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숙종(肅宗) 원년

7390882@hanmail.net 2024. 3. 5. 07:35

숙종1(肅宗一) 원

 

〈숙종(肅宗)〉 (병자) 원년(1096) 봄 정월 무술. 동여진(東女眞)의 아부한(阿夫漢)과 고난곤(高闌昆), 두문(豆門) 등 17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기유. 공부상서 삼사사(工部尙書 三司使) 유석(庾晳)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상서좌승(尙書左丞) 최저(崔翥)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였다.

갑인.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선대 왕의 법을 따라 검소한 덕을 실행하고자 하므로,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고 즐기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있다. 요즈음 듣건대 서울과 지방의 풍속이 사치하는 것을 좋아하여 끝이 없으며, 먹고 마시는 것에도 그릇[杯盤]이 과다하여 풍속을 상하게 하고 있다고 하니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등급을 정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곧 어사대(御史臺)에 명령하여 규찰하도록 하였다.

정사. 황유현(黃兪顯)을 응양군상장군 호부상서(鷹揚軍上將軍 戶部尙書)로, 최적(崔迪)을 신호위상장군 형부상서(神虎衛上將軍 刑部尙書)로, 왕유열(王惟烈)을 금오위상장군 공부상서(金吾衛上將軍 工部尙書)로, 오맹(吳猛)을 전중감(殿中監)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무오. 〈왕의〉 생일을 대원절(大元節)로 정하였다.

2월 갑자. 요(遼)에 사은사(謝恩使) 겸 고주사(告奏使) 우원령(禹元齡)을 보냈다. 표문(表文)에서 이르기를,
“지난해 11월에 태주관내관찰사(泰州管內觀察使) 유직(劉直)이 도착하여 조서(詔書)와 별록(別錄)을 각 한 통씩 전하였습니다. 전왕(헌종(獻宗))의 생일이라 하여 특별히 의대(衣對), 은기(銀器), 필단(匹段), 활과 화살, 안장 얹은 말[鞍馬]등을 보내고, 전왕이 병이 있어서 신에게 대신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은총이 먼 나라에까지 미쳐 신이 받아서 전달하니 조심스럽고 두려운 것이 모두 더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께서 정도(道正)에 집중하여 온 천하를 다 함께 돌보면서도 전왕의 생일을 기억하고 사신을 보내 은혜를 내려주시었습니다. 황제의 총애하는 명령이 이미 이르렀으니 도리상 절하여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병든 몸은 더욱 쇠약하여 끝내 직접 맞이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신이 임시로 이 지역을 다스리므로 훌륭한 물품을 대신 받았으며, 받은 조서와 별록은 이미 전달하여 주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전왕이 표문에서 이르기를,
“하늘은 높아도 낮은 데서 들리는 소리도 듣는 법이니 곤궁한 사정은 반드시 하늘에 하소연해야 할 것이니, 이에 편지에 의지하여 사정을 말하려고 합니다. 신은 어려서부터 병을 앓아 점점 심해져서 병이 낫기를 기대하기 어려웠는데, 나라의 일은 어려운 임무여서 오로지 잠시도 비울 수가 없고 공헌(貢獻)은 항상 해야 하는 것이므로 빠트릴 수 없어서 감히 숙부에게 미루어 이에 국권(國權)을 부속(附屬)시키고, 세상과의 인연을 포기하고 물러나 별제(別第)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위고 약한 몸을 스스로 장빈(漳濱)에 오래 누이고 있으나, 멍한 정신은 단지 대악(岱嶽)에서 즐거이 노닐고 있습니다. 이미 병이 깊고 위태로우니 어찌 병이 나을 것을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근자에 공첩(公牒)이 갑자기 왔다는 것을 듣고는 황제의 글이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낙기복(落起復)의 특별한 예식과 책봉의 성대한 의례를 모두 면제하여준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였습니다. 또 생일을 축하하고 특별한 선물을 보내준 은혜를 반포하여 전하려 한다는 것을 미리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죽게 된 목숨을 헤아려준다면 도저히 보답할 길이 없으니, 이때에 어찌 후하게 보내주는 것을 받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간곡하게 인자함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간절하게 아뢰는 것을 굽어 살펴서, 빨리 유지(兪旨)를 보내 사신 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비루하고 병든 사람에게 영원히 중요한 임무를 내린 것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을축. 전왕 헌종(獻宗)이 흥성궁(興盛宮)으로 나가 살 것을 청하자,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흥성궁은〉 선종(宣宗)의 잠저(潛邸)였다.

을해.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경진. 서여진(西女眞)의 아라화(阿羅火) 등 48인이 내조(來朝)하였다.

3월 신축. 서여진(西女眞)의 하부환(下夫奐)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기유. 요(遼) 동경(東京)에 지례사(持禮使) 고민익(高民翼)을 보냈다.

무오.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김보신(金輔臣) 등을 급제시켰다.

여름 4월 임술. 초하루 서리가 내렸다.

