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1677호
이광사 행서 화기 보물1677-1호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이광사(李匡師) 행서(行書) 화기(畵記)』는 18세기의 명필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42세 되는 1746년(영조 22) 여름에 쓴 것으로 왕희지(王羲之) 행서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이광사(李匡師) 특유의 개성적 필치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의 중년 행서를 대표할 만하다. 또 이 서축은 앞쪽의 두 글자 고(顧)ㆍ개(愷)가 좀 탈락된 것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필자미상이기는 하나 운원(運元)이란 사람이 무신년에 쓴 관기(觀記)가 딸려 있어 그 가치를 더해준다.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 보물1677-2호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이광사(李匡師) 필적(筆蹟) 원교법첩(員嶠法帖)』은 18세기 대중적 명필이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것으로 글씨를 받은 사람이나 제작연대는 적히지 않았지만, 서첩에 찍힌 원교은자(員嶠隱者), 이광사(李匡師), 이광사필서(李匡師筆書), 이광사인(李匡師印), 이광사장(李匡師章), 도보(道甫), 원교(員嶠), 이도보씨(李道甫氏), 조선국이광사자도보(朝鮮國李匡師字道甫) 등의 인영(印影)을 통해 적거 이전 중년 필적으로 여겨진다. 이 서첩은 모두 40면으로 앞쪽의 25면은 밝은 옥색 비단에 먹으로 썼고, 중간의 9면은 매우 옅은 담옥색(淡玉色) 비단에 먹으로 썼으며, 뒤쪽의 6면은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썼다. 옥색ㆍ담옥색ㆍ검은색 비단에 먹과 금니를 사용하여 작고 큰 글자를 전예해행초 오체로 정성스럽게 썼다. 전서(篆書)를 쓴 부분에는 글자마다 오른쪽 위에 붉은 먹으로 석문(釋文)을 달아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표지에 있던 원래의 제첨(題簽)이 떨어진 듯 뒤에 “원교법첩(員喬法帖) 전해초(篆楷艸)”라고 써놓았는데 ‘원교(員喬)’는 오류이므로 ‘원교법첩(員嶠法帖)’이라 고쳐 표기하였다. 서첩의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이 서첩은 현존하는 이광사(李匡師)의 수많은 서첩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작첩(作帖) 방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광사(李匡師)의 서론적(書論的)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