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예종(睿宗) 13년
예종3(睿宗三) 13년
〈무술〉 13년(1118) 봄 정월 갑신.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경자. 함녕절(咸寧節)을 맞아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하례를 받은 후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계묘.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였다.
기유. 대복경(大僕卿) 이소영(李韶永)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 지녹연(智祿延)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신해.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홍관(洪瓘)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순전편(舜典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왕은 참석한 여러 학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시 한 수를 짓고는 즉시 화답시를 올리게 하였다.
2월 임술.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김부일(金富佾)에게 명하여 『시경(詩經)』의 「노송편(魯頌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갑자. 〈왕이〉 대궐 마당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인. 여진인(女眞人) 41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신미.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주역(周易)』의 「태괘(泰卦)」를 강론하게 하였다.
병자.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3월 정유.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유재(劉載)가 사망하였다.
신축. 죄수를 재심하였다.
갑진. 어사대(御史臺) 관리가 3일간 업무를 보지 않았다. 이에 앞서 내시급사(內侍給使)가 어사대의 서리(胥吏)를 구타하고 모욕하였는데 어사대 관리가 물어서 밝히지 않았다. 또 태자부(太子府)의 내수(內竪)가 금령(禁令)을 어기고 흰 비단으로 지은 버선과 바지, 검은 비단으로 지은 적삼과 검은 서대(犀帶)를 착용하였다. 어사대의 서리가 그것을 벗기려다가 도리어 구금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사대의 서리 서염(徐琰) 등이 어사대 관리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신분이 비록 낮지만 모두 법을 맡은 관청의 서리인데, 지금 내예(內隷)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어사대의 기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철저히 논하여 공도(公道)를 바로 잡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어사대 관리는 우물쭈물하며 따르지 않았다. 서염(徐琰) 등 15인이 화를 내고 스스로 물러나는 바람에 남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임자. 이자겸(李資謙)을 판이부사(判吏部事)로, 김연(金緣)을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이궤(李軌)를 호부상서 판예부사(戶部尙書 判禮部事)로, 박경인(朴景仁)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각각 임명하였다.
여름 4월 갑자.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정묘. 안화사(安和寺)의 재수리가 끝났다. 5일간 재(齋)를 열고 완공을 기념하였다.
경오. 〈왕이〉 친히 〈안화사(安和寺)로〉 행차하여 〈낙성식을〉 관람하였다. 장막이 길게 늘어서고 부처를 공양하기 위한 가무[伎樂]가 길을 메웠으며 남녀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임신. 〈왕이〉 환궁(還宮)하여 제서(制書)를 내려 공사를 감독한 관리와 공장(工匠)들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처음 감독을 맡은 측근 신하들이 사치스럽게 하는 것에만 급급하여 노동력과 비용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송(宋)에 가는 사신 편에 뛰어난 필적의 편액(扁額)을 구하자, 송 황제가 그것을 듣고 손수 불전(佛殿)의 편액에 ‘능인지전(能仁之殿)’이라는 글씨를 써 주고, 태사(太師) 채경(蔡京)에게 명하여 절 문의 편액으로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라는 글씨를 쓰게 하여 하사하였다. 또한 16나한(羅漢)의 소상(塑像)도 하사하였다.
5월 계미. 초하루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무자. 김복윤(金福允)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을 판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判西北面兵馬事 兼 中軍兵馬使)로, 김연(金緣)을 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判東北面兵馬事 兼 行營兵馬使)로, 박경인(朴景仁)을 서북면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 知中軍兵馬事)로, 왕자지(王字之)를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 兼 知行營兵馬事)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미.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6월 임자.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정사.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이영(李永)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병인.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기사. 죄수를 재심하였다.
무인. 〈왕이〉 연친전(宴親殿)에 거둥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송(宋)에 사행(使行)가는 정극영(鄭克永)과 이지미(李之美)를 전송하면서, 제왕(諸王)과 재추(宰樞)를 불러서 잔치에 참석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신사. 송(宋)에서 합문지후(閤門祗候) 조의(曹誼)와 의관(醫官) 양종립(楊宗立) 등 7인이 왔다.
갑신. 〈왕이〉 건덕전(乾德殿) 문에서 〈송(宋)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았다. 조서에 이르기를,
“지명주(知明州) 누이(樓异)가 상주한 것을 살펴보고서 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와 왕자(王子) 아무개가 서한을 보내 약재와 진맥, 瘡瘇 등의 전문 의사 서너 명 정도를 뽑아 보내주어 의학에 관심을 두고 치료법을 널리 교습하게 해달라고 청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짐이 먼 해방(海方)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루 은택을 베풀어〉 모두 태평성대[壽域]를 누리게 하자, 그대는 책봉한 옛 정을 돌이켜 언제나 공물을 보내는 임무를 다 해왔다. 〈짐도〉 그 정성을 헤아려 은택을 후하게 하려고 힘써 왔다. 최근 살펴본 사신의 요청에서 멀리서 의술에 밝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니, 국의(國醫)에게 명령하여 약품을 가지고 가서 〈의술을〉 교습하는 것을 돕게 하여 모든 사람의 건강과 안녕을 도모하려고 한다.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특별한 대우를 감사하게 받으라. 이제 병의랑 합문지후(秉義郞 閤門祗候) 조의(曹誼)를 시켜 한림의관 태의국교수 사자(翰林醫官 太醫局敎授 賜紫) 양종립(楊宗立), 한림의유 태의국교수 사자(翰林醫諭 太醫局敎授 賜紫) 두순거(杜舜擧), 한림의후 태의국교학(翰林醫候 太醫局敎學) 성상(成湘), 적공랑 시태의학록(迪功郞 試太醫學錄) 진종인(陳宗仁)과 남줄(藍茁)을 데리고 가게 한다.”
