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바다를 건넌 불교

말레이반도의 불교왕국 ②

7390882@hanmail.net 2022. 6. 22. 06:02

말레이반도의 불교왕국 ②

 

‘랑카수카-크다’ 부장계곡은 동남아불교 첫 본거지


크다 부장계곡에서 발굴된 불상(5~9세기,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
 
랑카수카는 말레이반도 서쪽 벵골만 ‘크다’
태국과 말레이 국경이 만나는 ‘접경지대’
유적이 상당히 발굴됐으나 자료가 추가로
더 나올 지역이기 때문에 적어도 몇 십 년
뒤에는 연구가 크게 진척될 것으로 ‘전망’

‘부장(Bujang)’은 동남아 초기불교 중심지
발굴된 도자편에는 스투파가 새겨져 있고
주변은 산스크리트어로 각인되었다.
세베랑 페라이에서 발굴된 비석에는
‘위대한 바다선장 부다굽타’ 이름도 새겨져 …

 양나라에서 만난 랑카수카와 백제 사신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백제 사신. 중국에서 랑카수카와 백제 사신이 조우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낭아수국(狼牙脩國), 혹은 랑카수카로 불린 나라는 한국학계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양(梁)에 온 외국 사신들과 그 나라의 풍속 등을 양 원제가 간략히 적은 <양직공도(梁職貢圖)> 덕분이다. 그림은 각국 사신들의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의 서술과 부합된다. 양직공도의 원본은 사라졌고, 현존 양직공도는 중국 베이징(北京) 중국역사박물관에 있는 모사본이다. 그림에 백제와 랑카수카 사신이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랑카수카와 백제 사신이 조우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쪽에서 백제가, 서쪽에서 말레이반도의 랑카수카 사신이 와서 중국에서 만난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림의 다양한 이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서,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 사신도 양나라에 왔던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 남조의 양에서 백제, 고구려 등이 자주 조우했고, 당시 남조의 양이 열렬한 불교국가였던 것으로 보면 불교 전파의 통로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천축국-랑카수카-양나라-한반도’로의 바닷길 불교 전파로였던 셈이다.


양(梁, 502~557)은 남북조시대에 한족이 강남에 건국한 남조의 세 번째 왕조다. 양서에 이르길, “해남의 여러 나라는 대체로 교주 남쪽에서 서남쪽 대해에 미치는(동남아) 대륙부 및 도서지역에 위치한다. 거리가 가까우면 삼천 리에서 오천 리, 멀면 이삼만 리에 달했으며, 그 서편의 서역 여러 나라와 접한다. 후한 환제(桓帝) 시기에 대진과 천축이 모두 이 길을 통해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중국 남부 해안을 접한 남조의 양은 해남과의 교류와 정보 수집에서 유리했으며, 백제·고구려 등 동이(東夷)와도 통교를 유지했다. 양직공도에 등장하는 다양한 나라와의 외교관계는 양이 지녔던 대외교섭력을 상징한다.

보살황제(菩薩皇帝)로 불린 양무제(464~549)는 분명히 한반도 불교 전파에도 일정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불교의 남방 전교는 양에서 최상을 구가했다. 양무제는 불교를 적극 옹호하여 당시에 수도인 건강 일대에는 사원 500여 개, 스님 10여만 명이 있었다. 무제의 집권 기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불교는 확고부동하게 뿌리내렸다. 무제의 불심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서 그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보살 칭호를 썼을 정도였다.

황제 자신이 불경을 편찬했다. 519년, 혜교(慧皎)스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으로 알려진 <고승전>을 총 14권으로 찬했다. 당시 스님들은 번역, 해석, 선수행, 명율(明律), 통경(通經), 경사(經師), 흥복(興福), 창도(唱導) 등 10여 분야로 나뉘어 있을 정도로 전문화되어 있었다. 천축에서 불경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으며, 한문으로 번역되어 불경이 축적되었다.

양무제 당시 천축국에서 달마(達磨, Bodhidharma)가 입국한다. 달마는 남인도 출신의 타밀인 스님으로, 선종 창시자인 동시에 초대 조사이자 인도 불교의 제28대 조사다. 남인도 팔라바(Pallavas) 왕자로 태어나 왕족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불제자로 귀의했다. 470년 무렵 남중국에 와서 선종을 포교했다. 그와 양무제의 만남과 기록은 다양한 버전으로 증폭되거나 각색되어 오늘에까지 전승되는 중이다. 그만큼 양무제와 달마의 불교사적 위상이 높다는 뜻이다.

