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선종(宣宗) 5년
선종(宣宗) 5년
〈선종(宣宗)〉 (무진) 5년(1088) 봄 정월 기유.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무오. 요(遼)에서 횡선사(橫宣使)로 어사대부(御史大夫) 야율연수(耶律延壽)를 보냈다.
2월 갑오. 요(遼)에서 압록강(鴨江) 기슭에 각장(榷場)을 설치할 것을 의논하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안(李顔)을 장경소향사(藏經燒香使)로 의탁하여 귀주(龜州)로 가서 비밀리에 변방의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3월 기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유홍(柳洪)과 우승선(右承宣) 고경(高景)에게 명하여 전성(氈城)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예법을 복구한 것이다.
갑자. 김부필(金富弼) 등을 급제시켰다.
무진. 최사제(崔思齊)를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병신. 가뭄이 심하므로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에 나아가 다시 기우제를 지냈으며, 6사(六事)로 자책하여 말하기를,
“정사가 간략하지 못하였던가, 백성이 일할 자리를 잃었던가, 궁실이 높았던가, 부녀자의 청탁이 매우 많았던가, 뇌물이 행하여졌던가, 아첨하는 무리가 많았던가?”
라고 하였다. 어린 남자아이와 어린 여자아이 각각 8인으로 또 춤추며 비를 오라고 외치게 하였다. 정전(正殿)을 피하여 앉고 일상의 반찬 수를 줄였으며, 음악을 멀리하고 지붕 없는 곳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였다.
임인. 종묘(宗廟), 사직(社稷), 산천(山川)에 〈비가 오기를〉 빌었다.
5월 신해. 송(宋)의 명주(明州)에서 우리 나주(羅州)의 표류민 양복(楊福) 등 남녀 23인을 돌려보냈다.
기미. 요(遼)에서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검교우산기상시(檢校右散騎常侍) 고덕신(高德信)이 왔다.
계유.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덕이 밝지 못한 것을 하늘이 견책하여 보여주니, 3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덜덜 떨면서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고 있다. 전국의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잘못된 판결은 있었던가? 하찮은 죄를 지은 경범(輕犯) 죄수는 모두 용서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가을 7월 송(宋)의 명주(明州)에서 우리 탐라(我耽)의 표류민 용협(用叶) 등 10인을 돌려보냈다.
9월 요(遼)에 태복소경(太僕少卿) 김선석(金先錫)을 보내 각장(榷場) 설치계획을 중지하기를 요청하였다. 표문(表文)을 보내 말하기를,
“세 번이나 하소연하였으니 비록 번거로움을 무릅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두렵기는 하지만, 온 나라가 원하는 것이니 어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옛날에는 투궤(投匭)에 상서(上書)하여 만백성에게 알리는 데에 어렵지 않게 모두 통하였으며, 대궐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呌閽]은 북을 치게 하여 사총(四聰)이 막히는 것 없이 모두 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극히 공정하신 황제의 식견을 만나니 어찌 민정(民情)을 써서 다시 보내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국정을 맡아 섭정할 때에 봉토를 나누어 내려 주었으니, 순(舜)의 문덕(文德)에 따라 방패를 들고 춤추듯[舞干] 하였고 우(禹)의 회합에 옥(玉)을 들고 참여한 듯하였습니다. 신하의 절개를 칭찬하여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주었으니,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통화(統和) 12년 갑오년(994)에는 정위(正位) 고량(高良)이 요(遼)에 파견되어 천보황제(天輔皇帝)의 조서를 가지고 왔는데,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치(王治, 성종)에게 칙서를 보낸다.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의 주문(奏文)을 살펴보고, 경(卿)이 9월 초에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성채(城砦)를 수축하고 10월 상순에 이르면 이미 마치고자 하였음을 알았다. 경의 재능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며 지혜는 시기에 맞춰 일하는 것에 통달하였으므로, 즐겁게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바치고 멀리서 내조(來朝)하는 의례를 받들었다. 마침 농한기를 틈타 멀리에서 정부(丁夫)를 모아 드넓은 평야의 도적을 방어하는 용도로 쓰려고 먼저 요지(要地)에 있는 성루(城壘)를 먼저 짓겠다고 하니, 우리 조정의 뜻에 바르게 부합되는 것이며 지금의 정세에 알맞게 조화하는 것이다. 하물며 저 여진족(女眞族)은 일찍부터 황제의 교화에 귀부하여 우리의 위신(威信)에 복종하였으니 감히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수리를 완료하는 일을 빠르게 하여 오로지 통태(通泰)에서 영원히 기약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 아끼고 돌봐주신 것을 어찌 자나 깨나 잊겠습니까? 