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의종(毅宗) 21년

7390882@hanmail.net 2025. 4. 20. 06:01

의종2(毅宗二) 의종(毅宗) 21년

〈정해〉 21년(1167) 봄 정월 갑진. 전라주로안찰부사(全羅州路按察副使) 윤평수(尹平壽)가 은 80근을 바쳤다. 윤평수(尹平壽)는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착취하여 〈왕의〉 은총을 받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당시 의론이 그를 비루하다 하였다.

계축.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밤에 돌아오던 중 김돈중(金敦中)의 말이 갑자기 기사(騎士)의 〈화살통인〉 시방(矢房)을 부딪치는 바람에 화살이 어가(御駕) 옆에 떨어졌다. 왕이 경악하며 〈자기를 향하여 쏜 것이〉 빗나간 화살로 여기고 급히 서둘러 환궁하자마자 궁성에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갑인. 〈왕이〉 유사(有司)에 명하여 시가(市街)에 방을 붙여 말하기를,
“능력껏 역적을 고하는 자는 물론(勿論) 관직이 있든 없든 논하지 않고 동반(東班) 정랑(正郞)이나 서반(西班) 장군(將軍)의 직을 원하는 바에 따라 제수할 것이다. 공사(公私) 천예(賤隷)라 하더라도 또한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고 아울러 은(銀) 200근을 지급할 것이며, 여자인 경우는 은(銀) 300근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왕은 그래도 〈적을〉 잡지 못할까 우려하여, 또 황금 15근과 은병(銀甁) 200 개를 가구소(街衢所)에 현상금으로 내걸어 잡은 자에게 주라고 하였다.

을묘. 궐정(闕廷)에 부병(府兵)을 주둔시켜서 불측한 일을 대비하였다. 이때부터 용력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내순검(內巡檢)이라 이름하였다. 나누어 양번(兩番)으로 하였으며 항상 자의(紫衣)를 입고 활과 검을 지닌 채 장외(仗外)에 나누어 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부터 새벽까지 순찰하게 하였다.

병진. 간관(諫官)이 5일간 합문에 엎드려 시사(時事)를 이야기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2월 계미.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였다.

임진.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3월 기해. 초하루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기미. 왕이 비를 무릅쓰고 장흥원(長興院)에 행차하여 각예(覺倪)와 더불어 밤까지 마시다가 우승선(右承宣) 김돈중(金敦中)에게 명하여 시를 짓도록 하였다.

신유. 왕이 미행(微行)으로 금신굴(金身窟)에 이르렀다. 나한재(羅漢齋)를 열고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李公升)·허홍재(許洪材)·각예 등과 더불어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워 취하도록 마시며 지극히 즐거워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녕재(淸寧齋) 남록(南麓)에 정자각(丁字閣)을 지어 편액하기를 ‘중미정(衆美亭)’이라 하였는데, 정자의 남쪽 흐르는 시내에 흙과 돌을 쌓아 물을 모아두고는 못 가에 모정(茅亭)을 지으니, 물오리와 기러기가 갈대숲에서 노는 모양이 완연히 강호(江湖)의 모습과 같았다. 그 가운데 배를 띄우고 소동(小僮)으로 하여금 노 젓는 뱃노래와 고기잡이 노래를 부르게 하며 유람하는 즐거움을 지극히 하였다.

처음에 정자를 지을 때 역졸(役卒)들은 사적으로 양식을 지참해야 하였는데, 한 역졸이 너무 가난하여 스스로 준비할 수 없어 역도(役徒)들이 함께 밥 한 수저씩을 떠주어 이를 먹었다. 어느 날 그 처가 음식을 장만하여 와서 먹게 한 후, 또 말하기를, “의당 친하게 된 이를 불러 함께 드시지요.”라고 하였다. 역졸(役卒)이 말하길,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음식을 마련하였는가? 다른 사람과 사통하여서 이를 얻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가진 것을 훔친 것인가?”라고 하자 처가 말하기를, “용모가 추하니 누가 더불어 사통하려 할 것이며, 성품이 서투른데 어찌 능히 도적질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왔을 뿐이오.”라고 하고는 그 머리를 보여주었다. 역졸(役卒)이 흐느껴 울면서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듣는 사람도 이를 슬퍼하였다.

임술. 〈왕이〉 귀법사(歸法寺) 동쪽 고개로 행차하여서는 시신(侍臣)과 더불어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계해. 백기(白氣)가 해를 꿰뚫는 듯한 현상이 있었다.

