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1509호
허목 초상 보물1509호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우석로 70(석사동 산27-1) 국립춘천박물관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초상으로 오사모에 담홍색의 시복(時服)을 입고 서대(犀帶)를 착용한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에 따르면 1794년(정조18) 정조가 허목(許穆)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그 칠분소진(七分小眞)을 얻고자 채제공(蔡濟恭)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은거당(恩居堂, 1678년 숙종이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진을 모셔다가 이명기(李命基)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정의 오른 쪽에는 채제공(蔡濟恭)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이 허목(許穆) 초상은 생시진상은 아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사대부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줌과 아울러,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李命基)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허목(許穆)의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㝘)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