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예종(睿宗) 5년

7390882@hanmail.net 2024. 5. 25. 07:20

예종2(睿宗二) 5년

 

〈경인〉 5년(1110) 봄 정월 경자.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창주(昌州)의 관문 밖의 번장(蕃長) 망간(亡間) 등 28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임인. 요(遼)에서 위위경(衛尉卿) 이봉진(李逢辰)을 파견해 왕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경은 황가(皇家)를 보위하는 울타리로서 먼 바다 밖[海表]을 진무(鎭撫)했으며, 전력으로 정벌에 나서 직분을 지키고 오랑캐를 소탕하는 전공을 세웠다. 승세를 타서 적의 항복을 받아 내었고, 드디어 영토를 개척하여 보루를 설치했으니 생각건대 완성한 시설들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지난번에 사신을 파견하여 먼 곳까지 빠르게 승첩을 알려오고, 그 공을 짐에게로 돌렸으니 진실로 내 마음에 위로가 된다.”

라고 하였다.

기유. 요(遼)에서 이국경(李國瓊)이 귀국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경이 지난번 변경의 오랑캐를 토벌한 후 임시로 성과 요새[城堡]를 설치함으로써, 적의 침구를 방지하는 한편 방비의 강화에 힘썼으며 그 후 적들이 화친을 청해오자 그에 따라 〈성과 요새를〉 허물었다. 이는 적절한 조치였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다시 우리에게 보고까지 하였으니, 그 성의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상하다.”

라고 하였다.

경술. 〈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었다.

을묘. 〈왕이〉 선정전(宣政殿) 남문에 거둥하여 북계(北界)의 번장(蕃長) 39인을 접견하고 각자에게 옷 한 벌씩을 하사하였다.

정사.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북계(北界)의 번장(蕃長) 35인을 접견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경신. 〈왕이〉 중광전(重光殿)의 남쪽 누각에 거둥하여 신기군(神騎軍) 군사들의 격구(擊毬)를 관람한 후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임술. 〈왕이〉 중광전(重光殿) 남문에 거둥하여 북계(北界)의 번장(蕃長) 19인을 접견하고, 술과 음식 및 전례에 따른 물품을 하사하였다.

갑자. 〈왕이〉 성수전(星宿殿)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2월 계미.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여진(女眞) 추장(酋長) 만수(萬壽) 등 13인이 내조(來朝)하였다.

경인. 왕정(王禎)을 검교사도 수사공 승화백(檢校司徒 守司空 承化伯)으로 임명하고, 조서를 내려 예전(例典)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갑오. 왕태후가 불은사(佛恩寺)로 거처를 옮겼다.

3월 기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신해.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을묘. 해가 핏빛으로 변하고 광채를 잃었다.

갑자.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임의(任懿)를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로 임명하고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필광찬(畢光贊)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이오(李䫨)를 권상서이부사(權尙書吏部事)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신미. 죄수를 재심하였다.

갑술. 사천대(司天臺)에서 아뢰기를,

“금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람의 뼈가 길거리에 가득합니다. 유사(有司)에게 수습하여 매장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병자. 이정승(李正升)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갑신.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을유. 문덕전(文德殿)에서 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을 열었다.

갑오. 〈왕이〉 순천관(順天館)에 행차하여 사신 접대 상황을 점검하였다.

5월 계묘. 회경전(會慶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5일 동안 열었다.

기유. 혜성(彗星)이 자미성(紫微星)에 들어갔다.

경술. 왕이 연덕궁(延德宮)에서 왕태후를 알현하였다.

신해.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조회(朝會)를 보았다. 재상 최홍사(崔弘嗣)와 김경용(金景庸)이 대간(臺諫)과 함께 상소하여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 등이 패전한 죄를 문제 삼았다. 왕이 듣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자, 최홍사 등은 중광전(重光殿)의 동자문(東紫門)으로 나아가 해질 때까지 완고하게 요청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재상과 간관(諫官)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출근하지 않아서 관청이 텅 비자, 왕이 평장사(平章事) 이오(李䫨)와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덕우(李德羽) 등을 불러 관청의 숙직을 서게 하였다. 최홍사 등이 수십 일 동안 출근하지 않자, 왕이 근신을 보내 성심껏 타일러 다시 나오게 하니 간관들 역시 출근하여 일을 보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었다.

을묘. 혜성(彗星)이 9일간 나타났다.

정사. 밤에 도적 20인이 도제고(都祭庫)에 침입하여 고직(庫直)인 낭장동정(郞將同正) 김가숭(金可崇)을 죽이고 은붙이를 훔쳐갔다.

