거대한 코끼리는 힌두교로부터 불교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수호신으로 부각된다.
아르주나는 전쟁에 앞서 머뭇거렸기 때문에 그의 친구이자 마부인 크리슈나신이 의무, 즉 인간 행위의 바른길에 대해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준 대화체 형식으로 구성된 시구들의 모음집이 곧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다.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모든 영웅이 집결하는 찬란한 이야기지만, 아르주나는 그 중심에 있는 존재다.
마하발리푸람에는 옛 등대와 오늘날 등대가 공존한다.
동남아와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
아르주나 조각군이 있는 거대한 바위 근처에 당대에 세워진 등대가 있다. 등대의 역사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돌을 쌓아올린 등대로 미루어보아 마하발리푸람이 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항구였고,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는 등대를 세웠을 것이다. 고대의 등대 옆에는 현대의 등대도 병존하고 있어 이 해안이 전략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곳임을 시사한다.
마하발리푸람의 상선은 스리랑카는 물론이고 8세기경 동남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인도의 영향력을 받은 스리비자야, 마자파힛, 앙코르제국, 그리고 중국·로마와 거래했다. 당시 불교왕국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팔렘방과 말레이반도의 카다람이 중요 항구였다. 마하발리푸람의 상선이 당대의 해상 왕국 스리비자야와 많은 거래를 했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팔라바 시대에 중국 항구에는 대규모 인도상인 공동체가 존재하였다. 국제항구 취안저우(泉州)에서 고고학자들은 여러 인도인 유적지를 찾아냈다.
원나라 시기에 중국을 다녀간 가톨릭 수도승 오도릭은 당시 자신이 방문한 마하발리푸람을 이렇게 기록했다. “모바르(Mobar, 馬八兒)는 마하발리푸람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전한 무제 때(기원전 141~87년) 한나라 상선이 인도 동남해안의 향지국(현 칸치푸람)에 다녀왔는데, 이 마아바르는 향지국에 딸린 도시였을 것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