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문종(文宗) 3년
문종1(文宗一) 3년
〈기축〉 3년(1049) 봄 정월 을사. 동여진(東女眞) 아골(阿骨) 등 32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쳤다.
거란(契丹)에서 소유덕(蕭惟德)과 왕수도(王守道)를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경(卿)은 왕위를 이어 받아 조상의 유업을 발전시키고, 우리 황실에 글을 자주 올리고 포백 공납(織篚)에 충실하였다. 곡대(曲臺)의 규정에 따라 마땅히 책봉하고, 아울러 물품도 주어 나의 두터운 생각을 보이겠다. 이제 정사(正使)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 소유덕(蕭惟德)과 부사(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 왕수도(王守道)를 보내 예절을 갖추어 책봉하고, 아울러 거복(車服)․관검(冠劍)․인수(印綬) 및 의대(衣帶)․필단(匹段)․안마(鞍馬) 등 여러 물품을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거든 받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내가 궁궐에서 황제를 계승함은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이다. 청번(靑藩)에 건사(建社)하는 데에는 큰 나라는 왕으로 하고 작은 나라는 후(侯)로 봉하는데, 비록 군웅(群雄)에는 무위(武威)로써 엄하게 하였으나 또한 멀리 있는 번진[遠裔]에게는 회유하여 대의(大義)를 온전하게 하고 길이 홍도(鴻圖)를 보전한다. 경은 왕위를 계승하여 영화를 누리고, 글을 보내어 자신의 일을 잘 아뢰며 천하를 잘 다스려 왔다. 동방에 위치하여 천자의 조정[天庭]을 존숭(尊崇)하여 백마형생(白馬刑牲)의 맹약(盟約)을 잘 받들었으니, 이에 정주(旌疇)의 명을 들어 책배(冊拜)의 의식을 거행한다.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匡時致理竭節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兼 上柱國 高麗國王 食邑七千戶 食實封一千戶) 왕휘(王徽)는, 옥조(玉藻)는 따스함을 머금고 금구(金球)는 전아(典雅)함을 풍겨서, 도량은 발해(渤海)를 삼킬 듯하고 풍채는 곤륜산(崑崙山)보다 준수하다. 승자(蠅字)의 서(書)를 읽어 경륜(經綸)의 방략을 깊게 탐구했고, 학령(鶴鈴)의 비술(秘術)을 쌓아서 전쟁의 기략(機略)을 깊이 알았다. 삼한의 땅[三陲]을 분봉해 주어 오패(五覇)를 흥성하게 하였으며, 이어 조서를 반포하여 동방[兎城]의 장(長)이 되게 하였다. 〈나의 뜻이〉 사방에 선포되니 광합(匡合)의 명성이 신사(信史)에 빛나며, 한번 변하여 도(道)에 이르니 부순(拊循)의 화(化)가 희민(熙民)에 흡족하다. 더구나 정공(靖恭)하여서 교만한 태도가 없고, 충효를 다하여 공수(貢輸)의 절(節)이 있다. 풍성하게 비거(篚筥)를 베풀었고, 조공(朝貢)을 계속하여 보내었다. 마땅히 곡대(曲臺)의 규정에 따라 성부(盛府)에 훈업(勳業)을 그릴 것이다. 반열(班列)을 최고의 자리에 올리고 품질(品秩)은 가장 높게 올리며,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식읍[井賦]을 늘린다. 인하여 공(功)을 표창하는 명호(名號)를 주고, 아울러 무상(懋賞)의 은전을 베풀 것이다.
천우위상장군 소유덕(蕭惟德)과 부사 어사대부 왕수도(王守道)를 보내어, 예절을 갖추어 책명(冊命)을 내려 그대를 수태부 겸 중서령(守太傅 兼 中書令)으로 삼고 특별히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며 식읍(食邑) 3,000호에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더한다. 이어서 자충봉상(資忠奉上) 네 글자의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하며 계훈(階勳)은 원래대로 한다.
아아! 주(周)는 동궁(彤弓)을 하사하니 더욱 전정(專征)의 병(柄)을 두터이 했고, 한(漢)이 현월(玄鉞)을 주어 더욱 번국(藩國)의 권한을 크게 하였으니 고금(古今)에 걸쳐 두터운 은총이 이와 같다. 힘써 나라를 진정(鎭定)하는 부탁에 부응하고 봉국(封國)의 정성을 잊지 말라. 공경히 나의 말을 받들어 복록(福祿)을 편안히 누리라.”
라고 하였다.
병오. 왕이 남교(南郊)에서 책명(策命)을 받았다.
