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문종(文宗) 24년~25년

7390882@hanmail.net 2023. 7. 7. 06:25

문종2(文宗二) 24년~25년

 

〈경술〉 24년(1070) 봄 정월 계사.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경자. 운석(隕石)이 대구현(大丘縣)에 떨어져 돌로 변하였다.

기유. 김양감(金良鑑)을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 左諫議大夫)로, 이정공(李靖恭)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김공(金拱)을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박덕영(朴德英)을 우보궐(右補闕)로, 강안서(康安庶)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김예(金銳)·김상기(金上琦)를 좌·우보궐(左右補闕)로 임명하였다.

2월 병인.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미륵전[慈氏殿]이 새로 창건되었으므로 경성대회(慶成大會)를 열고 하룻밤 묵고 돌아왔다.

임신.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계유. 연등대회(燃燈大會)이므로 왕이 태자, 제왕(諸王), 시신(侍臣)들에게 중광전(重光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새벽이 되어서야 끝냈다. 한식(寒食)이 15일이고 국기일(國忌日)이 13일이므로, 12일로 연등회 여는 날을 삼았다.

3월 기미. 김덕부(金德符)를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신유. 초하루 왕이 상춘정(賞春亭)에서 곡연(曲宴)을 베풀고, 태자‧제왕(諸王)‧시신(侍臣)들에게 각각 상화시(賞花詩)를 짓게 하였다.

신미. 시냇가에서 비를 빌었다.

임신. 병부시랑 좌간의대부(兵部侍郞 左諫議大夫) 문정(文正)을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로, 비서소감(秘書少監) 고유(高維)를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병자.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최익신(崔翼臣) 등을 급제시켰다.

5월 임인. 왕이 왕자 왕탱(王竀)을 현화사(玄化寺)에 출가(出家)시켜 머리 깎고 승려가 되게 하였다.

6월. 흥왕사(興王寺)에 성(城)을 쌓았다.

가을 7월 을미. 상서우승 간의대부(尙書右丞 諫議大夫) 김양감(金良鑑)을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로, 호부시랑(戶部侍郞) 김약진(金若珍)을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로 삼았다.

8월 신미.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한 김의진(金義珍)이 죽었다.

기묘. 어사대부(御史大夫) 강원광(姜源廣)이 죽었다.

송(宋)에서 호남형호양절발운사(湖南荊湖兩浙發運使) 나증(羅拯)이 다시 황신(黃愼)을 보냈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회덕(懷德)의 부친 이우불(尼于弗)이 선조 때부터 변방에서 공이 있으니, 회덕에게 봉국장군(奉國將軍)을 제수하라.”
라고 하였다.

9월 병신. 왕이 상춘정(常春亭)에서 잔치를 열고 근신(近臣)에게 시를 짓게 하니, 밤늦게야 끝났다.

겨울 10월 경오.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갔다.

11월 갑오. 고수탄철고(固守炭鐵庫)를 개경(開京) 사방에 비치하였다.

12월 정사. 초하루 요(遼)에서 위위경(衛尉卿) 화욱(和勗)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신해〉 25년(1071) 봄 정월 정해.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기해. 김행경(金行瓊)을 상서좌복야 판상서형부사(尙書左僕射 判尙書刑部事)로, 최유부(崔有孚)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홍덕위(洪德威)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정유산(鄭惟産)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였다.

신축. 김양감(金良鑑)을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 知御史臺事)로, 노인(盧寅)을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 左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임인. 아들 왕수(王琇)를 검교상서령 수사공(檢校尙書令 守司空)으로, 최유선(崔惟善)을 수사도(守司徒)로, 이유충(異惟忠)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하였다.

임자. 김행경(金行瓊)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삼았다.

계축. 서여진(西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분태(紛泰)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2월 신미.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인. 특별히 연등회를 열고, 왕이 경령전(景靈殿)에 배알하였다.

3월 경인. 송(宋)에 민관시랑(民官侍郞) 김제(金悌)를 보내 표문과 예물을 전하였다. 처음 황신(黃愼)이 돌아갈 때에 복건(福建)에 첩(牒)을 보내 예를 갖추어 조공(朝貢)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르러 김제를 보내 등주(登州)를 거쳐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무술. 강원광(姜源廣)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증(追贈)하였다.

신축.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상곤(霜昆) 등 22인이 포로 된 우리나라 사람을 속환[購還]하였다.

무신. 왕이 대안사(大安寺)에 갔다.

여름 4월 임술.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정묘.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노우달(奴于達) 등 1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각 관직을 하사하였다.

계유. 왕이 친히 구정(毬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인.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갔다.

임오.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마호달(麻胡達) 등 18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귀덕장군(歸德將軍)을 더하고 전례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5월 을유. 왕무숭(王懋崇)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로 삼았다.

정해. 시냇가에서 비를 빌었다.

계사. 서여진(西女眞)의 요연(褭演) 등이 내조(來朝)하니 관직과 상을 넉넉히 하사하였다.

무술. 헌사(憲司)에서 보고하기를,

“송인(宋人) 예빈성주부(禮賓省注簿) 주항(周沆)은 본래 문예로 임용되었으나, 지금 뇌물수수죄를 범했으니 직전(職田)을 회수하고 돌려보내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니 제서(制書)를 내려,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신해.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갔다.

6월 경신. 안장공[鞍工] 송유(宋由)는 삼한공신(三韓功臣) 태부(太傅) 소격달(蘇格達)의 현손(玄孫)이므로, 특별히 그 역을 면제시켜 벼슬길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

갑자. 시냇가에서 비를 빌었다.

가을 7월 갑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갔다.

8월 신유.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고사(高舍) 등 15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병자.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사어하(沙於賀) 등 20인이 와서 양마(良馬)를 바쳤다.

정축. 송(宋) 상인 곽만(郭滿) 등 33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9월 을유. 송(宋) 상인 원적(元積) 등 3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경인. 왕이 중양절(重陽節, 9월 9일)이므로 상춘정(常春亭)에 거둥하여 태자 및 계림후(鷄林侯)‧평양후(平壤侯), 재상(宰相) 이유충(異惟忠)·왕무숭(王懋崇) 등에게 잔치를 베풀고, 각각 말 1필씩 하사하였다.

정유. 송(宋) 상인 왕화(王華) 등 3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을묘. 송(宋) 상인 허만(許滿) 등 61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1월 을미.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신축.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만두불(漫頭弗) 등이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니, 관직과 상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임인.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인주(紉主) 등 10인과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다로곤(多盧昆)‧상곤(霜鯀) 등 58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병오. 수사도(守司徒) 유고만(庾高滿)이 죽었다.

12월 신해. 초하루 요(遼)에서 익주자사(益州刺史) 고원길(高元吉)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병자. 유홍(柳洪)을 급사중 좌승선(給事中 左承宣)으로, 은정(殷鼎)을 비서소감 우부승선(秘書少監 右副承宣)으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