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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선생집 권1 보물1702호

소 재 지; 대구 달구벌대로 1095(호산동 1) 계명대학교

삼봉선생집(三峯先生集)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학자이며 문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시문집(詩文集)으로 세조11(1465)년에 간행된 중간본(重刊本)의 잔권(殘卷) 권1이다. 정도전(鄭道傳)의 문집은 저자 생존시기인 태조 6년(1397)년에 아들 정진(鄭津, 1361~1427)이 저자가 평소 정리해두었던 시고(詩稿) 중 권근(權近)이 가려 뽑고,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이 비점을 찍어 간행하였는데, 이 문집의 초간본에는 권근(權近)의 서문을 실었다. 그 후 저자가 왕자의 난에 관련되어 1398에 처형되면서 문집의 판본들은 흩어져서 없어졌으므로, 증손 정문형(鄭文炯, 1427~1501)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시인 세조(世祖) 11년(1465)에, 초간본에『경제문감(經濟文鑑)』,『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불씨잡변(佛氏雜辨)』등을 합편하고,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서문을 붙이고 7권으로 편집하여 안동부(安東府)에서 목판(木版)으로 간행하여, 안동에 장판(藏板)한 것이 중간본(重刊本)이다. 이어서 정문형(鄭文炯)이 강원도관찰사로 있던 성종(成宗) 18년(1487)에 지방에 산재해 있던 제영(題詠) 등 120장을 수집하고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등을 추가하여 제8권으로 편집하여 강릉(江陵)에서 목판으로 추각(追刻)하여 안동에 옮겨 장판(藏板)한 것이 3간본이다. 그후 정조(正祖) 15년(1791)에 왕명으로 규장각(奎章閣)에서 전체적으로 재편집과 교정(校正)을 거쳐 대구(大邱)에서 목판으로 판각하여 대구에 장판(藏板)한 것이 4간본으로 14권 7책본인 현재의 통행본 이다. 이들 각 판본중 초간본에는 권제1 삼봉선생집(三峯先生集)의 권수제(卷首題) 다음 항에「창녕 성석린 선(昌寧成石璘選), 안동 권근 비(安東權近批)」의 문구와 함께 본문에 비점(批點)이 판각되어 있는데 반하여, 중간본에는 같은 문구와 비점(批點)이 판각되어 있지 않고 어미(魚尾)도 달라서 구별된다. 3간본은 제8권이 추가된 점에서 구분되고, 4간본은 초간본처럼 비점(批點)이 추가되고 분권이 14권본으로 재편되어 쉽게 구별된다. 이 판본은 권두(卷頭)에 권근(權近, 1352~1409)의 서문(序文)에 이어 권(卷)1에는 <잡영(雜詠)>의 제하(題下)에 ‘관산월(關山月)’·‘출성(出城)’·‘고의(古意)’등 오언고시(五言古詩) 51首(수), 칠언고시(七言古詩) 7수(首), 오언절구(五言絶句) 4수(首) 육언절구(六言絶句) 8수(首)등 시(詩) 70수(首)와 ‘양촌부(陽村賦)’·‘묵죽부(墨竹賦)’·‘매천부(梅川賦)’ 등 부(賦) 3수(首)가 수록되어 있다. 권말(卷末)에는 중국인 주탁(中國人周倬)의 후지(後識), 중국인 장부(中國人張溥)의 제삼봉시집(題三峯詩集), 이색(李穡, 1328~1396)의 발문(跋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1판, 제30판과 제31판, 제54판의 2종의 판본(版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41판과 제42판은 제책상(製冊上)의 실수(失手)인 듯 순서가 바뀌어 있다. 전체적으로 변란(邊欄)의 형태(形態)와 책(冊)의 크기 및 지질(紙質) 등은 동일하며, 제1판~제30판의 판식(版式)은 반곽(半郭)16.3×12.5㎝, 유계(有界), 11행(行)20자(字), 백구(白口), 무어미(無魚尾)인데 비하여 제31판~제54판의 판식(版式)은 반곽(半郭)16.7×13.0㎝, 유계(有界), 11행(行)20자(字), 대흑구(大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조선건국의 기틀을 잡는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문집은 인물의 비중이나 내용의 중요성은 물론 국내 유일본으로 매우 귀중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