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불자라면 놓쳐선 안될 사찰성보문화재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불상 일괄

7390882@hanmail.net 2022. 3. 25. 06:19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불상 일괄

 

탑 출토 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예술성도 높아

경전 근거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의 아미타 협시 주목

극락정토 주재 아미타여래와
현실 모든 장애 없애주는 관음
지옥 중생 구제 서원한 지장

불보살이 함께 대중들에게
큰 위안 줄 것…희망이었을 것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불보살상(불교중앙박물관 보관). 고려~조선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왼쪽부터 금동보살상(높이 36.5㎝), 지장보살상(높이 26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33.5㎝), 금동관음보살상(높이 25.9cm).


한국 최대 아미타불 계신 곳 
부여 무량사는 한국 최대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극락전 안에는 흙으로 조성한 아미타삼존불,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압도적인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임진왜란 후에 한국의 사찰들에서는 폐허가 된 사찰을 복원하면서 패기와 힘이 넘치는 대형의 불상들을 대거 조성하였는데, 이 삼존불은 이러한 부흥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할 수 있다. 

무량사는 현실에서 아미타정토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아미타불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광명을 주는 부처라는 뜻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로도 부르는데, 사찰 이름을 무량사라 부른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무량사는 평지에 펼쳐진 고즈넉한 고찰의 모습을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하여 사찰의 규모가 대단했다고 전해지며, 이는 현재 극락전 앞에 세워져 있는 5층석탑(보물, 높이 7.5m)의 규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사찰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조선 인조 때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량사는 특히 방랑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김시습과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조선 세조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을 애달아했던 김시습(金時習)은 이를 계기로 스님이 되어 전국을 유랑하였는데, 무량사에서 말년을 보내고 입적했다. 김시습 스님은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스님의 탑은 무량사에 있으며, 초상화는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되어 있다.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한국 석탑 봉안 불상의 정수 
오늘 소개할 성보는 무량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특히 그 가운데 불상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탑에 불상을 봉안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탑 안에 불상을 다량으로 봉안하는 의례가 유행하였다.

무량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탑에서 나온 불상들 가운데 그 크기가 가장 크며, 불상의 예술성도 높아 한국 석탑에 봉안된 불상의 정수로 손꼽을 수 있다.

고려 전기시대에 세워진 무량사 오층석탑은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여 세련되고 장중한 미를 뽐내는 석탑이다. 1971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하였을 때 5층 탑신에서는 사리장엄구가, 3층 탑신에서는 작은 불상 1구, 그리고 1층 탑신 안에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ㆍ우에 지장과 관음보살의 금동삼존불이 발견되었다.

5층 탑신 안 사리공에서 청동으로 만든 합 형태의 사리기가 이중으로 겹쳐져 있었고, 그 안에서 여러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큰 청동합 안에는 작은 내합이 있었고, 그 안에는 수정으로 된 작은 병에 사리 1과, 청동으로 만든 병에는 회백색 사리 93과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법사리인 다라니경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하게 어떠한 경전인지를 알 수 없고, 향나무 등 여러 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5층 탑신의 유물들은 고려 전기, 즉 탑을 건립하던 당시에 조성하여 매납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발견 당시 모습. 홍사준, ‘무량사 오층석탑 해체와 조립’(한국미술사학회 '고고미술' 117) 참조.

 

사리장엄구, 많은 불상과 봉안
무량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의 특징은 많은 불상들을 함께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탑의 크기도 워낙 커서, 사리공도 다른 탑보다 큰 편이다. 

1층 탑신의 사리공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 불상들은 아무런 장치 없이 잡석과 흙으로 채워진 바닥 위에 아미타여래는 남면을 향하여 있었고, 지장보살상은 아미타여래보다 앞으로 나온 상태로 놓여 있었다. 관음보살상은 본존 앞에서 동쪽을 향하여 안치되어 있었다. 삼존불의 주존불인 금동아미타불상(높이 33.5㎝)은 도난당해 오랜 세월 사찰을 떠나 있었으나, 다행히도 최근에 환수되어 여법하게 삼존불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아미타삼존상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로 구성된 형식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신앙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본래 아미타신앙의 기본 경전인 <관무량수경>에는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등장한다. 그런데 경전에 근거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이 된 것은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와 현실의 모든 장애를 없애주는 관음보살, 그리고 지옥에 빠진 중생까지 모두 구제하고자 서원한 지장보살의 세트가 대중에게 큰 위무를 주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탑 안에서 발견된 불상 가운데 가장 큰 고려 시대의 금동보살상(높이 36.5㎝)은 탑의 어디에서 나왔는지 당시 보고서에 생략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이 금동보살상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보살상의 크기로 보아 1층 탑신에 봉안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고려 전기에 조성된 무량사 탑 안에 봉안된 불상과 사리장엄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것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탑의 설립시기 뿐만 아니라 탑을 중수할 때마다 사리장엄구는 여러 차례 매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미타삼존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미타여래는 머리의 정상 모습이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한 형태이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는데, 중앙계주는 현재 없어진 상태이고, 정상계주는 소라모양이다. 얼굴 표정은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며, 미간 사이의 백호는 큼직하다. 손 모양은 아미타여래가 설법하는 수인을 하고 있으며 가슴과 배, 무릎에는 양감이 남아 있다. 이렇게 뾰족한 머리의 모습과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 표정은 중국 명나라 시기 불상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관음보살상의 얼굴과 옷 입은 모습은 아미타여래와 거의 흡사하다. 머리에 산(山)모양의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중앙에는 아미타여래를 새겼으며, 구슬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머리카락이 양 어깨로 흘러내려오는 점, 가슴과 무릎 위에 늘어진 영락 장식은 불상과 구별되는 보살상의 모습이다.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상은 스님의 모습이거나 혹은 두건을 쓴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고려 말 조선 초 시기에는 두건을 쓴 모습의 지장보살상이 유행하였다. 

망자 추선 현세 수복…아미타신앙
이 삼존불은 아미타여래를 협시보살보다 약간 크게 조성하여 주존불임을 나타내었다. 삼존의 모습은 옷 입은 방식과 신체 표현에서 거의 비슷하며 불복장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 탑 안에 봉안된 불상은 주로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봉안하였다. 이를 통해 망자의 추선을 빌고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현세의 수복장생(壽福長生)을 기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사 오층석탑 발견 불상은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특히 아미타삼존상은 조선 초기 탑에 봉안하는 불상의 신앙적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불상이다.

이제 멀리서부터 봄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사찰보다도 향기로운 흙냄새와 고즈넉하고 멋진 주련이 걸려 있는 만수산 무량사에서 새봄에는 마음의 평화와 각오를 다져보기를 바래본다.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 [불교신문37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