갑자. 영강현(永康縣)에 우박이 쏟아졌는데 이튿날에야 그쳤다.

6월 무진.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기사. 이 절에서 친히 하늘의 상서(祥瑞)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신미.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송(宋) 명주(明州)에서 보낸 여악(女樂) 2인을 불러 만나보았다.

우박이 쏟아졌다.

갑술. 송(宋) 상인 이영(李榮) 등 38인이 왔다.

병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부족한 몸[眇躬]으로 사리에 맞지 않게 왕위를 이어 나라[三韓]를 다스리니, 정무가 지극히 많아 보고 듣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형사(刑事)에 관한 행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해 서너 해 사이에 농사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병이 드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걱정하고 노력하여[宵旰] 일찍이 잠깐이라도 멈춘 적이 없었다. 게다가 또한 하늘의 변괴가 매일 나타나 여름철 들어서는 찬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리기까지 하니, 이는 바로 나의 덕이 부족하여 생긴 일이므로 걱정과 두려움이 한층 더하다. 생각건대 나라에서 은혜를 두루 내림[推恩]으로 위로는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위로하며 조화로운 기운을 불러 모아 평안을 이루고자 한다. 이 조서[宣旨]를 내리기 이전에 수감된 죄수 가운데 유배형 이하를 선고 받은 자는 모두 형을 면제하고, 2죄(二罪) 이상은 형을 면제하여 부처(付處)하도록 하라. 일찍이 죄를 지어 유배된 자는 모두 도성 가까운 곳으로 옮긴 후[量移] 관리 임용까지 이르게 하고, 혹 죄를 범하여 부모처자와 떨어져 살고 있는 자는 일가족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라.”
라고 하였다.

신사. 송(宋)에서 왕양(王襄)과 장방창(張邦昌)을 사신으로 보내자, 참지정사(叅知政事) 이위(李瑋)와 전중소감 좌승선(殿中少監 左承宣) 한교여(韓曒如)를 〈그 일행을 맞이할〉 관반(館伴)으로 임명하였다.

임오.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계미. 왕이 회경전(會慶殿)의 뜰에서 〈송(宋) 황제의〉 조서를 받았다. 조서에 이르기를,
“경은 대대로 아름다운 영예를 누리면서 동쪽 번방을 맡아 보호하여 왔다. 작위를 이어받은 처음부터 봉토를 잘 다스려 옛날과 같았으며,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 우리 조정에 공물을 가득히 바쳤다. 그 의리가 실로 가상하니 예의상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사신에게 명하여 가서 책봉하게 하여, 후의(厚意)의 대부분을 펼쳐 보이고 다양한 의례의 향연을 보여서 알게 할 것이니 나의 뜻에 순종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길 바란다. 이제 병부상서(兵部尙書) 왕양(王襄)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장방창(張邦昌)을 파견하여 경에게 의대(衣帶)와 직물, 금과 옥으로 만든 그릇, 활과 화살, 안장을 갖춘 말을 보낸다.”
라고 하였다. 왕이 조서를 받고난 후 궁전에 올랐다.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왕 앞으로 나아가 황제의 밀지[密諭]를 전달하며 이르기를,