2월 을해. 최충(崔冲)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李子淵)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王寵之)를 수사공 상주국(守司空 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채충현(蔡忠顯)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최연하(崔延嘏)와 양감(楊鑑)을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로 임명하였다.
갑신. 왕의 동생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를 수태사 겸 내사령(守太師 兼 內史令)으로 책봉(冊封)하였다.
3월 계사. 초하루 동북로감창사(東北路監倉使)가 아뢰기를, “교주방어판관(交州防禦判官) 이유백(李惟伯)은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기계(器械)를 수리하여 대비함이 여러 고을에서 으뜸입니다. 또한 그가 관할하는 연성(連城)·장양(長楊)의 관리와 향리 및 백성이 말하기를, ‘이유백이 취임한 이래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구휼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비록 기한이 차서 교체할 때라 하더라도 유임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가상히 여겨 이 청원을 상서이부(尙書吏部)에 회부하였다.
경자. 80세 이상의 국로(國老)인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顒), 태자첨사(太子詹事) 이택성(李澤成) 등을 위해 합문(閤門)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이 직접 자리에 나아가 술을 내리고 최보성․조옹 등에게 각각 공복(公服) 1벌, 복두(幞頭) 2매, 뇌원차(腦原茶) 30각(角)을 하사하였으며, 이택성에게는 공복 1벌을 하사하였다.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正衙門)으로 나가도록 허락했으나, 3명의 국가원로는 굳이 사양하였다. 다음 날 남녀 서로(庶老) 및 의부(義夫)․절부(節婦)․효자(孝子)․순손(順孫)․환과(鰥寡)․고독(孤獨)·폐질자(廢疾者)를 위해 구정(毬庭)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계묘. 위정(韋靖)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위숭(魏崇)을 섭호부상서(攝戶部尙書)로, 오연(吳演)을 섭공부상서(攝工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을사. 거란(契丹)에 포로로 갔던 봉주(鳳州)의 희달(喜達) 등 30인이 되돌아왔다.
갑인. 동여진(東女眞) 마리해(麻離害) 등 20인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무오. 이인정(李仁靜)을 상서좌복야 주국(尙書左僕射 柱國)으로, 김정준(金廷俊)을 중추원사 판어사대사(中樞院使 判御史臺事)로, 정걸(鄭傑)을 비서감 지중추원사(秘書監 知中樞院事)로, 김원정(金元鼎)을 예빈경 동지중추원사(禮賓卿 同知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을축. 서여진(西女眞) 부거(符巨) 등 20인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정해. 동여진(東女眞) 봉국장군(奉國將軍) 사이라(沙伊羅) 등 79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쳤다.
무자. 평장사(平章事) 김원충(金元沖)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5월 갑자.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박인수(朴仁壽) 등을 급제시켰다.
6월 무진. 동번(東蕃) 해적(海賊)이 임도현(臨道縣)에 침략하여 17인을 사로잡아갔다.
임신.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운암현(雲嵒縣)의 절충군대정(折衝軍隊正) 유고(惟古) 등 11인이 밤에 순행(巡行)하여 천정술(泉井戌)에 이르렀는데, 번적(藩賊) 40여 인이 주둔하는 곳에 돌입하자 군졸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지만 오직 유고(惟古)가 앞장서 힘을 다하여 토벌하니 적이 마침내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공을 헤아려 관직을 주시길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무자. 제서를 내리기를,
“해마다 6월부터 입추(立秋)까지 얼음을 나누되 치사(致仕)한 보신(輔臣)에게는 3일에 1차씩 주고, 복야(僕射)․상서(尙書)․경(卿)․감(監)․대장군(大將軍) 이상에는 7일에 1차씩 주어 이것을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가을 7월 정유. 동번(東蕃) 해적(海賊)이 금양현(金壤縣)에 침략하여 20인을 사로잡아갔다.
8월 기사. 송(宋) 태주(台州) 상인 서찬(徐贊) 등 71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신사. 송(宋) 천주(泉州) 상인 왕이종(王易從) 등 62인이 와서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9월 경자. 연덕궁비(延德宮妃)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하사하여 왕증(王烝)이라 하였다.
겨울 10월 정해. 죄수를 재심하였다.
11월 임인. 탐라국(耽羅國) 진위교위(振威校尉) 부을잉(夫乙仍) 등 77인과 북여진(北女眞) 수령(首領) 부거(夫擧) 등 2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무오. 동남해선병도부서사(東南海船兵都部署司)가 아뢰기를,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관청에서 수령(首領) 명임(明任) 등을 보내어, 우리나라 사람으로 태풍으로 표류했던 김효(金孝)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金州)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명임(明任) 등에게 예물을 하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12월 기미. 초하루 거란(契丹)에서 전중소감(殿中少監) 마우(馬祐)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