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의종(毅宗) 22년
의종2(毅宗二) 의종(毅宗) 22년
〈무자〉 22년(1168) 봄 정월 갑자. 초하루 〈왕이〉 관북궁(館北宮)에 나아가 조하를 받고 시를 지어 유신(儒臣)에게 보였다.
정축.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인.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밤을 새고 이튿날 한낮에 이르러서야 파하였다.
경진. 〈왕이〉 흥왕사(興王寺)로 이어(移御)하였다.
갑신. 〈왕이〉 유곶강(㹨串江) 서재(書齋)로 이어(移御)하였다.
병술. 〈왕이〉 환궁하였다.
기축. 강양백(江陽伯) 왕감(王瑊)의 딸을 태자비(太子妃)로 삼았다.
계사. 왕이 꿈 속에서 지은 시(詩)를 여러 신하에게 보였다. 그 마지막 연에 이르기를, “인은(仁恩)으로 윤택하게 나라를 다스리니 삼한(三韓)의 태평이 지극하도다.”라고 하자 신료들이 칭하(稱賀)하였다.
2월 을미. 선경전(宣慶殿)에서 1,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신축.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정미. 강양백(江陽伯) 왕감(王瑊)을 올려 후(侯)로 삼았다.
3월 신미. 〈왕이〉 경명궁(慶明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정축.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당시 왕의 동모제(同母弟)인 익양후(翼陽侯)와 평량후(平凉侯)가 자못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게 되자, 왕은 변란이 있을까 우려하여서 이어(移御)하여 난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경진. 어가(御駕)가 평주(平州) 숭수원(崇壽院) 서정(西亭)에 이르자, 재상과 시신(侍臣)을 불러 술자리를 열고는 남계(南溪)에 작은 배를 띄워 놓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놀며 감상하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임오. 〈왕이〉 황주(黃州) 동선역(洞仙驛)에 머물면서 벽파정(碧波亭)에서 연회를 하고, 다시 배를 남계(南溪)에 띄워 놓고 밤중까지 연회를 하며 즐겼다. 악공 및 잡희에게 사람마다 백금(白金) 3근씩을 하사하였다.
을유. 〈왕이〉 서경(西京)에 이르렀다.
병술. 〈왕이〉 태조(太祖) 진전(眞殿)에 배알하였다.
정해. 〈왕이〉 내전(內殿)에서 반승(飯僧)하였다.
무자. 〈왕이〉 관풍전(觀風殿)에 거둥하여 하교(下敎)하여 말하기를,
“짐이 듣건대, 호경(鎬京)은 만년토록 쇠하지 않는 땅이기에 후대의 왕이 이곳에 임어(臨御)하여 새로운 교화를 내려 반포하면 국풍(國風)이 맑고 밝아지며 백성들이 평안할 것이라 하였다. 짐이 국정을 맡은 이래 만기(萬機)가 실로 번거로워 미처 순행하여 올 겨를이 없었다. 이제 일관(日官)이 아뢴 바에 따라 이 도읍에 행차하여 왔으니, 장차 낡은 것을 혁신하고 새로운 것을 세워 왕화(王化)를 부흥하고 옛날 성조(聖祖)께서 권계(勸戒)한 유훈(遺訓)을 채용하여 당면한 폐해가 되는 사무를 바로잡아 새로운 명령을 반포하노라.
하나, 음양(陰陽)을 봉순(奉順)하라. 근래 호령(號令)을 내어 시행하였는데 오히려 음양과 괴리되어서 이에 추위와 더위가 질서를 잃으니 백성들과 만물이 불안해하였다. 지금 이후로는 봄과 여름에 상을, 가을과 겨울에는 형벌을 행할 것이며 무릇 행사(行事)할 바는 일체 월령(月令)에 의하도록 하라.
하나, 불사(佛事)를 숭중(崇重)하라. 지금은 말계(末季)에 해당하는 때로 불법(佛法)이 점차로 쇠하고 있다. 무릇 조종 대에 비보사사(裨補寺社)를 개창하였으니 옛날부터 규정하여 행해 온 법석사원(法席寺院)과 함께, 별도로 은혜를 비는 사사(寺社) 중에서 잔폐한 곳이 있으면 주무 관서에서는 곧바로 수리하도록 하라.