항시국가 ‘랑카수카-크다’
랑카수카는 오늘날의 말레이반도 서쪽 벵골만의 크다(Kedah)다. 역사적으로도 랑카수카를 독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랑카수카-크다’로 포괄적으로 크게 병기함이 옳다. 그런데 랑카수카-크다의 위치는 논란이 많다.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랑카수카와 인도 자료에 등장하는 크다의 혼선, 존립한 국가의 변천에 따른 혼선 등 여러 혼선이 빚어낸 결과다. 기왕의 펠리오 가설을 따르면, 포괄적 범주인 ‘랑카수카-크다’로 설정하고, 그 영토가 말레이반도 동쪽 시암만의 파타니(Pattani) 해안과 야랑, 서쪽 안다만의 크다주에 미치는 권역을 포괄했다고 더 넓게 보는 것이 맞다.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말레이반도의 지형적 특징상, 동서를 아우르면서 남북에서 경계를 그었을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시암만으로 통하여 오늘의 태국과 베트남으로, 동쪽으로는 안다만을 통하여 인도와 스리랑카로 이어지는 말레이반도의 중간 허리에 위치했다.

랑카수카-크다 유적이 상당히 발굴되었으나 추가로 자료가 더 나올 지역이기 때문에 적어도 몇 십 년 뒤에는 연구가 크게 진척될 것으로 예상한다. 랑카수카-크다를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묶어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크다는 말레이반도에서 태국과 말레이 국경이 만나는 접경지대다. 안다만에 접한 크다 해안의 아래로 피낭섬, 위로는 랑카위 섬이 있다.

기원전 1000여 년, 토착 말레이인에 의한 정착촌이 므르복(Merbok)강의 지류 어귀에 건설됐다. 그 정착촌이 현재 숭가이바투(Sungai Batu)다. 므르복강은 안다만과 연결되며, 거기서 출발하여 직진하면 남인도 타밀에 닿는다. 지정학적 위치가 절묘하다. 끄라지협을 통해 시암만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믈라카 해협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숭가이바투에는 고대 제철소 유적이 남아있어 강력한 철기문명의 흔적이 확인된다.

동남아 초기 불교 본거지 부장계곡
숭가이 페타니(Sungai Petani)에 있는 부장계곡(Bujang Valley, 말레이어 Lembah Bujang)은 그 자체 거대 힌두-불교 유적군을 거느린다. 강가 옆에 건설되어 곧바로 안다만을 통하여 인도로 갈 수 있는 전략적 위치다. 산스크리트어에서 ‘bhujanga’는 뱀을 의미하므로 ‘뱀 계곡’이 된다. 시암만 건너편 메콩강 하류에 건설된 푸난과 앙코르를 세운 크메르 건국신화도 ‘뱀-나가’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인도에서 건너온 어떤 뱀 숭배 집단과 연관성이 엿보인다. 앙코르 사원의 입구에 머리를 여럿 가진 코브라가 상징 조각으로 서있다. 이는 뱀이 고대 동남아 권력 공고화에 이바지한 신화적 모티프를 증거한다.

부장은 동남아 초기 불교의 중심지다. 발굴된 도자편에 스투파가 새겨져 있고, 주변은 산스크리트어로 각인되었다. 문자로 볼 때 남인도 그란타(Grantha) 문자로 450~500년으로 추측된다. 세베랑 페라이(Seberang Perai)에서 발굴된 비석은 ‘위대한 바다선장 부다굽타(the great sea-captain Buddhagupta)’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 성공리에 여행했다”고 했다. 이 비석은 1840년대에 크다의 무다(Muda)강 주변에서 발굴되었으며, 주변에서 불교 사원터도 확인되었다. 무다강 주변에서는 많은 힌두 사원터도 발굴되었다. 이로써 이 일대가 불교와 힌두의 본거지였음이 확인된다. 당말과 오대시대의 도자기, 중동 이슬람의 유리그릇도 발굴되었다.

부장계곡의 중요성은 이미 7세기에 중국에서 인정받았다. 607년 수(隋) 왕실은 광저우에서 부장계곡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약 70년 후, 중국 문헌은 부장계곡을 지에투(茶, Jietu)로 기록한다. 688~695년 사이에 말레이군도를 방문한 당의 의정(義淨)스님도 크다를 언급했다. 팔렘방을 떠난 이후 671년경 인도로 자신을 데려다 줄 배로 갈아탄 그곳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