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문종(文宗) 22년~23년

7390882@hanmail.net 2023. 6. 30. 06:36

문종2(文宗二) 22년~23년

 

〈무신〉 22년(1068) 봄 정월 갑술. 초하루 일식이 일어났다.

정축.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상곤(相鯤)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계사.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낙성을 축하하는〉 경성회(慶成會)를 열었으며, 이틀 밤을 묵고 환궁하였다.

정유. 최유선(崔惟善)을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왕무숭(王懋崇)을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로, 김의진(金義珍)을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임명하고, 그 나머지는 종전과 같이 하였다.

무술. 김행경(金行瓊)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정(李頲)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하였다.

2월 신해. 장작감(將作監) 전석조(全錫祚)를 지서북면춘하번병마사(知西北面春夏番兵馬事)로, 태부소경(太府少卿) 이징망(李徵望)을 동북면춘하번병마부사(東北面春夏番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3월 정묘. 탐라성주(耽羅星主) 유격장군(遊擊將軍) 가야잉(加也仍)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 갑자. 최상(崔尙)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병인.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최인(崔駰) 등을 급제시켰다.

5월 갑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봄부터 여름이 가도록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고, 강렬한 태양이 오랫동안 위세를 떨쳐 농작물이 말라 죽고 있다. 이는 아마도 내가 부덕하여 이런 천벌의 징조가 이르게 되었으니, 생각건대 몸을 삼가며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자 한다. 오늘 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잡범(雜犯)과 공사범으로 유형[公流], 민사범으로 도형[私徒] 이하의 죄인은 모두 석방하라.”
라고 하였다.

6월 임인.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안구(安矩)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경신.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아뢰기를,

“판관(判官) 임희열(任希悅), 녹사(錄事) 정신(鄭申), 장군(將軍) 거흥(巨興) 등이 전함(戰艦)을 타고 초도(椒島)를 순행하다가, 적의 배 10척을 만나 싸워 적을 무너뜨리고 적선 7척을 노획하였으며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매우 많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기뻐하여 임희열 등에게 평상복 1벌과 도금한 은대(銀帶) 1개를 하사하고, 여러 전공자(戰功者)에게도 모두 관작과 상을 하사하였다.

가을 7월 신사. 송인(宋人) 황신(黃愼)이 와서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우리 황제께서 강회양절형호남북로도대제치발운사(江淮兩浙荊湖南北路都大制置發運使) 나증(羅拯)을 불러 말씀하기를, ‘고려는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라 부르고 그들의 선대부터 정성을 다하여 매우 부지런하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막히고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지금 들으니 그 나라의 군주가 현명한 왕이라 하니, 사람을 보내 효유(曉諭)할만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나증의 추천으로 저희가 와서 천자의 뜻을 전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객사의 대우가 넉넉하고 두터웠다. 송(宋) 상인 임영(林寧)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정유.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아뢰기를,

“판관(判官) 임희열(任希悅), 도부서부사(都部署副使) 배행지(裴行之),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 석수규(石秀珪) 등이 또 초도(椒島)를 순시하다가, 밤에 염라포(閻羅浦)에 이르러 적의 배 8척과 마주쳐 그 중 3척을 격파하였습니다. 남은 적이 해안에 상륙하여 흩어져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후하게 관작과 상을 더하였다.

8월 정사. 태자에게 명하여 송(宋) 진사(進士) 신수(愼修)‧진잠고(陳潛古)‧저원빈(儲元賓) 등을 불러 옥촉정(玉燭亭)에서 시부(詩賦)를 시험하게 하였다.

기미. 강원광(姜源廣)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경신. 위위경(衛尉卿) 문양렬(文揚烈)을 지서북면추동번병마사(知西北面秋冬番兵馬事)로, 형부시랑(刑部侍郞) 홍덕위(洪德威)를 동북면추동번병마부사(東北面秋冬番兵馬副使)로 삼았다.

9월 갑신.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으로 치사(致仕)한 최충(崔冲)이 죽었다.

겨울 10월 을묘.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아린(阿隣)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2월 기해. 초하루 요(遼)에서 익주관내관찰사(益州管內觀察使) 위성(魏成)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무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왕현(王顯)이 세 번 글을 올려 퇴직을 요청하였다.

이 해에 남경(南京)에 새 궁궐을 창건하였다.

〈기유〉 23년(1069) 봄 정월 무자.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사어하(沙於賀)가 내조(來朝)하였다.

2월 무오. 태복경(太僕卿) 하주려(河周呂)를 지동북면춘하번병마사(知東北面春夏番兵馬事)로, 대부소경(大府少卿) 박양단(朴陽旦)을 서북면춘하번병마부사(西北面春夏番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3월 기사.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남쪽 산봉우리에 올라 계제(禊祭)를 지내고 계음(禊飮)한 뒤에, 친히 상사(上巳, 3월 3일) 시를 짓고 시신(侍臣)에게 화답시를 올리게 하였다.

여름 4월. 가물었다.

계묘. 왕이 진관사(眞觀寺)에 갔다.

5월 경진.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여 정자 아래 연못 속에서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돌[瑞文石]을 얻었으므로, 문신에게 명하여 노래와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갑신. 비를 빌었다.

계사. 정유산(鄭惟産)을 상서좌승 우간의대부(尙書左丞 右諫議大夫)로, 양치춘(楊稚春)을 시어사(侍御史)로, 한억(韓億)·이덕승(李德昇)을 모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손관(孫冠)을 좌보궐(左補闕)로, 조윤간(趙倫簡)·심주찬(沈周贊)을 모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하였다.

6월 임인. 송(宋) 상인 양종성(楊從盛)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을축. 초하루 일식이 일어났다.

정축. 송(宋) 상인 왕영(王寧)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계사. 상서좌승 우간의대부(尙書左丞 右諫議大夫) 정유산(鄭惟産)을 서북면추동번병마부사(西北面秋冬番兵馬副使)로,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징망(李澄望)을 동북면추동번병마부사(東北面秋冬番兵馬副使)로 삼았다.

겨울 윤11월 정유. 왕의 동생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가 죽었다.

12월 계해. 초하루 요(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고용(高聳)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요(遼)에서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검교우복야(檢校右僕射) 야율극리가(耶律極里哥)가 왔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