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바다를 건넌 불교

미얀마의 불교왕국 ④

7390882@hanmail.net 2022. 7. 29. 06:19

미얀마의 불교왕국 ④

 

벵골만 무역왕국, 라카인 므라욱우 고색창연한 유적

므라욱우의 사찰마다 다양한 불상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싯타웅의 웅장했던 사원들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절정기의 므라욱우는 갠지스강 기슭에서
에야와디강 서쪽 끝까지 뻗어 있는 라카인
왕국의 중심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다카와
치타공을 포함하여 므라욱우가 통치하는

12개 ‘갠지스강 도시’가 오늘날 방글라데시
영역에 존재했다. 왕국이 번성하면서 도시
주변에 많은 사원을 지었다. 덕분에 바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원과 탑이 남아있다

‘미얀마 4대 불교 민족’ 라카인족
관광객들은 대체로 미얀마 중부의 바간과 만달레이의 불교유산을 찾아다닌다. 반면에 방글라데시 국경을 접한 북서부 라카인(혹은 아라칸)에는 좀처럼 가지 않는다. 교통이 불편할뿐더러 소수민족 문제 때문에 군부의 통제가 심하다.

라카인족은 현재 라카인 해안을 따라 많이 살고 있다. 미얀마 총인구의 4%에 불과하다. 라카인족은 또한 방글라데시 남동부인 항구도시 치타공에도 살고 있다. 치타공 구릉지대의 라카인 후손은 최소한 16세기 이래로 그곳에 정착했고, 마르마족으로 불린다. 이들은 라카인 왕국이 치타공 지역을 지배할 때 이래로 이 지역에 살아왔다. 이슬람국가 방글라데시에서 불교도가 드물게 집단으로 살고 있는 영역이다. 버마족, 샨족, 몬족과 함께 미얀마 4대 불교 민족의 하나인 라카인족은 주로 상좌부불교를 믿고 있다. 라카인 문화는 미얀마 문화와 유사하지만, 지리적으로 아라칸 산맥에 의해 미얀마 본토와 분리되어 있어 인도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므라욱우(Mrauk U)는 1430년부터 1784년까지 354년간 라카인의 수도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손꼽히던 곳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대체로 시트웨에서 칼라단강을 거슬러 오르는 뱃길로 찾아들어간다.

므라욱우 역시 강항도시다. 벵골만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무역 허브로 발전하여 미얀마 내륙의 뒷문이자 벵골만 동쪽 해안의 중요 항구 역할을 했다. 미얀마의 쌀, 상아, 코끼리, 수액, 사슴 가죽과 같은 상품과 벵골, 인도, 페르시아 및 아라비아의 목화, 노예, 말, 카우리, 향신료 및 직물의 경유지가 되었다. 미얀마 남부의 페구와 함께 18세기까지 미얀마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다.

30㎞ 길이의 요새와 해자, 운하가 복잡한 그물 모양으로 요새화된 국제도시다. 도시 중심에 우뚝 솟은 궁궐이 있었다. 대항해시대에는 유럽 열강의 선박이 속속 들어왔다. 일종의 자유무역항으로 부각되었으며 제2의 베네치아라는 별칭을 얻었을 정도로 수로가 발달하였다. 인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므라욱우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풍부한 고고학 유적지의 하나다. 석재 비문, 불상, 부처님의 발자취, 고대 인도의 굽타 양식의 대탑 등이 남아있다. 므라욱우에는 수많은 사원과 탑이 흩어져 있어 한때 번성을 구가하던 라카인 불교왕국의 영화를 웅변해준다.

절정기의 므라욱우는 갠지스강 기슭에서 에야와디강 서쪽 끝까지 뻗어 있는 라카인 왕국의 중심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다카와 치타공을 포함하여 므라욱우가 통치하는 12개의 ‘갠지스강의 도시’가 오늘의 방글라데시 영역에 존재했다. 왕국이 번성하면서 도시 주변에 많은 탑과 사원을 지었다. 덕분에 바간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많은 사원과 탑이 남아있다.

싯타웅 석굴 안에 모셔진 본존불.


‘8만 불상의 성전’ 싯타웅 파야
북부의 싯타웅 파야를 찾았다. ‘8만 불상의 성전’이란 곳이다. 민빈왕이 1535년 건립했다. 라카인 역사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중요한 유적이다. 인도와 미얀마의 오랜 연결점이 산스크리트어에서 확인된다. 외벽에 커다란 꽃 모양의 이슬람식 유약 타일이 보인다. 타일은 이슬람 문명이 바다를 건너 강을 따라 융합된 결과물이다.

안다만해로 연결된 강을 따라 곳곳에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이 흔적을 남겼다. 므라욱우 앞에 다냐와디(1~6세기), 웻탈리(3~11세기), 렘로(11~15세기) 세 왕조가 있었다. 이들 왕국도 일찍부터 불교왕국으로서 자리 잡았다. 므라욱우 초입의 웻탈리 사찰에 들어서자 ‘AD. 327’ 입간판이 마중한다. 적어도 2000여 년간 불교가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네 왕조가 불교를 바탕으로 하되 힌두교과 이슬람교의 융합으로 역사를 전개해나갔다.

므라욱우에서 조금만 더 가면 친(Chin)족이 거주하는 친주가 있고, 그 너머에 소수민족의 보고인 중국 윈난성이 버티고 있다. 더불어 태국 치앙마이와 베트남 고산족이 잇닿아 있다. 미얀마의 다양한 소수민족 분리운동이나 태국 남부 말레이반도 무슬림의 분리운동은 현실적 다민족과 국민국가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문화유산인 사원 앞에서 관광객의 시주를 받는 스님들.

 

이슬람의 도래 흔적이 남아있는 탑의 타일 문양.


2012년 5월28일 시트웨 로힝야 무슬림에게 불교도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영국 식민통치가 끝난 이후로 곪아 터진 로힝야 이슬람교도와 불교도인 아라칸족의 서로에 대한 분노가 싸움에 불을 붙였다. 지난 50년 동안 미얀마의 소수민족 통일은 군부의 관심사였으며,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한 미얀마화가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는 로힝야 같은 소수민족과 심각한 충돌을 빚고 국제문제화 되었다. 과거의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살던 균형과 공존이 깨어지고 비극적 종교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 로힝야족을 정략적으로 이주시켜서 민족 갈등을 유발한 영국 식민통치의 결과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