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문종(文宗) 35년

7390882@hanmail.net 2023. 9. 8. 18:52

문종3(文宗三) 35년

 

〈신유〉 35년(1081) 봄 정월 을미. 염한(廉漢)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정유. 문정(文正)을 장연현개국백(長淵縣開國伯)으로, 최석(崔奭)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김양감(金良鑑)을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叅知政事 判尙書兵部事)로, 왕석(王錫)을 호부상서 지이부사(戶部尙書 知吏部事)로 임명하였다.

정미.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 왕저(王佇)가 아뢰기를, “서번(西蕃) 추장(酋長) 아부환(阿夫渙) 등 9인은 마음을 다하여 변방을 지켰으므로, 마땅히 관작과 상을 더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명령하여 아부환(阿夫渙) 등 3인을 유원장군(柔遠將軍)으로, 산두(山豆) 등 6인을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삼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2월 신유. 초하루 서여진(西女眞) 추장(酋長) 차단(遮亶) 등 6인이 와서 철갑옷과 병기를 바치자, 의복과 채색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무릇 동서의 추장들로 조정에 와서 알현(謁見)하고자 하는 자는, 병마사(兵馬使)가 보고하여 지시를 받은 뒤에 대궐에 이르게 할 수 있게 하고, 이것을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병인. 김제(金悌)를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유홍(柳洪)‧이의(李顗)를 모두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이일정(李日禎)을 예부낭중 어사잡단(禮部郞中 御史雜端)으로 임명하였다.

갑술. 송(宋) 상인 임경(林慶) 등 3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병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 겨울 12월에 동북로(東北路)의 추악한 오랑캐를 하루아침에 소탕하여 변방의 소요가 깨끗이 가시었는데, 이는 모두 위로는 종묘(宗廟)의 위령(威靈)에 힘입고 아래로는 여러 장수들의 뛰어난 책략에 의지한 것이다. 이제 이미 개선하여 돌아왔으므로, 마땅히 태묘(大廟)와 6능(六陵)에 고해야 하니 날을 가려서 행사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3월 갑오.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신축. 김양감(金良鑑)을 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

기미. 송(宋) 황제의 생일이므로 마세안(馬世安)이 머물고 있는 사관(舍館)에서 잔치를 베풀고, 겸하여 예폐(禮幣)를 보냈다.

여름 4월 병자. 기우제를 지냈다.

경진. 예부상서(禮部尙書) 최사제(崔思齊)와 이부시랑(吏部侍郞) 이자위(李子威)를 송(宋)에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치고, 아울러 의원(醫員)과 약재를 하사한 것을 사례하였다.

임오.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송인(宋人) 양진(楊震)이 상선(商船)을 따라 와서 스스로 과거 응시생[擧子]으로 여러 번 응시하였어도 합격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요청하건대 보고하는 바에 따라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소서.”

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5월 기축. 동여진(東女眞) 추장(酋長) 진순(陳順) 등 23인이 와서 말(馬)을 바치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무릇 번인(蕃人)으로 내조(來朝)한 자는 서울에 체류하는 것이 15일을 넘지 않도록 하고, 아울러 사관(私館)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이것을 영구한 법규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신묘. 박인량(朴寅亮)과 오영숙(吳英淑)을 좌승선(左承宣)과 우승선(右承宣)으로, 최사현(崔思玄)을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임명하였다.

무술.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고몽신(高夢臣)을 요(遼)에 보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우보궐(右補闕) 위강(魏絳)은 왕의 생일에 보낸 물품에 사례하고, 호부낭중(戶部郞中) 하충제(河忠濟)는 토산물[方物]을 올리게 하며, 합문지후(閤門祗候) 최주지(崔周砥)는 신년을 하례하였다.

가을 7월 정유.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장마가 때아니게 내려서 곡식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니, 유사(有司)는 날을 택하여 기청제(祈晴)를 지내라.”
라고 하였다.

