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문종(文宗) 5년
문종1(文宗一) 5년
〈신묘〉 5년(1051) 봄 정월 계축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계해. 왕이 진관사(眞觀寺)에 행차하여 새로 조성된 『화엄경(華嚴經)』과 『반야경(般若經)』을 소리 내어 읽었다[轉].
2월 계사. 경시서(京市署)에서 화재가 나서 120호가 연소(延燒)되었다.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복구에 사용할〉 목재와 기와를 지급하게 하였다.
을미.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였다. 다음 날 화연(花宴)을 베풀기를 명령하고, 근시(近侍)를 불러 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경자. 백령진(白翎鎭)의 성랑(城廊) 28칸 및 민가(民家) 78호가 불에 탔다. 안찰부사 상서병부원외랑(按察副使 尙書兵部員外郞) 유숙(劉肅)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진장(鎭將) 최성도(崔成道)와 부장(副將) 최숭망(崔崇望) 등이 근신(謹愼)하지 않아 화재가 일어난 것이므로, 현직을 삭제하고 죄를 내리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3월 임술. 냇가에서 비를 빌었다.
무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수화(李守和)가 죽었다.
임신. 냇가에서 비를 빌었다.
여름 4월 신사. 초하루 기우제를 지냈다.
최석(崔錫) 등을 급제시켰다.
임오.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열었다.
을미. 제서를 내리기를,
“광인관(廣仁館)에 구류(拘留)한 동여진(東女眞) 적수(賊首) 아골(阿骨) 등 77인을 석방하여 돌려보내라.”
라고 하였다.
경자. 내사문하(內史門下)에서 아뢰기를,
“중흥사(重興寺)․대안사(大安寺)․대운사(大雲寺) 등의 사찰은 새로 창건하거나 옛 것을 보수하면서 토목 공사를 일으켰으나, 무릇 그 경영하는 것이 시급하고 절박하지 않습니다. 장부(匠夫)는 밤낮으로 피곤하고, 이들에게 음식 먹이는 것도 운반이 어려워 아내가 돌아오면 자식이 가서 도로에 서로 잇달아, 봄․여름 이래로 잠시도 쉴 사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지난해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은 식량이 떨어져 힘이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 공사를 하여야 한다면 농한기를 기다려 하시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정미. 내사문하(內史門下)에서 아뢰기를,
“제서를 내려, ‘황보연(皇甫延)을 응양군대장군 겸 섭대부경(鷹揚軍大將軍 兼 攝大府卿)으로, 진언(秦彦)을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으로, 노능훈(盧能訓)을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세 사람은 일찍이 죄를 지어 삭탈관직 당했으며, 비록 사면 받아 복관(復官)되었으나 다시 공적이 없으므로 관직을 옮겨 승진시키는 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파직(罷職)시킬 것을 청합니다.”
라고 하니, 왕이 제서를 내리기를,
“옳다. 그러나 오직 황보연만은 파직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무신. 왕이 구정(毬庭)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5월 정사. 가뭄으로 사면령을 내렸다.
신미. 기우제를 또 지냈다.
가을 7월 경술,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였다.
기미.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짓고 도망갔던 사람 양한(良漢) 등 3인을 압송해왔다.
무인. 동여진(東女眞) 원보(元甫) 고사(古舍) 등 2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8월 기묘. 초하루 중추사 예부상서(中樞使 禮部尙書) 정걸(鄭傑)이 죽었다.
신축. 왕이 친히 나이 80세 이상의 승려와 속인 남녀 1,343인과 독질(篤疾)․폐질(廢疾)이 있는 승려와 속인 남녀 653인과 효자(孝子)․순손(順孫)․절부(節婦) 14인에게 구정(毬庭)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갑진. 귀주낭장(龜州郞將) 강린(康隣)과 창주별장(昌州別將) 강언(康彦)․최립(崔立) 등이 번적(蕃賊) 6인을 체포하여 죽였다.
을사. 동여진(東女眞) 귀덕장군(歸德將軍) 두야불(豆也弗) 등 31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9월 을유. 초하루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 김화숭(金化崇)이 아뢰기를,
“여진(女眞)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59급을 쳐서 목 베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서단(徐亶)을 보내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그대는 풍부한 전술로 멀리서 장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융추(戎醜)가 못된 짓을 하며 우리 변방을 소요함을 정탐하고 기묘한 전술로 기습하여 이러한 승리를 보고하였다. 살상자나 포로가 많은 것을 보니 노고를 포상할 만하므로, 이제 합문통사사인 서단을 파견하여 그곳에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고, 그대에게는 의대(衣對)․채단(綵段)․은기(銀器)를 하사하며 장병들에게도 등급에 따라 필단(匹段)을 내린다.”
라고 하였다.
갑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종도(朴宗道)가 아뢰기를,
“어제 장병을 거느리고 관외(關外)를 순행(巡行)하다가 동번적(東蕃賊)을 만나 10여 급을 쳐서 목 베고, 전마(戰馬) 20필을 탈취하였으며 갑옷과 무기는 무수히 빼앗았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겨울 10월 정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번적(蕃賊)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병마녹사(兵馬錄事) 윤보(尹甫)․경충(敬忠)과 장주방어사(長州防禦使) 김단(金旦) 등을 보내어 추격하여 20여 급을 목 베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경인. 왕이 삼각산(三角山)에 행차하였다.
임인. 왕이 개경으로 돌아왔다.
정해. 거란(契丹)에서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야율수행(耶律守行)이 왔다.
11월 경신. 팔관회를 열었는데, 월식이 보름밤에 있다고 하여 13일로 초회(初會)를 삼았다.
12월 무인. 초하루 거란(契丹)이 은주자사(恩州刺史) 유종비(劉從備)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