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예종(睿宗) 15년
예종3(睿宗三) 15년
〈경자〉 15년(1120) 봄 2월 병신. 〈왕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다.
여름 4월 계유. 〈왕이〉 남경(南京)에서 돌아왔다.
5월 신해.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복시(覆試)를 보였다.
정사. 이지저(李之氐)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갑자. 산천과 사직에 비를 빌었다.
을축. 왕사(王師) 덕연(德緣)을 불러 『금강경(金剛經)』을 강론하게 하고, 반승(飯僧)하였다.
무진. 부처의 사리(佛骨)를 대궐로 들여왔다. 처음에 왕자지(王字之)가 사신으로 〈송(宋)에〉 갔다가 귀국하는 편에 송 황제가 금함(金函)에 부처의 치아와 두골(頭骨)을 담아서 하사한 것을 외제석원(外帝釋院)에 안치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산호정(山呼亭)으로 옮긴 것이다.
6월 경오.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미. 기우제를 지냈다.
갑술.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병자. 김준(金晙)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이궤(李軌)를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左僕射 叅知政事)로, 임유문(林有文)을 우복야 지문하성사(右僕射 知門下省事)로, 박경인(朴景仁)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한안인(韓安仁)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최홍재(崔弘宰)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윤유지(尹惟贄)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송수(宋秀)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각각 임명하였다.
기묘.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국자좨주(國子祭酒) 정극영(鄭克永)에게 명하여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갑신.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병술. 죄수를 재심하였다.
정해. 〈왕이〉 복원궁(福源宮)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고, 그 길로 안화사(安和寺)의 순덕왕후(順德王后) 진당(眞堂)으로 행차하여 술잔을 올리고 눈물을 흘렸다.
신묘. 송(宋)의 상인 임청(林淸) 등이 꽃나무를 바쳤다.
정유.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김연(金緣)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태갑편(太甲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가을 7월 갑진. 요(遼)에서 악원부사(樂院副使) 소준례(蕭遵禮)를 보냈다.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보낸 표문(表文)을 살펴보고 모든 것을 잘 알았다. 경은 동쪽 변방에 나라를 세우고 북궐(北闕)의 번방(藩邦)을 칭하였다. 두 흉악한 무리가 병란을 일으킨 후부터 그 쪽으로 통하는 길이 막히는 바람에, 지난번 후사를 세워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아직도 책봉의례를 시행하지 못하였다. 근래에도 나를 도우려고 힘쓰며 또한 일찍이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진다. 다시 적당한 기회를 봐서 도적을 소탕할 것을 도모하기 위하여, 얼마 전에 비밀 조서를 보내 이 뜻을 알리려 하였으나 도중에 장애가 많아서 사람들이 가기가 곤란하였다. 때로는 배편을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책봉의 조서는 전달하지 못하였고, 보낸 폐물만 통과되어 간신히 나의 성의만 표할 수 있었다. 사례하는 글을 곧바로 보내서 성의를 다하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되었고, 또 그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으로, 나에게 보답할 것을 마음으로 기약하였다. 이미 강개한 마음을 더하였으니 반드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려 맑게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진실로 공동의 원수가 존재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일 것이다. 실효를 살피면서 돌아오는 소식을 기다렸다가 다시 회답을 보낼 터이니 거듭 생각하여 준수해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경술. 원구단(圓丘壇),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및 여러 명산(名山)의 제단에서 비를 빌었다.
을묘. 〈왕이〉 천화사(天和寺)에 행차하였다.
지녹연(智祿延)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이란(李鸞)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임술. 송(宋)에서 승신랑(承信郞) 허립(許立)과 진무교위(進武校尉) 임대용(林大容) 등을 보내왔다.
을축.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강증(康拯)이 사망하였다.
8월 여름부터 시작된 가뭄이 이달까지 계속되자, 오곡이 여물지 않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신미.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여 5부(部)에 명하여 3일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독송하여 전염병을 물리치라고 하였다.
갑술. 죄수를 재심하였다. 문덕전(文德殿)에서 7일 동안 불정도량(佛頂道場)을 열었다.
무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중죄인의 형량을 결정하였다.
경진. 〈왕이〉 안화사(安和寺)의 순덕왕후(順德王后) 진당(眞堂)에 행차하여 오래 슬퍼하니, 곁에 있던 신하 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신사. 좌정언(左正言) 홍약이(洪若伊)가 소를 올려 현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자 〈왕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을유.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무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
정유. 〈왕이〉 흥복사(興福寺)와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여 밀물을 구경하였다.
무술. 〈왕이〉 대동강(大同江)에 행차하여 배를 타고 고기 잡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9월 기해. 초하루 〈왕이〉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여 밀물을 구경하였다.
계묘. 순덕왕후(順德王后)의 대상(大祥)을 맞아 상안전(常安殿)에서 반승(飯僧)하였다.
을사. 장락전(長樂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무신.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로 두 차례 서경[陪京]을 순시(巡視)하였는데, 이전에는 돌아보고 곧 돌아갔으나 이번에는 오래 머물러도 편안하여 아무 걱정이 없다. 이에 작은 은혜라도 베풀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려 한다. 8월 을유일 이후 잘못으로 죄를 저질러 유사(有司)에게 탄핵을 당한 자와 구리와 기와를 바쳐 대속(代贖)해야 하는 범죄자는 모두 사면해 주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계축. 〈왕이〉 장락전(長樂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친히 「수성명사(壽星明詞)」를 짓고 악공(樂工)을 시켜 노래로 부르게 하였다.
을묘. 죄수를 재심하였다.
계해.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치사(致仕)한 김한충(金漢忠)이 사망하였다.
겨울 10월 무진. 초하루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신사.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잡희(雜戱)를 관람하였다. 국초(國初)의 공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모습을 본 뜬 우상(偶像)이 있었는데,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11월 임인.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와 사면령을 내렸다.
갑진. 죄수를 재심하였다.
계해.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김부일(金富佾)에게 명하여 『시경(詩經)』의 「반수편(泮水篇)」를 강론하게 하였다.
12월 정묘, 초하루 왕이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상(喪)이 끝나자 태자와 평장사(平章事) 이자겸(李資謙), 지주사(知奏事) 이자량(李資諒) 등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기며 은택을 극진하게 베풀었다.
갑신. 〈왕이〉 복원궁(福源宮)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고, 그 길로 안화사(安和寺)로 행차하였다.
신묘. 왕연(王演)을 검교사도 수사공 진강백(檢校司徒 守司空 晋康伯)으로, 왕시(王禔)를 검교사도 수사공(檢校司徒 守司空)으로, 박경인(朴景仁)을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尙書左僕射 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가 곧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