기해.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치사(致仕)한 이징망(李徵望)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광정(匡靖)이라 하고 백관(百官)에게 명령하여 회장(會葬)하도록 하며 10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8월 기미. 서여진(西女眞)의 만두(漫豆) 등 17인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으므로,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옛 제도에는 우리나라의 변방 사람으로 일찍이 번적(蕃賊)에게 납치되었다가 고향을 생각하여 스스로 돌아온 자와, 송인(宋人)으로 재능이 있는 자 이외에 흑수여진(黑水女眞)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두 등도 또한 옛 규정에 의하여 돌려보내소서.”

라고 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 노단(盧旦)이 아뢰기를,

“만두 등은 비록 무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의(義)를 사모하여 왔으니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산남(山南)의 주현(州縣)에 거처하게 하고 편호(編戶)로 삼으소서.”

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신유.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서경(西京)의 궁궐은 오래 되어서 훼손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장인들을 모집하여 수리하도록 하라. 또 서경에서 동서로 각각 10여 리 떨어진 지역에 다시 땅을 택하여 좌우 궁궐을 지어서, 지방을 순회할 때 머무는 장소로 삼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무진. 송(宋) 상인 이원적(李元績) 등 68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기사. 우박(雨雹)이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었다.

임신.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호간(胡幹)이 와서 말을 바쳤다.

9월 정유. 동북번(東北蕃) 적의 우두머리 아해(阿亥)가 자제(子弟) 서해(徐害) 등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겨울 10월 갑자.  〈왕이〉 평주(平州) 온천에 행차하였다.

계유. 〈왕이〉 환궁하였다.

병자. 사면령을 내렸다.

11월 정해. 이정공(李靖恭)을 참지정사 수국사(叅知政事 修國史)로 임명하였다.

임인. 요(遼)에서 횡선사(橫宣使)로 이주관내관찰사(利州管內觀察使) 야율덕양(耶律德讓)을 보냈다.

정미.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이 글을 올려 연로하다고 퇴직을 요청하였으나, 조서(詔書)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계축. 초하루 요(遼)에서 숭록경(崇祿卿) 양이효(楊移孝)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계해.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양관공(梁冠公)이 아뢰기를,

“칙서(勅書)를 받들어 교감하여 올리는 내년 임술년(壬戌年, 1082) 달력은 틀렸다고 의심되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납일(臘日)만은 기미년(己未年, 1019) 이래로 대송역법(大宋曆法)에 따라 술일(戌日)을 사용하였는데, 저는 그 가부를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제가 음양서(陰陽書)를 상고하여 보니 이르기를, ‘대한(大寒) 전후 가까이 먼저 진일(辰日)로 납(臘)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도 이 날을 사용한지 오래입니다. 하물며 옛 역사책[古史]에 이르기를, ‘하(夏)는 가평(嘉平)이라 하고 은(殷)은 청사(淸祀)라 하며, 주(周)는 대사(大蜡)라 하고 한(漢)은 납(臘)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 명칭은 각기 다르나 모두 연말행사로서 납일에 짐승을 사냥하고 온갖 물건을 모아 여러 신에게 보답하는 것이므로, 어찌 중요한 날이 아니겠습니까? 그 법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마땅치 아니하니, 요청하건대 유사(有司)에 위임하여 상정(詳定)하게 하고 그 후에 시행하십시오.”

라고 하니, 제서(制書)를 내려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무진. 영주(寧州, 평안남도 안주) 영화사(靈化寺) 불전(佛殿)의 천왕소상(天王塑像)에 벼락이 쳤다.

임신. 공부상서(工部尙書) 홍덕성(洪德成)이 다시 글을 올려 늙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조서(詔書)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경진. 유홍(柳洪)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이의(李顗)를 좌산기상시 지중추원사(左散騎常侍 知中樞院事)로, 노단(盧旦)을 우복야 한림학사승지(右僕射 翰林學士承旨)로, 최사제(崔思齊)를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최사훈(崔思訓)을 중추원지주사(中樞院知奏事)로, 임개(林槩)를 위위경 지어사대사(衛尉卿 知御史臺事)로, 최사현(崔思玄)을 이부랑중 어사잡단(吏部郞中 御史雜端)으로, 이자인(李資仁)을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