여름 4월 무진. 초하루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을해. 〈왕이〉 보현원(普賢院)으로 이어(移御)하였다.

무인. 하청절(河淸節)이라 하여 왕이 만춘정(萬春亭)에 행차하여 연흥전(延興殿)에서 재추와 시신(侍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에서는 다투어 채붕(綵棚)·준화(樽花)·헌선도(獻仙桃)·포구락(抛毬樂) 등 노래하는 기생이 있는 놀이를 준비하였다. 또 정자의 남쪽 포구에 배를 띄워놓고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서로 시를 주고 받다가[唱和]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정자는 판적요(板積窯)에 있었는데 원래 그곳에 있던 요정(窯亭)을 고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전각이 있었는데 ‘연흥(延興)’이라 하였고, 남쪽에는 시냇물이 좌우로 반회(盤回)하여 흘렀으며 소나무·대나무와 화초가 심겨져 있었다. 그 사이에 또 모정(茅亭)과 초루(草樓) 7채가 있었는데, 편액(扁額)이 붙어있는 것이 4곳으로 영덕정(靈德亭)·수어당(壽御堂)·선벽재(鮮碧齋)·옥간정(玉竿亭)이 있었고, 다리는 금화(錦花)라 하고, 문은 수덕(水德)이라고 하였다. 그 어선(御船)은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임시로 비단을 써 돛을 만들어서 뱃놀이 하는 즐거움을 삼았다.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함을 다하였는데,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낭비하면서 3년 만에야 완성한 것이었다.

경진. 〈왕이〉 장흥원(長興院)으로 이어(移御)하면서 시를 짓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화답하여 바치게 하였다.

임오. 왕의 동생인 승려 충희(冲曦)가 청녕재(淸寧齋)에서 왕을 위하여 향연(享宴)을 베푸니, 각예(覺倪) 및 시신(侍臣)도 불러서 함께 마셨다. 저녁에는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우고 한밤중이 되도록 감상하며 노닐었다.

계미. 또 청녕재(淸寧齋)에서 연회를 열어 시를 지으면서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여 바치게 하였다.

병술.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정해. 서리가 내렸다.

계사. 승선(承宣) 이담(李聘)의 별서(別墅)에 행차하였다.

5월 무술. 초하루 〈왕이〉 임진현(臨津縣)에 행차하여 강변에 있는 승사(僧舍)에서 묵었다. 다음날 재추(宰樞) 김영윤(金永胤)·서공(徐恭)·이공승(李公升)·최온(崔溫)과 승선(承宣) 이담(李聃)·허홍재(許洪材)·김돈중(金敦中) 등과 더불어 남강(南江) 중류에 배를 띄우고 연안을 따라 소요하며 온종일 즐겼다. 사간(司諫) 임종식(林宗植)과 시어(侍御) 고자사(高子思)가 느지막해서야 부름을 받고 연향에 나아갔다. 한밤중이 되어 왕이 보현원(普賢院)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시종(侍從)들이 따르지 않았고, 고자사도 취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임인. 〈왕이〉 이담(李聃)의 별서(別墅)로 이어(移御)하였다.

무신. 〈왕이〉 보현원(普賢院)으로 이어(移御)하였다.

기유. 〈왕이〉 자효사(慈孝寺)에 행차하였다.

계축. 〈왕이〉 장단현(長湍縣) 응덕정(應德亭)에 행차하였다. 배 위에 채붕(綵棚)을 엮고 여악(女樂)과 잡희(雜戱)를 태웠는데, 배를 강에 띄워 중류에 가니 19척이나 되었으며, 전부 채색비단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왕이〉 좌우 행신(倖臣)들과 연회를 즐기며 놀다가 5경(五更)이 되자 서쪽 연안에 올라 표적을 설치한 후 그 위에 촛불을 설치하고, 좌우를 시켜 활을 쏘게 하였으나 적중하는 자가 없었다. 내시(內侍) 노영순(盧永醇)이 말하기를, “성인께서 적중시키기를 기다린 후 신 등이 이를 맞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쏘아 촛불을 맞히니, 좌우가 만세를 불렀다. 이담(李聃)이 뒤따라 이를 맞히자 능라견(綾羅絹)을 하사하였다. 2일 동안 체류하며 수희(水戱)를 관람하였다.