계해. 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계유.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정무를 보았으며 해가 기울 때까지 하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지금은 만물을 기르는 시기인데, 3월 이래로 절기가 어긋나서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으며 밤에는 우박이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에서 말하기를, ‘우박은 음(陰)이 양(陽)을 협박하는 상(象)이다.’라고 하였고, 경방(京房)의 『역전(易傳)』에서 말하기를, ‘벌을 내리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면 그 재앙으로 서리가 내린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위에서 한 쪽의 말만 듣고 믿으며 아래로는 사정이 막혀 있어, 이해(利害)를 꾀하는 계략을 세우지 못하고 엄하고 급하게만 하는 실책이 있으면 그 벌로 항상 춥다.’라고도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대를 일으켜 함부로 죽이는 것을 망법(亡法)이라고 하는데, 그 재앙으로 서리가 내려 여름에도 오곡(五穀)이 죽는다.’라고도 하였습니다. 요즈음 어린 군주께서 병으로 누워 계셔 듣고 처리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았고, 모후가 섭정(攝政)하였으나 미혹에 빠진 것이 정도를 넘어 흉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반란을 모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주륙(誅戮)을 크게 벌여 그 무리들을 남기지 않았으나, 본래의 사정이 아닌 일도 있어 죄인 가운데는 반드시 죄가 없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기(怨氣)가 천지에 가득하여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천명에 응하시어 대통을 이어 만기(萬機)를 모두 바로잡으셨습니다. 어사대(御史臺)와 상서형부(尙書刑部)에 명령하시어 무릇 감옥에 있으나 시비(是非)가 결정되지 않아 의심나는 자들을 빨리 결정하도록 재촉하여 원통하거나 과한 형벌이 없도록 하며, 사실이 아닌 것으로 고발한 것은 모두 무고하게 고발한 자에게 벌을 내리도록[反坐] 하여 하늘의 경계에 답하신다면, 인정(人情)이 모두 즐거워하고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기묘. 〈왕이〉 현릉(顯陵)을 참배하였다.

을유. 〈왕이〉 경릉(景陵)을 참배하였다.

5월 병신. 회경전(會慶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기해.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계묘. 또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갑진.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나아가 정무를 보았으며, 해가 기울 때까지 하였다.

정미.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輕繫]를 석방하였다.

무신. 건덕전(乾德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열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무오. 요(遼)에서 동경지례사(遼東京持禮使)로 예빈부사(禮賓副使) 고양정(高良定)이 왔다.

6월 신유. 경종(景宗)의 신주(神主)를 영릉(榮陵)으로 옮기고, 선종(宣宗)을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다. 또 경성황후(景成王后) 김씨의 신주를 질릉(質陵)으로 맞이하여 덕종실(德宗室)에 부제(祔祭)하였다.

갑술. 진명도부서사 문주방어판관(鎭溟都部署使 文州防禦判官) 이순혜(李順蹊) 등이 해적과 싸워 그들을 패배시키고 17명의 목을 베었다.

정축. 동여진(東女眞)의 영손(榮孫) 등 17인이 내조(來朝)하였다.

계미. 왕이 연덕궁주(延德宮主) 유씨(柳氏) 및 원자(元子)와 함께 동지(東池)에서 배를 띄우고 주연을 베풀었는데, 시중(侍中) 소태보(邵台輔), 복야(僕射) 황중보(黃仲寶),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황영(黃瑩),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적(崔迪), 지주사 전중감(知奏事 殿中監) 최홍사(崔弘嗣),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오(李䫨), 우승선 급사중(右承宣 給事中) 유신(柳伸)을 불러 잔치에 참석하게 하였다.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았으며, 밤이 되어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자 파하였다.

가을 7월 경인. 초하루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역대(歷代)로 비장해온 문서를 열람하였다. 그 부질(部秩)이 완전한 것을 선택하여 문덕전, 장령전(長齡殿), 어서방(御書房), 비서각(秘書閣)에 나누어 두고, 나머지는 양부(兩府) 재신(宰臣)과 고원(誥院)의 사한(史翰), 내시(內侍)의 문신들에게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정미. 문종의 기신도량(忌辰道場)이므로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가서 분향(行香)하였다.

회경전(會慶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7일간 열었다.

8월 경신. 초하루 동합(東閤)에서는 국가의 원로들에게, 좌우 동락정(左右同樂亭)에서는 나이든 서민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음식을 권하였으며, 이어서 의복과 폐백, 사면(絲緜)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병자. 동여진(東女眞)의 와돌(臥突), 을고(乙古), 마요(馬要) 등이 와서 중광전(重光殿)에서 왕을 뵙게 하였고, 그들 종족의 일을 묻고는 술과 음식, 비단과 명주를 하사하였다.

임오. 지추밀원사 호부상서(知樞密院事 戶部尙書) 황종각(黃宗慤)이 죽자, 조문하고 위로하는 교서(敎書)와 뇌서(誄書)를 하사하고 시호(諡號)를 개숙(凱肅)이라 내렸다.

9월 기축. 초하루 우복야 참지정사(右僕射 參知政事) 박인량(朴寅亮)이 죽었다.

경인. 왕이 인예태후(仁睿太后)의 기신도량(忌辰道場)이므로 국청사(國淸寺)에 가서 분향(行香)하였으며, 겸하여 진전(眞殿)에서 제사하였는데 이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경자. 탁라(乇羅) 성주(星主)가 사람을 보내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정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송(宋) 승려 혜진(惠珍)을 접견하고 한림원(翰林院)에서 음식을 하사하였다.

무신. 송(宋) 승려 성총(省聰)과 혜진(惠珍)을 각각 명오삼중대사(明悟三重大師)로 임명하였다.

계축. 회경전(會慶殿)에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3일간 강설하고, 왕이 친히 1만 명을 반승(飯儈)하였다.

겨울 10월 정축. 건덕전(乾德殿)에서 3일간 도량(道場)을 열었으며, 인예태후(仁睿太后)가 발원하여 완성한 화엄경(華嚴經)을 전독(轉讀)하였다.

무인. 송(宋) 상인 홍보(洪輔) 등 13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을유. 요(遼)에 오연총(吳延寵)을 보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월 신축.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정미. 요(遼)에 소충(蘇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무신. 〈요(遼)에〉 백가신(白可臣)을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12월 정사. 요(遼)에서 이유신(李惟信)을 보내 전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