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숙종(肅宗) 즉위년

7390882@hanmail.net 2024. 2. 29. 07:42

세가(世家) 권제11(卷第十一) 고려사11(高麗史十一)

 

숙종1(肅宗一) 즉위년

 

숙종 명효대왕(肅宗 明孝大王)의 이름은 옹(顒)이고 자(字)는 천상(天常)이며, 옛 이름은 희(熙)였다. 문종(文宗)의 셋째 아들로 순종(順宗)과 어머니가 같은 아우였고, 문종 8년(1054) 갑오 7월 기축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였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5경(經)과 자서(子書) 및 사서(史書) 중에 읽지 않은 것이 없어서, 문종이 그를 사랑하여 일찍부터 말하기를, “나중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구나!”라고 하였다. 〈문종〉 19년(1065) 2월 계림후(雞林候)로 책봉되었고, 〈문종〉 31년(1077) 3월 계림공(雞林公)으로 승진되었다. 선종(宣宗) 3년(1086) 2월 수태보(守太保)를 더하였다. 〈선종〉 9년(1092)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며 서경(西京)으로 갈 때 자주색 구름이 막사 위를 두르니 천기(天氣)를 보는 자가 왕이 될 상서(祥瑞)라고 하였다. 헌종(獻宗)이 즉위하자 수태사(守太師) 겸 상서령(尙書令)이 되었고, 다음해(1095) 8월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10월 기사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왕위를 선양(禪讓)하였으나, 왕이 두세 번 사양하였다. 경오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이날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와 아들 한산후(漢山候) 형제 두 사람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유배보냈다.

신미. 요(遼)에 좌사낭중(左司郞中) 윤관(尹瓘)과 형부시랑(刑部侍郞) 임의(任懿)를 보냈다. 전왕(前王) 헌종(獻宗)의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군왕의 도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알려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여 감히 글을 갖추어 당신[負扆]에게 보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나이가 어리고 성격도 어리석은데 아버지의 유언을 어길 수 없어 외람되이 가업을 계승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번국의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여 영원히 충성과 근면을 다하려 하였으나, 어린 나이부터 있던 소갈(痟渴)이 해가 갈수록 점차 심하여졌습니다. 의원에게는 신묘한 의술이 부족하여 자세하게 진단하여 알지 못하였고, 약은 좋은 약재가 부족하여 오직 나아지는 것이 적기만 하였습니다. 늘 계속하여 낫지 않은 것이 더하여져 속은 타들어가고 몸은 바짝 말랐으며 두 다리는 약하여졌고 두 눈은 흐릿해졌습니다. 걷는 것은 생각조차 어려우니 어찌 『대경(戴經)』에서 말한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는다고 할 수 있으며, 보는 것은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사면(師冕)이 말한 것처럼 자리에 앉고 계단을 오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침상에 쓰러져 누워있기만 할 뿐, 군국(軍國)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를 헤아려 생각해보니 지금 위태로운 것이 더욱 심하여졌고, 맡은 것이 가볍지 않으니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에 이 달 10월 8일 아버지의 아우인 왕희(王熙)에게 임시로 본국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으니, 배행하는 신하를 급하게 보내 황제께 알립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표문에서 말하기를,
“생각해보니 옛말에 학(鶴)이 구천(九泉)에서 우는 것[皐鳴]이 간절하면 하늘에도 통할 것이라 하였으니 감히 신하로서의 정성을 다하여 외람되이 천자께서 살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번국 제후의 막내아들이자 귀국의 이웃하고 있는 사람으로, 정도(正道)의 시대를 만나 편안히 무궁한 교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 국왕이었던 왕욱(王昱)은 어려서부터 가벼운 병이 있었는데 근래에 병이 더욱 심하여져서, 비록 많은 처방으로 계속하여 약을 먹고 있으나 아직 병이 낫는 데에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번 달 10월 8일에 신에게 임시로 번국의 업무를 맡겼습니다. 신은 이 부탁을 받고 귀국에 즉시 알리려 하였으나, 거리가 멀어서 즉시 간곡한 정성을 펼치지 못한 것이 유감일 뿐입니다. 변변치 못한 몸으로 임시로나마 종묘(宗廟)를 지키려 하니, 두렵고 조심스러워 아무런 경황이 없으며 두려운 마음만 쌓여 더욱 심하여집니다. 급히 글을 보내 황제께 알립니다.”
라고 하였다.

무인. 소태보(邵台輔)를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 門下侍中)에, 김상기(金上琦)를 수사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徒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유석(柳奭)을 수사공(守司空)에, 임개(林槩)를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刑部事)에, 왕국모(王國髦)를 수사도(守司徒)에, 손관(孫冠)을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호부사(尙書右僕射 叅知政事 判戶部事)에, 최사추(崔思諏)를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守司空 樞密院使 翰林學士 承旨)에, 김선석(金先錫)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각각 임명하였다.