“황제께서 먼 나라까지 밝게 보고, 왕의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의 정성을 헤아려 은혜를 더하려 했습니다만, 왕께서 이미 북조(北朝)의 책명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남조와 북조의 두 나라가 백 년 동안이나 우호관계를 맺어 와서 의리는 형제와 같았습니다. 그 까닭으로 또 다시 왕을 책봉하지 않고 조서만 보낼 뿐입니다. 관직 앞에 ‘권(權)’자를 없앤 것, 이것은 바로 왕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는 예를 통해 왕을 사랑한 것입니다. 또 이 조서는 황제가 몸소 짓고 친히 쓴 것이니 북조에서는 절대로 이와 같은 예우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왕(文王, 문종)과 숙왕(肅王, 숙종)에게도 일찍이 이러한 은혜로운 명령[恩命]을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와서 왕께서 매우 공손하게 조서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으니, 다음에 돌아가서 황제께 이 사실을 아뢰면 황제께서 반드시 기뻐하고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청하건대 왕께서는 정성과 존경을 더욱 돈독하게 하여 성은(聖恩)에 보답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무자. 회경전(會慶殿)에서 송(宋)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가을 7월 무술 초하루 왕양(王襄) 등이 귀국하는데 왕이 표문을 부쳐 사의를 표하며 말하기를,
“〈저를〉 특별히 생각하여 주니 고개가 숙여져 더욱 공손해지는데, 하물며 공적이 보잘 것 없으니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寘顔]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臣)은 멀리 궁벽한 땅에 메어 살다가 점점 번성해가는 시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름지기 자식은 아버지가 개간한 밭에 즐거이 씨를 뿌려야 하고, 작은 나라는 진심으로 큰 나라에 복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는 선대 조상이 신에게 남긴 교훈으로, 미천한 신은 이에 따라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외람되게 제후의 자리를 계승한 이후 겨우 한 차례 조공을 보냈는데, 가신(家臣)이 돌아오는 편에 두터운 은혜를 과분하게 입었습니다. 단지 부끄럽고 두렵지만 미처 사의를 표할 겨를이 없었는데, 뜻밖에 황제폐하께서 먼 나라까지 어진 마음으로 생각하여 비상(非常)한 예를 들어 사신의 수레를 영광스럽게도 내려 주고 융숭한 상전(賞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선조 때로부터 공손히 받은 것이 비록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 은총의 예수(禮數)를 융숭하게 더한 것이 오늘 같은 날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보내신 조서[勑墨]와 겸하여 받든 유음(諭音)을 살펴보니 신의 직함에서 ‘권(權)’자를 없애고, 이른바 ‘책봉의 명령과 정삭(正朔)의 반포는 이미 대요(大遼)로부터 받았으므로 별도로 상국(上國)에서 행하지 않겠다.’라고 한 것은 참작(參酌)의 의리를 보이고 북조(北朝)에 대한 우려를 관대히 살핀 것입니다. 폐하의 언행은 치밀하게 보살피니, 어찌 산같이 크고 무거운 은혜를[丘山之戴] 감당하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뜨거운 충정으로 몸이 벌벌 떨리니 마치 얼음 골짜기에 선 듯합니다. 오직 성심을 다해 폐하의 은택을 저버리지 않으려 할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황제의 밀지[密諭]에 대한 답으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동쪽 끝의 사이에 끼어 있어 조상 이래로 풍속을 교화하는 일을 사모하여, 때에 따라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으며 황제의 두터운 은총을 입었습니다. 숭녕(崇寧) 연간에 국신사(國信使) 유시랑(劉侍郞)과 오급사(吳給事)가 성지(聖旨)를 받들고 와서 책봉의 의례를 행한 일을 물었는데, 선고(先考)께서 당시 나라의 경계가 대요(大遼)와 맞닿아 있어 이미 오랫동안 작위를 수여받고 정삭(正朔)을 받아 행해 왔던 까닭으로 감히 상국의 명령을 따르지 못한 사실을 간곡하게 알렸습니다. 그 후 온 나라 사람들이 〈상국에 대해〉 두렵고 무서워서 잠시도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국신사(國信使)로 온 상서사인(尙書舍人)이 전한 밀지를 들어보니,

‘황제의 총명함이 하늘의 해와 같아서 국왕이 비록 만리 밖에 있더라도 그 충효공순(忠孝恭順)함을 황제는 환하게 비추지 않음이 없어서 항상 남다른 은혜를 넉넉하게 더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이 조정에 들어가 하직인사를 드리는 날 황제는 모두 알고서는 「〈고려가〉 이미 요의 책명을 받았고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두 나라가 백년 넘게 친교를 통하여 의리상 골육의 형제와 같기 때문에 더 이상 책봉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온 조서에 이미 ‘권(權)’자를 없앴으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는 예를 통하여 국왕을 높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명령을 들은 처음에는 두렵고 놀라 얼이 빠져 끝내 사양하는 표문을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황제가 성은으로 세심하게 위로하여 ‘권’자를 떼어 이름을 바로 잡음을 보이시고, 책봉의 명령을 영원히 없애서 한 쪽의 후환도 없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조서를 따라 ‘권(權)’자를 떼어버렸고, 더욱이 내리신 조서가 황제께서 직접 쓰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러한 영예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유달리 더 감격스럽습니다. 또 다시 충성과 공경을 기약하여 황제께서 베풀어 주신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니 상서사인이 돌아가 복명할 때 잘 아뢰어주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기해. 송(宋) 상인 지귀(池貴) 등 42인이 왔다.

신축.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오(李䫨)가 사망하였다.

병인. 사재경(司宰卿) 이재(李載)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차호부시랑(借戶部侍郞) 안자공(安子恭)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8월 신사. 형부(刑部)에서 전국의 중죄인의 현황을 아뢰자, 왕이 선정전(宣政殿) 남랑(南廊)에 거둥하여 재추(宰樞)와 함께 형량을 결정하였다.

