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0882@hanmail.net 2019. 12. 28. 11:56

이성윤 초상 보물1490호

재 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이성윤(李誠胤, 1570~1620)이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위성공신 2등(衛聖功臣 2等)에 녹훈(錄勳)될 때 하사받은 위성공신상(衛聖功臣像)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는 초상화이다. 이성윤(李誠胤)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실(景實), 호는 매창(梅牕)·호기(互棄)이며,  15세 때 금산수(錦山守)에 예수(例授)되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이 되어 세자 광해군을 따라 피란하여 신주(神主)를 봉안하였다. 선조가 죽자 혼전(魂殿)을 지켜 그 공으로 도정으로 승진하였고, 또 광해군 분조에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 2등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이 임란(壬亂)을 극복하고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어진 광해군(光海君) 5년(1613)의 위성공신(衛聖功臣)과 익사공신(翼社功臣), 정운공신(定運功臣), 형난공신(亨難功臣)은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모두 삭훈(削勳)되고 공신녹권(功臣錄券)과 공신도상(功臣圖像)도 국가에서 수거하여 소각했다. 그래서 광해군 때의 공신상(功臣像)은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어 그 실상이 미상인 채 거의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현재 후손가에는 위성공신(衛聖功臣) 녹권과 이 초상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도상(圖像)은 17세기 초반의 가장 전형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의 모습으로서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拱手)한 뒤 교자상(交椅子)에 반우향(半右向) 정도로 앉은 모습이며,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彩氈)을 깔고 두 발은 돗자리를 깐 목재 의답(木製 椅踏) 위에 약간 팔자형(八字形)으로 벌린 모습이다. 위성공신(衛聖功臣)으로 따지면 2등의 공신상(功臣像)이지만 종실(宗室) 어른일 뿐만 아니라 평소 높은 인품(人品)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인 듯, 전체적으로 금은(金銀)이 매우 화려하게 사용되고 석채(石彩) 진채(眞彩)도 매우 곱고 선명하며 묘사(描寫)도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여 17세기 초반의 공신상(功臣像) 중에서도 매우 양질(良質)의 상품(上品)에 속하는 초상화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