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숙종(肅宗) 2년
숙종1(肅宗一) 2년
〈숙종(肅宗)〉 (정축) 2년(1097) 봄 정월 임인 요(遼)에서 횡선사(橫宣使)로 해주방어사(海州防禦使) 야율괄(耶律括)을 파견하여 전 왕에게 칙서를 보내 말하기를,
“경(卿)은 일찍이 번국으로 봉해진 지역을 다스렸으며 공손하게 공물을 바쳤다. 마침 병이 들어서 조섭하고 보양하기를 청하여서, 이에 유사(有司)가 전법(典法)을 상고하여 세상에 없는 은혜와 위로를 보내서 늘 생각하는 도타운 정을 보였으니 마땅히 〈내가〉 생각하는 마음을 체득하라. 지금 경에게 의대(衣對), 필단(匹叚), 안장 얹은 말[鞍馬], 활과 화살 등의 물건을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이르는 대로 받으라.”
라고 하였다.
2월 기사.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임신. 동여진(東女眞)의 와돌(臥突)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었다.
무인. 〈왕이〉 친히 경찬도량(慶讚道場)을 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이정공(李靖恭)과 양부(兩府) 재신(宰臣)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상을 하사하였다. 직접 지은 경찬시(慶讚詩)를 모두에게 보이고, 유신(儒臣)들은 창화(唱和)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윤2월 갑진. 전왕 헌종(獻宗)이 훙서하였다.
기사. 동여진(東女眞)의 와영(臥英) 등 7인이 내조(來朝)하였다.
3월 경신. 전왕을 은릉(隱陵)에 장사지냈다. 요(遼)의 동경병마도부서(東京兵馬都部署)에 첩(牒)을 보내 이르기를,
“전 왕은 스스로 물러나 별저(別邸)에 가서 머물다가,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어 윤2월 19일에 훙서하여 지금 이미 장사를 마쳤습니다. 전 왕이 유언으로 말하기를, ‘이전에 기무(機務)에서 풀어주시기를 청하여 다행히 허락을 얻은 은혜를 입어 물러나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였다. 최근에 병이 악화되어 결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장례[飾終]의 여러 가지 일은 마땅히 검약하게 하라. 상주하여 대조(大朝)를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방자하게도 전 왕의 유언을 존중하여 감히 사신을 보내 부고를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계해. 최사추(崔思諏)를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 겸 서경유수사(中書侍郞平章事 判刑部事西 兼 京留守使)로, 김선석(金先錫)을 좌복야 판호부사(左僕射 判戶部事)로, 황영(黃瑩)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간(林幹)을 지추밀원사 판삼사사(知樞密院事 判三司事)로, 위계정(魏繼廷)을 예부상서 한림학사 승지(禮部尙書 翰林學土 承旨)로, 이오(李䫨)를 예빈경 추밀원부사(禮賓卿 樞密院副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여름 4월 병술. 〈왕이〉 상춘정(賞春亭)에 나아가 직접 지은 「금정 상화시(禁亭賞花詩)」를 보이고 관각(館閣)의 근시(近侍) 문인들에게 창화(唱和)하여 바치도록 하였으며, 직접 높고 낮음의 등급을 매겨 차등 있게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갑진.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보이고, 임원통(林元通) 등을 급제시켰다.
5월 정묘. 회경전(會慶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6월 갑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자.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정공(李靖恭)이 왕명을 받들어 흥왕사(興王寺)의 비문을 지어 올리자, 왕이 칭찬하는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필단(匹段), 은그릇, 차(茶), 포(布), 안장 얹은 말[鞍馬] 등의 선물을 하사하였다.
송(宋)의 상인 진환(愼奐) 등 36인이 왔다.
갑오 송(宋)에서 우리 표류민 자신(子信)등 3인을 돌려보냈다. 처음에 탐라민(耽羅民) 20인이 배에 탔는데 표류하여 나국(躶國)에 들어갔다가 모두 살해당하고, 다만 이 3인만 탈출할 수 있어서 송에 갔다가 이때가 되서야 돌아온 것이다.
가을 7월 신미.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임신. 동여진(東女眞)의 적선(賊船) 10척이 진명현(鎭溟縣)을 침략하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이 판관(判官) 강증(康拯)을 보내 그들과 싸워 이겨서 배 3척을 노획하고 48명의 머리를 베었다.
8월 정해. 김선석(金先錫)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간(林幹)을 추밀원사 상서좌복야(樞密院事 尙書左僕射)로 임명하였다.