을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을미. 태묘(大廟) 및 여러 신묘(神廟)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윤8월 계묘. 왕이 태후를 모시고 남경(南京)에 행차하였다.

임자. 연흥전(延興殿)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을 8일 동안 열었다.

신유. 〈왕이〉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藏義寺)에 행차하고, 나아가 승가굴(僧伽窟)까지 행차하였다.

통의후(通義侯) 왕교(王僑)에게 명하여 문수굴(文殊窟)에 나아가 태후 및 제왕(諸王)과 각 궁의 공주들 이름으로 의복을 시주하게 하였다.

9월 갑술. 제왕(諸王)과 재추(宰樞)에게 천수전(天授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끝내고 각자에게 유폐(侑幣)를 하사하였다. 왕이 시를 짓고는 유신(儒臣)이 화답하는 시를 바치게 하고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한 광대[優人]가 있어 연극을 빙자하여 선대의 공신 하공진(河拱辰)을 칭송하자, 왕이 그 공을 추념하여 현손(玄孫) 내시 위위주부(內侍 衛尉注簿) 하준(河濬)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고, 이어서 시 한 수를 지어 하사하였다.

기묘. 〈왕이〉 남명문(南明門)에 거둥하여 신기군(神騎軍)의 격구를 관람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경진. 연흥전(延興殿)에서 『금강경(金剛經)』을 강하였다.

임진. 〈왕이〉 북녕문(北寧門)에 거둥하여 문무 신료의 활쏘기를 검열하고, 과녁에 적중한 자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겨울 10월 갑진.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보였는데, 하늘을 가로질렀다.

서여진(西女眞) 고급과하(古伋果下) 등 98인이 와서 준마(駿馬) 57필을 바쳤다.

무신. 태묘(大廟)에서 협제(祫祭)를 올렸다.

임자. 〈왕이〉 80세 이상의 노인 및 효자·순손(順孫), 의부(義夫)와 절부(節婦),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篤疾)·폐질(廢疾)에 걸린 자들에게 남명문(南明門) 밖에서 친히 음식을 대접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그 가운데 효자 한 명에게는 전례에 따라 특별히 예물을 더하여 하사하고, 시 한 수를 지어 좌우 신하에게 보여 주었다.

을묘. 왕이 타는 수레[車駕]가 남경(南京)을 출발하였다.

병진. 〈왕이〉 신혈사(神穴寺)에 행차하였다.

11월 을축. 초하루 〈왕이〉 약사원(藥師院) 남쪽 길로 가서 덕음(德音)을 반포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개경[京都]으로 돌아왔다.

정축. 동여진(東女眞)의 사현(史顯) 등 12인이 내조(來朝)하였다.

무인.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신사. 문관(文冠)을 수사공(守司空)에 임명하였다.

갑신. 큰 눈이 내리자 왕이 「희설시(喜雪詩)」를 지어 좌우 신하에게 보여 주었다.

12월 을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사현(史顯) 등을 접견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경자. 〈왕이〉 중광전(重光殿) 남루(南樓)에 거둥하여 서여진(西女眞) 추장(酋長) 등 40여 인을 접견하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신축. 윤관(尹瓘)을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守太保 門下侍中 判兵部事)로, 최홍사(崔弘嗣)를 판이부·예부사[判吏·禮部事]로, 김경용(金景庸)을 문하시랑평장사 판형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刑部事)로, 김한충(金漢忠)을 판공부사(判工部事)로, 오연총(吳延寵)을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中書侍郞平章事 判三司事)로, 이위(李瑋)를 중서시랑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中書侍郞 判戶部事 兼 西京留守使)로, 허경(許慶)을 형부상서 추밀원사(刑部尙書 樞密院使)로, 이자겸(李資謙)을 전중감 동지추밀원사(殿中監 同知樞密院事)로 임명하였다.

을사. 건덕전(乾德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신. 〈왕이〉 법운사(法雲寺)에 행차하였다.

계축. 입춘(立春)이어서 백관(百官)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왕을 배알하자, 〈왕이〉 춘번자(春幡子)를 하사하고 이어서 「영춘사(迎春詞)」 2수를 지었다.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를 수태위 대방공(守太尉 帶方公)으로, 대원후(大原侯) 왕효(王侾)를 수태위(守太尉)로, 제안후(齊安侯) 왕서(王偦)를 수사도(守司徒)로, 통의후(通義侯) 왕교(王僑)를 수사도(守司徒)로, 사영(史榮)을 섭호부상서 서경지유수(攝戶部尙書 西京知留守)로, 박경작(朴景綽)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왕보 등이 함께 관직을 사양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교서를 내렸다.

경신. 김상우(金商祐)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