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예종(睿宗) 7년

7390882@hanmail.net 2024. 6. 2. 16:29

예종2(睿宗二) 7년

 

〈임진〉 7년(1112) 봄 정월 신유. 요(遼)에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유공윤(劉公允)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경진. 어사중승(御史中丞) 홍관(洪灌)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급사중(給事中) 최홍정(崔弘正)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하였다.

2월 신축.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이튿날 대회(大會)에서 왕이 시를 짓고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경술. 간관이 소를 올려 천수사(天壽寺)의 창건을 중지하라고 요청하자,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갑인. 김경용(金景庸)을 수태보 판상서이부사(守太保 判尙書吏部事)로, 오연총(吳延寵)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守司徒 判尙書兵部事 監修國史)로, 이위(李瑋)를 수사도 수국사(守司徒 修國史)로, 허경(許慶)을 검교사도 판상서예부사(檢校司徒 判尙書禮部事)로, 유인저(柳仁著)와 이자겸(李資謙)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최계방(崔繼芳)과 고령신(高令臣)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김준(金晙)을 예빈경 추밀원지주사(禮賓卿 樞密院知奏事)로, 왕자지(王字之)를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吏部侍郞 樞密院左承宣)으로, 김황원(金黃元)을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로, 한교여(韓曒如)를 우승선(右承宣)으로 임명하였다.

3월 무오. 초하루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임오. 정지원(鄭之元)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여름 4월 경인.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병신. 〈왕이〉 대궐 안(禁內) 사루(紗樓)에 거둥하여 「모란시(牧丹詩)」를 짓고,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응제시를 짓게 하고는 직물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일찍이 현종(顯宗)이 손수 모란을 사루 앞에 심었는데, 덕종(德宗)으로부터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란꽃에 대해 읊은 시가 있고, 또 시종한 신하들이 지은 응제시(應製詩)도 있다.

정유. 김지화(金至和)를 지이부사(知吏部事)로, 박경작(朴景綽)을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조중장(趙仲璋)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임언(林彦)을 예부시랑 우간의대부(禮部侍郞 右諫議大夫)로, 김고(金沽)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무술. 제왕(諸王) 및 평장사(平章事) 김경용(金景庸)과 상장군·대장군(上·大將軍), 승선(承宣) 등을 위해 상춘정(賞春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우박이 쏟아졌다. 

5월 갑자.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보였다.

을축. 흥국사(興國寺)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무인. 3품 이상의 관리를 식목도감(式目都監)에 모으고 변방의 수비책을 물었다.

6월 정해.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을미. 부여공(扶餘公) 왕수(王㸂)를 거제현(巨濟縣)으로 이배하였는데, 가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죽었다.

기유. 참지정사(參知政事) 문관(文冠)이 사망하였다.

가을 7월 기사. 왕태후 유씨(柳氏)가 신박사(信朴寺)에서 훙서하였다.

정축.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수(李壽)를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안자공(安子恭)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8월 병신.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를 숭릉(崇陵)에 장사지내는데, 왕이 대궐의 뜰에서 전송하였다.

정유. 전중감(殿中監) 이덕우(李德羽)를 요(遼)에 보내 태후의 부음을 알렸다.

병오. 승통(僧統) 왕탱(王竀)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유배 보냈다.

무신. 상서우승(尙書右丞) 김인석(金仁碩), 전주목사(全州牧使) 이여림(李汝霖), 전중소감(殿中少監) 하언석(河彦碩), 형부상서(刑部尙書) 임신행(任申幸), 대경(大卿) 이중평(李仲平),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이일숙(李日肅), 장군(將軍) 김택신(金澤臣)·송영한(宋英漢), 별장(別將) 김유성(金有成),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 이수(李綏), 영삭진사(寧朔鎭使) 이일연(李日衍), 숭교사(崇敎寺) 승려 자상(資尙) 및 김인석(金仁碩)·이여림(李汝霖)·임신행(任申幸)·하언석(河彦碩)의 아들들을 먼 지방에 유배 보냈다. 그 중 자상(資尙)은 중도에서 목을 베었다.

신해. 낙랑후(樂浪侯) 왕영(王瑛)이 사망하였다.

9월 병인. 김경용(金景庸)을 문하시중으로, 오연총(吳延寵)과 이위(李瑋)를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허경(許慶)을 수사도(守司徒)로, 유인저(柳仁著)를 상서좌복야 판상서형부사((尙書左僕射 判尙書刑部事)로, 이자겸(李資謙)을 수사공 병부상서 판삼사사(守司空 兵部尙書 判三司事)로, 최계방(崔繼芳)을 검교사공 추밀원사(檢校司空 樞密院使)로, 고령신(高令臣)을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 知樞密院事)로, 김연(金緣)을 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左散騎常侍 同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로, 최정(崔挺)을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로, 김상우(金商祐)를 형부상서로, 유재(劉載)를 예부상서로, 임유문(林有文)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강증(康拯)을 어사대부로 임명하였다.

을해. 예부시랑(禮部侍郞) 김진(金縝)을 요(遼)에 보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겨울 10월 경인. 송(宋)에서 국신물(國信物)로 보낸 용봉차(龍鳳茶)를 재신에게 나누어주었다.

신묘. 공부시랑(工部侍郞) 이총린(李寵鱗)을 요(遼)에 보내 횡사(橫賜)에 사례하였다.

을사. 호부시랑(戶部侍郞) 강열(康悅)을 요(遼)에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 사례하였다.

임자. 양부(兩府)의 재신(宰臣)이 표문을 올려 수라상의 육식을 평소대로 다시 할 것을 간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갑인. 초하루 재신들이 세 차례나 표문을 올려 평소대로 육식을 다시 하라고 요청하자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경신.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유인저(柳仁著)와 이자겸(李資謙)을 재상으로 임명하는 조칙[麻制]을 내렸다.

정축. 왕이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우궁(虞宮)을 참배하였다.

기묘. 승선(承宣) 한교여(韓曒如)를 중서성(中書省)에 보내어 변방을 수비할 계책을 물었다.

경진. 예빈소경(禮賓少卿) 최화(崔俰)를 요(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신사.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김경용(金慶庸)·오연총(吳延寵)·이위(李瑋)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조서[麻制]를 내렸다.

요(遼) 동경(東京)에서 회사지례사(回謝持禮使)로 예빈부사(禮賓副使) 사선(謝善)이 왔다.

임오. 형부시랑(刑部侍郞) 허지기(許之奇)를 요(遼)에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12월 신축. 최사추(崔思諏)를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으로, 임간(林幹)을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 同平章事)로 삼고 치사(致仕)하도록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