라고 하였다.
정유.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갔다.
8월 갑인. 이수(李壽)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허재(許載)를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무오. 정극영(鄭克永)과 이지미(李之美)를 송(宋)에 보내 권적(權適) 등을 제과(制科)에 급제시켜 귀국시키면서 친필 조서(詔書)를 보내준 데에 사의를 표하였다. 왕이 친히 표문(表文)을 짓고 손수 썼다. 그 글에 이르기를,
“구중궁궐에 계신 황제께서 특별한 은혜를 보이려고 보내준 한 폭의 조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특별히 후대함을 일깨워주었기에, 절을 올리고 받는 사이에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동쪽에 있는 먼 나라지만 대대로 넓고 큰 천자의 은택을 입어서 신의 조부(祖父) 문왕(文王, 문종)이 제후로서 술직(述職)을 담당하여 원풍(元豊) 연간에 큰 은덕을 받았고, 신의 부친 숙왕(肅王, 숙종)이 봉토를 받아 숭녕(崇寧) 연간에 자애로운 혜택을 입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신은 변변치 못한 자질이지만 충효의 가풍을 이어받아 상국에 조공하는 의례를 더욱 공손히 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린 지도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순 임금[虞舜]의 총명함으로 옛 일을 살피고, 탕 임금[商湯]의 용맹과 지략으로 세상을 구제하였습니다. 귀한 솥을 주조(鑄造)하여 9주(九州)에 제사지내고, 대성악(大晟樂)을 지어 6대를 계승하였습니다. 명당(明堂)에서는 상제(上帝)를 배향하는 의례를 강구(講求)하였고, 학교[辟雍]에서는 선비를 기르는 위의(威儀)를 엄격하게 하였습니다. 세상에 드문 태평성세를 만나 더욱 정성을 다하여 〈상국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제들을 보내 입학을 간청하였으니, 비록 언어는 통역관[象胥]에게 의탁하더라도 새가 산골에서 나와 높은 나무에 옮겨 앉듯이 학업이 높이 향상되기만을 기대하였습니다[出谷企遷於喬木]. 〈그런데 황제께서〉 포용하는 덕을 베풀어 학교에서 교육받게 하고, 또 올바른 도로 돌아오게 하여 점차 유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게 하며, 그들을 궁정에 불러 재주를 시험하고 관작을 내려 영광스럽게 귀국시킬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곡진하고 진실한 말씀으로 칭찬하고 기리는 글을 지으시고 용과 뱀이 꿈틀거리듯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니, 신령스러운 필치가 종횡으로 나타나고 은하가 하늘을 두른 것처럼 밝은 문장의 높고 뛰어남[高妙]이 펼쳐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황제 폐하가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역대 조상의 유풍을 훌륭히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인정(仁政)이 만방을 고루 덮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는 깊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우리 사신을 접견할 때마다 궁궐 안에서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혹 책문(策文)으로 학생들을 시험할 때에는 친히 편전에 거둥하였으며, 친히 쓴 조서로 은총을 후하게 더하니 신이 어찌 가르침의 말씀을 공경히 받들어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드높이지[對揚休命] 않겠습니까? 이 조서를 10겹으로 싸서 간직하였다가 자식에게서 손자로 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권면하여 풍속을 바꾸기를 기약하며, 하찮은 노력으로라도 특별한 후의에 길이 보답하려 합니다.”
라고 하였다.
신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중죄인의 형량을 결정지었다.
계유.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행차하였다.
9월 경진. 초하루 죄수를 재심하였다.
갑신. 왕비 연덕궁주(延德宮主) 이씨(李氏)가 훙서(薨逝)하였다.
정유. 〈연덕궁주(延德宮主)를〉 수릉(綏陵)에 장사지냈다.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고진명(高進明)이 남원부사(南原府使) 지준(池俊)과 판관(判官) 채극성(蔡克誠)·문안경(文安慶) 등이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는 죄를 저질렀다고 탄핵하자 그들을 파면시켰다.
계묘. 죄수를 재심하였다.
기유. 회경전(會慶殿)에 장경도량(藏經道場)을 열고, 왕이 친히 분향하였다.
윤9월 갑인. 재추(宰樞)가 내전(內殿)의 문까지 와서 세 차례나 표문을 올려 평상시의 수라상으로 회복할 것을 요청하자, 왕이 수락하였다.
계유. 〈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친히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병자.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노자(老子)』를 강론하게 하였다.
무인. 왕태자가 상복(喪服)을 벗었다.
수사공 좌복야 판상서병부사(守司空 左僕射 判尙書兵部事) 최정(崔挺)이 사망하자 시호(諡號)를 정의(貞毅)라 하였다. 문종(文宗)이 무사를 선발하였을 때 최정(崔挺)은 빼어난 활솜씨로 뽑혔으며, 동여진(東女眞)의 정벌에 공이 있었다.
경진. 급사중(給事中) 최자성(崔滋盛) 등을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 군사를 선발하게 하였다.
임오.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갔다.
을미. 〈왕이〉 순덕왕후(順德王后)의 혼당(魂堂)에 행차하였다.
11월 기유. 초하루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행차하여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주역(周易)』의 「복괘(復卦)」를 강론하게 하였다.
12월 무인. 초하루 죄수를 재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