당시에 배신(陪臣) 서희(徐熙)가 경계(境界)를 맡아 관할하고 있었고, 동경유수 소손녕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상의하여 각자가 양쪽 국경을 담당하여 여러 성을 나누어 쌓도록 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공진(河拱辰)을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낮에는 나가서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內城)으로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귀국에 의지하여 점차 초적(草賊)을 제거하였고, 이후로는 별다른 대비가 없어도 변방의 사정이 한가로워졌습니다. 성종(聖宗)의 칙서에 먹물이 마르지도 않았고 태후의 자애로운 말씀이 어제와 같은데, 〈요에서〉 갑인년(1014)에 하천에 다리를 놓고 배를 만들어 길을 통하게 하였으며 을묘년(1015)에는 국경을 넘어 주성(州城)을 쌓아 군대를 배치하였고 을미년(1055)에는 궁구(弓口)를 세우고 정자를 만들었습니다. 병신년(1056)에는 상주문[需頭]을 윤허하여 건물을 철거하고 조서를 보내 말하기를, ‘남아있는 자질구레한 일은 항규(恒規)를 지키도록 한다.’라고 하시었습니다. 또 임인년(1062)에 매매원(買賣院)을 의선군(義宣軍) 남쪽에 세우고자 하여 신칙(申飭)한 것으로 말하니 수리하여 세운 것을 철거하였습니다. 갑인년(1074)에는 탐수암(探守庵)을 정융성(定戎城) 북쪽에 세우려고 하자, 회답하여 말하기를 세운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해마다 조공을 바쳤습니다. 여러 번 사신을 보내 글(章奏)을 올렸는데, 암수(庵守)와 성교(城橋)를 철거하지 않고 하물며 이때 이르러 새로운 시장을 경영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선조(先朝)의 유지(遺旨)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소국이 정성을 다한 것을 수긍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 천리를 거마(車馬)로 왕래하면서 피곤을 잊고 90년 동안이나 조공하였는데, 실어 바친 것에 공력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한탄하며 여러 사람들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비로소 선조의 공훈을 계승하여 삼가 외번(外蕃)을 수호하고 겨우 한 마디[寸]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격양하였는데, 얽어서 만든 것을 일으켜 장차 어떤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까? 양(梁)이 나라의 경계가 초[大楚]와 잇닿아 있었는데 관과(灌瓜)의 효력으로 화합하는 맹세를 하였고, 〈전한 경제(景帝) 때〉 땅이 좁아 장사(長沙)가 변무(抃舞) 할 때 오히려 소매 돌리기도 어려웠던 것을 알아주십시오. 여러 차례 주문(奏文)을 올렸는데 그러하다는 윤음(綸音)을 받지 못했으니, 위로는 하늘에 송구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지방의 소임을 맡은 신하[閫臣]의 어긋난 의논을 물리치고 변방에 있는 나라의 심한 근심을 생각하여서, 마음대로 전원(田原)에서 밭 갈고 샘을 파서 근심 없이 살며[耕鑿] 다시 구업(舊業)에 만족할 수 있도록 각고지장(榷酤之場)의 건물을 금지하여 새로 만들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소란을 그치게 해준다면 영원히 있는 힘을 다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정축. 요(遼)에서 태상소경(太常少卿) 정석(鄭碩)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11월 계해. 연화궁(延和宮)의 원자(元子)에게 왕욱(王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은그릇과 필단(匹段), 옷감과 곡식, 말의 안장과 고삐, 노비 등을 하사하였다. 왕이 태후를 모시고 수춘궁(壽春宮)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며 조선공(朝鮮公), 계림공(鷄林公), 상안공(常安公)의 3공과 부여후(扶餘候), 금관후(金官候)의 2후가 잔치에 참석하여 밤을 새우고 난 후에 끝났다.
임신. 요(遼)에서 김선석(金先錫)이 돌아왔는데, 회답한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여러 차례 글을 올려 각장(榷場)을 정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살펴보면 작은 일인데 어찌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 편의에 따라 의논할 것이다. 하물며 설치할 것을 결정하지도 않았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안심하도록 하려고 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깊은 의심을 풀고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라.”
라고 하였다.
12월 경자. 이안(李顔)을 형부상서 참지정사(刑部尙書 叅知政事)로, 이자인(李資仁)을 전중감 중추원부사(殿中監 中樞院副使)로 임명하였다.
이 해(1088) 요(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양 2,000마리, 수레 23량, 말 3필을 보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