정사. 응덕정(應德亭)에서 등촉을 밝히고 배에 올라 각종 악무를 즐겼으며, 황낙정(皇樂亭)을 지나면서는 술자리를 벌이다가 밤에 보현원(普賢院)에 이르렀다.

신유. 〈왕이〉 만춘정(萬春亭)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밤이 되어서는 이담(李聃)의 별서(別墅)에 들었다.

임술.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들어가 거둥하였다.

병인.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돌아왔다.

6월 무진.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이윽고 이담(李聃)의 별서(別墅)로 행차하였다.

경오. 〈왕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성동(城東)의 사천(沙川) 용연사(龍淵寺) 남쪽에 수 길[仞] 높이 깎아지른 듯이 솟은 호암(虎巖)이라는 석벽(石壁)이 있어 흘러가는 물이 머무르고 모이는데다가 수목(樹木)이 울창하다는 것을 듣고, 내시(內侍) 이당주(李唐柱)와 배연(裴衍) 등에게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게 하고 이름을 ‘연복(延福)’이라 하였다. 진기한 꽃과 나무를 네 모퉁이에 줄을 지어 심어놓았으며, 수심이 얕아 배를 띄울 수 없자 제방을 쌓아 호수를 만들었다. 그 땅이 흰 모래인 데다가 물살이 거세어 비만 오면 곧 무너졌는데, 무너지는 대로 곧 보수하여 밤낮으로 쉬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이 날 〈왕은〉 재상 및 시신(侍臣)과 더불어 정자 위에서 연회를 벌이고 지극히 즐긴 후 파하였다.

경진. 〈왕이〉 돌아와서 관북궁(館北宮)으로 거둥하였다.

가을 7월 정유.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였다가 이윽고 현화사(玄化寺)에 거둥하였는데, 말을 급히 달려 달령(獺嶺) 다원(茶院)에 이르니 호종하는 신하가 모두 뒤따르지 못하였다.

8월 무신. 〈왕이〉 귀법사(歸法寺)로 이어(移御)하였다.

기미. 〈왕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다.

갑자. 어가(御駕)가 가돈원(加頓院)에 이르자, 광주(廣州)에서 의위악부(儀衛樂部)를 갖추어 영접하면서 이어 말 2필, 견여(肩輿) 1채, 양산(陽傘) 3자루를 바쳤다.

9월 을축. 〈왕이〉 남경(南京)에 들어가 거둥하자, 유수관(留守官)이 예를 갖추어 어가를 영접하고 양산(陽傘) 2자루와 말 2필, 소 1두를 바쳤다.

이날 밤에 내시(內侍) 및 중방(重房)에 명하여 활쏘기를 하도록 하고, 적중한 자에게 능견(綾絹)을 하사하였다.

기사. 〈왕이〉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문수사(文殊寺)·장의사(藏義寺) 등의 절에 행차하였다.

경오. 연흥전(延興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고, 각각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였다. 이날 남경(南京)을 출발하였다.

계유. 파평현(坡平縣)의 강에 이르러 배 안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시신(侍臣)은 모두 취하여 예의를 잃었으며, 추밀원사(樞密院使) 이공승(李公升)은 어가(御駕) 앞에서 쓰러져 실려 갔다.

을해. 왕이 개경에 돌아와 〈참형과 교수형〉 2죄(二罪) 이하의 죄인에 대하여 사면하고 조서를 내려 명산(名山)·대천(大川)에 작호(爵號)를 더하였다. 안팎의 80세 이상 노인, 독폐질(篤廢疾)·환과(鰥寡)·고독(孤獨)·효순(孝順)·절의(節義)·효제(孝弟)·역전(力田)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모두 물품을 하사하였다. 남경(南京) 행차 때 어가(御駕)를 호위한 군장(軍將) 및 예령(睿令) 양전(兩殿) 시위원장(侍衛員將)·시학공자(侍學公子)에까지 모두 관직을 더하여 주었다.

겨울 10월. 기해 〈왕이〉 나가서 용흥사(龍興寺)에 거둥하였다.

병오. 〈왕이〉 흥왕사(興王寺)로 이어(移御)하였다.

11월 무진. 〈왕이〉 행생원(幸生院)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예빈소경(禮賓少卿) 최현(崔儇)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는데, 〈이는〉 지난해 야율성정(耶律成正)을 보내 온 것에 대한 답례였다.

경진 금(金)에서 소부감(小府監) 이위국(李衛國)을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