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선종(宣宗) 9년
선종(宣宗) 9년
〈선종(宣宗)〉 (임신) 9년(1092) 봄 정월 갑신. 초하루 진눈깨비[雨雪]로 인하여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기축. 중추원사 형부상서(中樞院使 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한 박양단(朴揚旦)이 죽자,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정유. 김상기(金上琦)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개(林槩)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
경자. 동여진(東女眞)의 아로한(阿盧漢) 등 2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2월 기유.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삼빈(三彬)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탐라(耽羅)의 성주(星主) 의인(懿仁)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자, 정원장군(定遠將軍)으로 승진시키고 관복과 허리띠[衣帶]를 하사하였다.
임오. 〈왕이〉 직접 글을 내려(宣麻) 소태보(邵台輔)를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3월 병진. 개경 시가(市巷)의 민가 640호(戶)가 불에 탔다.
〈3월〉 이번 달에 왕이 정무에 근심하고 피로하여 병이 든 것을 느끼고, 문덕전(文德殿)으로 처소를 옮겼으며 내의(內醫)에게 양성방약(養性方藥)을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홀연히 느낌이 있어 고풍(古風)의 장편(長篇)의 시를 지으니 그 끝에 읊기를,
“약효가 있거나 없거나 무엇을 염려하겠으며, 덧없는 인생에 시작이 있으니 어찌하여 끝이 없겠는가? 오직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선행을 닦아, 청정한 지역에 뛰어올라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이네.”
라고 하였다. 왕의 나이가 한창 때인데 이 같은 것을 지으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여름 4월 을묘. 참지정사(叅知政事) 소태보(邵台輔)를 권판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權判西北面兵馬事 兼 中軍兵馬使)로, 중추원사(中樞院使) 서정(徐靖)을 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 中軍兵馬使) 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상기(金上琦)를 권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事 兼 行營兵馬使)로, 동지충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임개(林槩)를 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 兼 行營兵馬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무오. 궁인(宮人) 이씨(李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 날에 제서(制書)를 내려 금관후(金官侯) 왕비(王㶨)에게 수태위(守太尉) 겸 중서령(中書令)을 더하라고 하였다.
병인. 금관후(金官侯) 왕비(王㶨)가 죽었다.
무진. 요(遼)에서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 고양경(高良慶)이 왔다.
신사.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김성(金誠) 등을 급제시켰다.
6월 기미. 유석(柳奭)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이예(李預)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
경신.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일관(日官) 최사겸(崔士謙)이 아뢴 것에 따라 경릉(景陵)의 〈풍수상의〉 허결(虛缺)을 보수하였다고 들었다. 최근에 사천소감(司天少監) 황충현(黃忠現) 등이 올린 건의를 보니, 최사겸(崔士謙)이 보수한 것이 오히려 압양(壓禳)하여 장차 조상의 신령(先靈)으로 하여금 현침(玄寢)을 불안하게 하였다. 형부(刑部)로 하여금 최사겸(崔士謙)을 가두고 국문(鞫問)하라.”
라고 하였다.
을축. 정당문학(政堂文學) 김상기(金上琦)를 수국사(修國史)로 임명하였다.
병인.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임신. 왕태후(王太后)가 배주(白州)의 견불사(見佛寺)에서 천태종(天台宗) 예참법(禮懺法) 의식을 행하고 1만일을 기약하였다.
을해. 서정(徐靖)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을유. 참지정사(叅知政事) 최사량(崔思諒)이 죽었다.
8월 을축. 이자위(李子威)를 상서우복야 권지문하성사 겸 서경유수사(尙書右僕射 權知門下省事 兼 西京留守使)로 임명하니, 처음에 이자위(李子威)가 재상이 되어 송(宋)에 보내는 국서인 표주(表奏)를 감독 교열하면서 거기에 요(遼)의 연호를 잘못 기입하여서 송이 그 국서를 반환하였다. 이 일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으나, 몇 달 되지 않아 왕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사사롭게 청탁하여 다시 그 관직을 받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비웃었다.
무진.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기사. 최사겸(崔士謙)을 선산도(仙山島)로 유배보냈다.
9월 임오. 왕태후(王太后)가 서경(西京)에서 훙서하였다.
을유. 요(遼)에서 왕정(王鼎)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겨울 10월 병자.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왔다.
11월 경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12월 계해. 동여진(東女眞)의 여라불(餘羅弗) 등 2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임신. 지진이 났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