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문종(文宗) 8년

7390882@hanmail.net 2023. 5. 5. 06:43

문종1(文宗一) 8년

 

〈갑오〉 8년(1054) 봄 정월 병인.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임신. 동여진(東女眞) 중윤(中尹) 영손(英孫) 등 18인이 와서 명마(名馬)를 바쳤다.

2월 계묘. 왕훈(王勳)을 왕태자로 책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위해 임금을 두어 정사를 살펴 다스리게 하고, 후사(後嗣)를 반드시 그 아들로 세우는 것은 백세(百世)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공통의 규범이지 사사로운 애정에 연유함이 아니다. 내가 외람되이 백성의 원수(元首)가 되어 영원히 경복(慶福)을 넓히고자 하였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 편안함에서 굳어지고, 자손을 위한 책략은 천지신명이 복록(福祿)과 상서(祥瑞)를 넉넉히 주는 데에서 빛나게 된다. 다만 왕권이 잘못 전해질까 걱정하며 바야흐로 신기(神器)를 맡을 어진 이를 기다렸더니, 과연 능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옥 같은 아들을 길렀다. 이미 진실로 총명하여서 이름이 높으니, 마땅히 태자로서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아아! 너 장자 왕훈은 도량이 넓어 관용하고 숙성한 용모와 자태가 뛰어났다. 어린 나이 때부터 여러 장난에 섞이지 않고, 연로하고 덕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선한 도를 즐겨 들으니 국내 사람들의 칭송이 서로 흡족하고 뜰에 가득한 촉망(囑望)이 모두 같다. 이에 왕[紫殿]의 다음 자리에 올려서 청장(靑牆)의 높은 등급[峻級]을 보인다. 길일을 가려 특별히 윤음(綸音)의 은택을 내린다. 이제 정사(正使) 겸태위 수문하시랑(兼太尉 守門下侍郞) 왕총지(王寵之)와 부사(副使) 겸사도 상서우복야(兼司徒 尙書右僕射) 박성걸(朴成傑) 등을 보내어, 예절을 갖추어 너를 책봉하여 왕태자로 삼는다. 아아! 한(漢) 무제[劉徹]가 7세에 태자가 되었으니,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요, 주창(周昌)이 하루에 세 번 문안할 때 내수(內竪)에게 물은 것과 같이 성근(誠勤)함을 기대할 만하다. 너도 영도(令圖)에 힘써 이 훌륭한 공훈을 따를 것이며, 높은 지위에 나아갈수록 더욱 조심하고 정직한 말을 오직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좋은 일을 드러나게 하고, 또한 무감(撫監)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나의 훈계를 명심하면 훌륭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병오.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대사면령을 내리고, 모든 관직자에게 1급씩 올려주었다.

계축. 종묘(宗廟)와 산릉(山陵)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건덕전(乾德殿)에서 여러 신하를 위해 잔치를 베풀며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3월 갑술. 억류된 동여진(東女眞) 아골(阿骨) 등 59인에게 베와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여름 4월 경술. 이자연(李子淵)에게 태부(太傅)를 더하였다. 제서를 내려 사면령 이전에 파직되었던 관리에게 모두 그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임자. 북여진(北女眞) 영새장군(寧塞將軍) 고차(高遮) 등 39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쳤다.

기미. 유선여(柳善餘) 등을 급제시켰다.

이 달에 급사중(給事中) 김양지(金良贄)를 거란(契丹)에 보내어 태자의 책립을 알렸다.

5월 기묘. 국내 명산(名山), 대천(大川)의 신령에게 총정(聰正)이라는 두 글자의 공호(功號)를 덧붙였다. 탐라국(耽羅國)에서 사자를 보내어 태자의 책립(冊立)을 축하하므로, 사자 13인에게 관직을 주고 뱃사공과 수행원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을유. 회경전(會慶殿)에 벼락이 쳤다.

6월 정미. 왕이 내전(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가을 7월 경오. 송(宋) 상인 조수(趙受) 등 69인이 와서 서각(犀角)과 상아(象牙)를 바쳤다.

을축. 왕자가 태어나니 이름을 하사하여 옹(顒)이라고 하였다.

이 달에 거란(契丹)이 비로소 포주성(抱州城) 동쪽 들판에 궁구문란(弓口門欄)을 설치하였다.

8월 임자. 중추원사(中樞院使) 김원정(金元鼎)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았다.

경신.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장주(長州)는 지대가 높고 험하며 성안에 우물이 없으므로, 바라건대 남문 밖 평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키되 위급할 때는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9월 기사. 임진년(壬辰年, 1052년) 치담역(淄潭驛)에서 적을 격파했던 공을 기록하고, 군사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으로 상을 주고 물품을 넉넉하게 하사하였다.

경오. 송(宋) 상인 황조(黃助) 등 28인이 왔다.

겨울 10월 을미. 동여진(東女眞) 유원장군(柔遠將軍) 이다불(尼多弗) 등 28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되었던 신금(信金), 위봉(位奉), 섬례(暹禮) 등 3인을 돌려주었다. 또 말하기를,

“번인(蕃人) 실빈(實彬), 염한(鹽漢), 비단(比丹), 마리불(麻里弗) 등 4인은 일찍이 거란(契丹)의 관작(官爵)을 받았으나, 왕께서 다른 나라 사람을 은혜와 사랑으로 대우하신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뵙기를 원하므로 같이 데리고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다불, 실빈, 염한, 비단, 마리불에게는 관직을 주되 등급을 더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갑진. 거란(契丹)에서 익주자사(益州 刺史) 야율방(耶律芳)이 횡선사(橫宣使)로 왔다.

11월 갑자. 거란(契丹)에서 익주자사(益州刺史) 야율간(耶律幹)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냈다.

12월 경인. 거란(契丹)이 복주자사(復州刺史) 야율신(耶律新)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요청하기를,

“태조(太祖) 때 공신(功臣)인 대광(大匡) 천명(千明) 등 3,200인에게 차례로 관직을 추증(追贈)하소서.”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신해. 왕이 명령하기를,

“동궁시위공자(東宮侍衛公子)와 시위급사(侍衛給使)를 뽑으라.”

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유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