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문종(文宗) 30년~31년
문종3(文宗三) 30년~31년
〈병진〉 30년(1076) 봄 정월 무진.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장향(張向) 등 19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기사. 저원빈(儲元賓)을 우습유(右拾遺)로 임명하였다.
갑술.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개로(開老) 등 10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2월 정해. 초하루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경술. 동여진(東女眞)의 가봉(可封) 등 2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3월 임신.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이욱(李昱) 등을 급제시켰다.
여름 4월 정미. 요(遼)에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소유강(蕭惟康)을 보내 황태후(皇太后)의 부음을 알려왔다. 조서를 보내 이르기를,
“하늘이 무심하여 대행(大行) 황태후께서 세상을 떠나서 인자한 모습과 영원히 이별하니, 나의 몸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애통한 마음이 깊어 슬픈 울음을 그칠 수 없다. 경(卿)은 왕으로 책봉되어 황실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부음(訃音)을 들으면 진실로 슬픔이 더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기유. 왕이 흰 난삼(襴衫)을 입고 백관을 이끌고 합문(閤門) 앞에 나가 조서(詔書)를 맞이하며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호부상서(戶部尙書) 왕석(王錫)과 형부시랑(刑部侍郞) 이자위(李子威)를 요(遼)에 보내 조문하고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다.
6월 기해. 왕이 내전(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가을 8월 정해. 공부시랑(工部侍郞) 최사량(崔思諒)을 송(宋)에 보내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경술. 유사(有司)가 보고하기를,
“거란[北朝]에서 정융진(定戎鎭, 의주) 관문 바깥에 암자(庵子)를 설치하였습니다. 요청하건대 사신을 보내 철거하도록 통고하십시오.”
라고 하자, 이를 따랐다.
9월 갑자. 이정공(李靖恭)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문황(文晃)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양후소(梁侯紹)를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기축. 박인량(朴寅亮)을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임명하였다.
무술.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 승려와 속인 25인이 영광군(靈光郡)에 도착하여 보고하기를, ‘국왕의 만수부강을 축원하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조성(雕成)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요청하건대 개경에 와서 바치게 하십시오.”
라고 하므로,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허락하였다.
11월 경오. 이 날은 동짓날이므로 제서(制書) 내린 것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한 줄기의 양(陽)이 기(氣)를 펴서 만물이 소생하게 되므로, 마땅히 베풀고 가꾸어서 본성을 이루도록 하라.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는 고기잡이와 사냥을 금지하며,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라.”
라고 하였다.
요(遼)에서 숭록경(崇祿卿) 석종회(石宗回)를 파견하여 대행황후(大行皇后)의 유품[遺留]인 의복‧채단‧은그릇을 보냈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하늘[昊穹]이 무심하여 모후[慈聖]께서 병환이 나서 몹시 아프고 위독하여 미칠 바가 없었다. 이에 유언[遺命]에 따라 물품을 보낸다.”
라고 하였다.
12월 계미. 초하루 요(遼)에서 숭록경(崇祿卿) 곽선리(郭善利)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이 해에 관제(官制)를 개편하였다.
〈정사〉 31년(1077) 봄 정월 임자.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임술. 이석(李石)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임명하였다.
2월 을미.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 풍악을 관람하였다.
임인. 왕자 국원공(國原公) 왕기(王祁)가 비(妃)를 맞이하였는데, 필단(匹段)‧포화(布貨)‧금 그릇‧안장 달린 말[鞍馬]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계묘. 특별히 중광전(重光殿)에서 3일 동안 연등회(燃燈會)를 열었다.
병오.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방진(方鎭) 등 2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3월 갑인.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새로 조성한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을 전독(轉讀)하였다.
을묘. 왕자 조선후(朝鮮侯) 왕도(王燾)와 계림후(鷄林侯) 왕희(王熙)에게 관작을 올려 공(公)으로 삼고, 왕비(王烝)는 검교사공 금8월 신묘 시냇가에서 기청제(祈晴)를 지냈다.관후(檢校司空 金官侯)로, 왕음(王愔)은 검교사공 변한후(檢校司空 卞韓侯)로 삼았다.
신미. 왕이 개성[京城] 서북 지역을 순행하여 성곽을 수축(修築)하는 상황을 시찰하였으며, 일월사(日月寺)의 서쪽 산에서 술자리를 열었다.
정축. 또 〈개경의〉 동남 지역을 순행하였고, 망해산(望海山)에서 술자리를 열었다.
여름 5월 임술. 이정(李頲)을 수태사(守太師) 겸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날에 그가 죽었다.
갑술. 왕이 현종[顯考]의 기일이므로 소복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였으며, 서울과 지방에서 한 달 동안 풍악을 중지하고 사냥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6월 정미. 모후(母后)의 기일이므로 재신(宰臣)들은 표문(表文)을 올려 위로하였고, 서울과 지방에서는 풍악을 금지하게 하였다.
가을 7월 기유. 초하루 송(宋)의 상인 임경(林慶) 등 28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나주도(羅州道) 제고사(祭告使)인 대부소경(大府少卿) 이당감(李唐鑑)이 아뢰기를,
“중국[中朝]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데에 고만도(高巒島, 충남 보령)의 역정[亭]은 수로(水路)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서 배를 정박하기가 불편합니다. 요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할의 정해현(貞海縣, 충남 서산군 해미면) 지역에 역정 하나를 새로 설치하여 영송(迎送)하는 장소로 삼으십시오.”
라고 하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를 따르게 하고, 역정의 이름을 안흥정(安興亭)이라 하였다.
9월 신해. 송(宋)의 상인 양종성(楊從盛) 등 4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1월 병진. 정유산(鄭惟産)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로, 김행경(金行瓊)을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문정(文正)을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叅知政事 兼 西京留守使)로, 최유길(崔惟吉)을 수사공 판삼사사(守司空 判三司事)로, 김제(金悌)를 좌산기상시 지중추원사(左散騎常侍 知中樞院事)로, 김양감(金良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노인(盧寅)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을축.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강수(康守) 등 5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12월 정축. 초하루 요(遼)에서 검교태부(檢校太傅) 양상길(楊祥吉)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을사. 김약진(金若珍)을 태자태보(太子太保)로, 문정(文正)을 태자소보(太子少保)로, 노단(盧旦)을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최석(崔奭)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오영패(吳英覇)를 어사잡단(御史雜端)으로, 김위현(金爲鉉)을 시어사(侍御史)로, 홍기(洪器)를 우보궐(右補闕)로, 양신린(楊信麟)을 우습유(右拾遺)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