경진. 제서(制書)를 내려 조선국공(朝鮮國公) 왕도(王燾)에게 식읍(食邑) 5,000호(戶)와 식실봉(食實封) 500호를, 부여공(扶餘公) 왕수(王㸂)에게 수태부(守太傅)를 더하였으며, 진한후(辰韓侯) 왕유(王愉)를 상서령(尙書令)으로, 낙랑백(樂浪伯) 왕영(王瑛)을 낙랑후(樂浪侯)로, 황중보(黃仲寶)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윤신걸(尹莘傑)을 용호군상장군 병부상서(龍虎軍上將軍 兵部尙書)로, 황유현(黃兪顯)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최적(崔迪)을 금오위상장군 섭형부상서(金吾衛上將軍 攝刑部尙書)로 각각 임명하였다. 그 밖에 등급을 뛰어넘어 벼슬을 옮긴 사람이 수백 명이며 공인·상인·천인[工商皂隷]까지도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관직을 받았으나, 유사(有司)에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병술. 참지정사(參知政事) 왕국모(王國髦)가 죽었다.

11월 계묘.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참형(斬刑)과 교형(絞刑) 이하의 죄를 사면하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모두 덕호(德號)를 더하였다. 백성 가운데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과 독질자(篤疾者)와 폐질자(癈疾者),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孝子), 순손(順孫), 환과(鰥寡), 고독자(孤獨者)에게 잔치를 베풀고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각 색(色)의 군인에게도 쌀과 포(布)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병오. 팔관회를 열고 〈왕이〉 신봉루(神鳳門)에 나아가 중앙과 지방의 전국에서 하례를 받았으며, 그 길로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계축. 요(遼)에 최유거(崔惟擧)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갑인. 〈요(遼)에〉 최용규(崔用圭)을 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동팽재(董彭載)는 천안절(天安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기미. 요(遼)에서 유직(劉直)을 보내 전 왕 헌종(獻宗)의 생일을 축하하려 하자,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대신하여 맞이하였다. 〈요에서 보낸〉 칙서(勅書)에서 말하기를,
“경(卿)은 일역(日域)의 책봉을 계승하여 본국에게 제후의 임무를 다하였다. 부월(斧鉞)을 받은 초기에 적절하게 생일[玄弧之旦]을 맞이하였으므로 하례사를 보내 나의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태주관내관찰사(泰州管內觀察使) 유직(劉直)을 보내 경에게 의대(衣對), 필단(匹叚), 안장 얹은 말[鞍馬], 활과 화살 등의 물품을 보내며, 별도의 기록과 같이 갖추었으니 이르는 대로 받으라.”
라고 하였다.

12월 기사. 〈요(遼)의 사신〉 유직(劉直)이 돌아가는 길에 표문(表文)을 부쳐 보냈다. 전왕 헌종(獻宗)의 표문에서 말하기를,
“두터운 마음을 내어 돌보아주니 은혜가 병든 몸에 흐르고, 분에 넘치는 은총을 받아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신이 본래 병약한 몸으로 외람되이 무거운 임무를 맡았고, 그 때문에 복이 아닌 것이 빨리 와서 병이 더욱 심하여져 보고 듣는 것이 어렵고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숙부를 추천하여 임시로 국정을 맡겼으며 가신(家臣)을 보내 귀국에 고하니, 이번에 외람되게도 자애(慈愛)를 받아 특별히 사신을 보내 조서에 위안과 가르침이 간곡하고 보배로운 물품을 더욱 후하게 보내줄 것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허약하여 일어나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대신 받게 하였으니 더욱 미안합니다. 백 번째 생애에 이르더라도 큰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의 표문에서 말하기를,
“국왕 신 왕욱(王昱)은 오랫동안 깊은 병이 들어서 보거나 일어설 수 없어서 갑자기 내려주신 은혜를 입게 되었으나 몸소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임시로 본국의 일을 맡고 있으니 크게 보내준 것을 대신 받아서 받은 조서와 별록(別錄)과 여러 물품을 아울러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병술. 최사추(崔思諏)를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김선석(金先錫)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황종각(黃宗慤)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황영(黃瑩)을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禮部尙書 同知樞密院事)로 각각 임명하였고, 이날 황주목부사(黃州牧副使) 이위(李瑋)를 상서우사원외랑(尙書右司員外郞)으로 임명하였는데 왕은 이위 (李瑋)가 청렴하고 근면하여 백성을 잘 돌보았으므로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불러들여서 이 직책을 주었다.

경인. 요(遼)에서 임의(任懿)가 돌아왔는데, 회신하는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돌이켜보면 귀국은 우리나라를 공경하여 대대로 충성하기를 다하였으며, 때에 맞추어 공물(貢品)을 보냈왔다. 지난번에 왕욱(王昱)이 이미 장표(章表)를 보내 잇달아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고, 경(卿)이 다시 글을 보내 임시로 국가의 업무를 맡는다고 하였다. 근면하고 순응하는 것을 충분히 생각하여 우선 그렇게 할 것을 윤허한다.”
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