경인. 동여진(東女眞)의 미응(未應) 등 24인이 내조(來朝)하였다.
무술. 〈왕이〉 홍호사(弘護寺)에 행차하였다.
정미. 혜성이 저성(氐星)과 방성(房星) 두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그 빛이 천시원(天市垣)까지 비췄다.
9월 갑인. 왕이 국청사(國淸寺)에 갔다.
을묘. 동여진(東女眞)의 사호라(沙好羅) 등 23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을해. 회경전(會慶殿)에서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열어 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하고, 1만 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겨울 10월 신사. 초하루 동여진(東女眞)의 영파(令波) 등 25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임인. 동여진(東女眞)의 아부(阿夫) 등 25인이 내조(來朝)하였다.
갑진. 요(遼)에 안인감(安仁鑑)을 보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정미. 〈요(遼)에〉 유택(柳澤)을 보내 횡선사(橫宣使)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11월 기미. 요(遼)에 유유우(庾惟祐)를 보내 전 왕의 생일을 축하한 것에 사례하였다.
무진. 〈요(遼)에〉 필공찬(畢公贊)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임유문(林有文)을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갑자.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12월 계사. 요(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와 이상(李湘)을 파견하여 옥책(玉冊), 규(圭), 인(印), 관면(冠冕), 차로(車輅), 장복(章服), 안마(鞍馬), 필단(匹叚) 등의 물건을 보냈다. 책문(冊文)에서 말하기를,
“짐이 하늘에서 돌보아주심과 조종(祖宗)께서 남기신 규범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 43년이 되었다. 밖으로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안으로는 제후를 어루만져 모두 바른 길로 가게 하였다.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鴨綠)에 닿았으며, 공경히 정삭(正朔)을 받고 공물도 받들어 보내왔다. 이에 선왕이 별세하자, 적통의 계승자[嫡嗣]가 애통해 하면서 이미 즉시 부친상[苫塊]을 치르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여러 차례 장주(章奏)을 보내 간절히 청하기를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숙부에게 국정을 대신 맡기게 해달라고 하였다. 마침내 간절한 부탁에 따라 마침 권한과 지위를 위임하였는데, 큰 나라를 섬기는 것에 충절을 다하고 우리나라에 공손히 하며 정성을 나타냈다. 하물며 한 나라에서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이제 제후의 명성[千乘之名]이 높아졌으므로 반드시 바르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에 전례(典禮)를 따라 특별히 책명(冊命)을 시행한다.
아, 그대 권지고려국왕(權知高麗國王) 왕희(王熙)는 천지의 간기(閒氣)를 닮았고 오행(五行)의 순열(淳烈)을 머금었다. 구류(九流)의 문예와 학술에 묵묵히 통달하고 칠웅(七雄)의 형세와 운수에 뛰어나게 판단하였다. 나라의 통치를 맡고부터는 시무(時務)를 오로지 하니, 근본이 바로 서고 종실이 안정되어 유악(帷幄)이 깊어지고 왕업[伯圖]은 바로잡혔다. 비록 형제가 지초(芝草)나 난초(蘭草)처럼 변한의 밭[卞圃]에서 무성히 자라더라도, 자손이 준마[騏驥]와 같아 진한의 벌판[辰野]에서 다투어 달릴지라도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에 점괘(占卦)를 따라 헌물(憲物)을 청구하여 철권(鐵卷)과 단서(丹書)로 맹약을 굳게 맺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로 수레와 의복에 영배(榮配)할 것이다.
이제 사신(使臣) 임해군절도사 검교태부 겸 어사중승(臨海軍節度使 檢校太傅 兼 御史中丞) 야율사제와 부사(副使) 대복경 소문관직학사(大僕卿 昭文館直學士) 이상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특진검교태위 겸 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特進檢校太尉 兼 中書令 上柱國 高麗國王) 식읍(食邑) 1,000호, 식실봉(食實封) 700호로 책봉한다.
아, 우리 태조로부터 하찮은 나에게 이르기까지 공덕을 쌓아 제후를 책봉하고 봉토를 내렸다. 울타리가 되고 담장이 되는 것[于蕃于宣]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법도가 있으며, 조회(朝會)하는 것에도 정해진 제도가 있다. 영원히 동쪽의 하(夏)[東夏]로 모범이 되어 요와 더불어 무궁하리니 오로지 공경하라.”
라고 하였다. 왕이 남교(南郊)에서 책명을 받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