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2106호
안동 도산서원 농운정사 보물2106호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 679-2)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더불어 퇴계(退溪)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로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민도리식(첨차나 익공 등의 공포부재를 사용하지 않고 출목도 없는 결구법) 맞배지붕으로 ‘공(工)’자형 평면이다. 일반적으로 공(工)자형 건물은 풍수지리 양택론에서 금기로 여겨왔기 때문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평면 형태로 기존의 다른 서원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가서(家書)>, <도산기(陶山記)>,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 <퇴도선생언행통록(退陶先生言行通錄)> 등의 고문헌을 통해 건축 참여인물과 과정, 관련 내용 등을 자세하게 확인 할 수 있다.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동재서헌(東齎西軒)의 위계적인 배치, 복합적인 용도에 따른 실의 배치와 구성, 다양하고 위계적인 창호 형식 등을 퇴계(退溪)가 설계 단계부터 구상한 것으로 다른 건축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농운정사(隴雲精舍)의 창호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설치하였는데 높이와 크기를 조절하여 서로 다르게 구성한 점은 실내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향촌에서 선비와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학문과 교육의 현장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드문 사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벼슬을 버리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으며 그에 인접해서 제자들이 기거하며 공부할 수 있는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지었다. 스승과 제자가 적절한 거리를 두고 하나의 영역 안에서 거처하는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 다른 곳에서도 널리 이루어졌겠지만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으며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드물게 남아있는 사례의 하나로 꼽힌다. 농운정사(隴雲精舍)는 조선의 학문세계나 정치활동에서 큰 활동을 한 영남 선비들이 젊은 시절 퇴계(退溪)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공부하던 산실이며, 그 원형이 잘 남아있는 유적이다. 이 건물에서 공부한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 중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배향된 퇴계(退溪)의 제자 조목(趙穆)을 비롯해서 영남의 큰 학맥을 이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임진왜란의 국난을 헤쳐나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있었고 그밖에도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이 건물을 거처 갔다. 건축형태에서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토마리 집의 원형을 살려 지은 교육시설의 뛰어난 사례로 꼽히며, 그 평면은 가운데 몸채를 두고 전면과 후면 양 끝에 마루방과 헛간을 갖춘 ‘공(工)’자 형태를 이룬다. 농운정사(隴雲精舍)의 도토마리 양식은 도산서당(陶山書堂) 건립을 맡았던 승려장인 법연(法緣)의 구상에 근거한 것이며, 그의 제자 정일(淨一)에 의해 완성되었다. 도토마리 집은 지금도 안동지역 민가에 일부 남아있으며 농운정사(隴雲精舍)가 지어지던 16세기에는 더 넓은 범위에서 수용되었던 건축형태로 보이며, 18, 19세기 중부지방 사찰의 대방은 도토마리 양식과 유사한 형태로 꼽힌다. 이런 점에서 농운정사(隴雲精舍)의 도토마리 양식은 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형태의 하나라고 평가된다. 역사적, 학술적, 건축사적 가치가 뛰어나 보존 관리할 필요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