하나, 승려[沙文]는 귀경(歸敬)하도록 하라. 근래에 승도들이 삶을 탐하여 모리(謀利)하는 것이 그 누구든 모두 그러하니 이제 혼탁한 자를 몰아내고 청렴한 이를 드러내어 그 폐단을 구하고자 한다. 도가 맑고 높은 승도로 산림에 은둔하여 있는 자를 소재관(所在官)이 탐방하여 천거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나, 삼보(三寶)를 보호하라. 사찰에 있는 진기한 보물과 쌀·보리가루 및 기타 물품들을 근래에 내시원(內侍院) 및 여러 관아에서 비용(費用)이라 아뢰어 취하니 승도들이 한탄하며 원망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헌대(憲臺)에서 두루 잘 타일러 금단(禁斷)하도록 하라.
하나, 선풍(仙風)을 준수하고 숭상하라. 옛날 신라에서는 선풍(仙風)이 크게 행하여져서 이로 말미암아 용천(龍天)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백성과 만물이 안녕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조종(祖宗) 이래 그 선풍을 숭상한 지가 오래되었다. 근래에 양경(兩京)의 팔관회(八關會)가 날로 예전의 격을 잃어 유풍(遺風)이 점차 쇠하고 있다. 지금부터 팔관회에서는, 양반(兩班)으로 가산(家産)이 풍족한 자를 미리 골라 정하여 선가(仙家)로 삼고 고풍(古風)대로 행함으로써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모두 기쁨을 다 누리도록 하라.
하나, 민물(民物)을 구휼하라. 나라에서는 동·서 대비원(東西大悲院)과 제위보(濟危寶)를 특별히 설치하여 궁민(窮民)을 구제하고 있으나 근래 이 관서를 맡은 자가 대부분 적임자가 아닌 까닭에 혹 기근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자나 질병으로 의탁할 곳이 없는 자들이 있어도 능히 모아서 구휼하지 못하고 있다. 과인(寡人)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지금부터 이부(吏部)에서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뽑아 이를 맡도록 하고 헌대(憲臺)로 하여금 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찰하여 권징(勸懲)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교서가 내리자 백관이 뜰에서 하례하였다. 이날 청원루(淸遠樓)에서 재추와 근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서로 창화하며 즐겼다.
여름 4월 계사. 〈왕이〉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하고는 남포(南浦)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재추와 근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정유. 〈왕이〉 홍복사(洪福寺)에 행차하였다가 또 다경루(多景樓)에서 연회를 베풀고는 수희(水戱)를 한 사람들에게 백금(白金) 2근을 하사하였다.
기해. 선지(宣旨)하여 말하기를,
“서도(西都)는 곧 조종(祖宗)께서 순행하여 머무시던 땅이다. 을묘년(乙卯年, 1135)의 난을 겪은 뒤로 국가에 많은 일이 있어 여러 해 동안 순어(巡御)하지 못하였다. 이제 낡고 더러운 옛 풍속을 모두 함께 새롭게 하고 또한 왕업을 보호하고 연기(延基)하려 이 도읍에 행차한 것이다. 어가(御駕)를 영접할 때 잘못을 저질러 유사(有司)가 체포한 자, 공도(公徒)·사장(私杖) 이하와 속동(贖銅)·징와(徵瓦)에 해당하는 자들을 아울러 모두 석방하라. 또 을묘년의 난에 연좌되어 남쪽으로 유배된 자도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고, 각 영부(領府) 및 삼위군(三衛軍)으로 어가(御駕)를 영접할 때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대창(大倉) 전해고(典廨庫)의 쌀을 한 사람당 1석씩 지급하라.”
라고 하였다.
경자. 장락전(長樂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임인. 〈왕의 생신날인〉 하청절(河淸節)이라 하여 또 장락전(長樂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갑진. 〈왕이〉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였다가 대동강(大同江)에서 배를 띄웠다.
을사. 부벽루(浮碧樓)에 거둥하여 신기군(神騎軍)의 농마희(弄馬戱)를 관람하고는 백금(白金) 2근을 하사하였다.
병오. 또 부벽루(浮碧樓)에 거둥하여 수희(水戱)를 관람하고는 백금(白金)과 포물(布物)을 하사하고, 배 위에서 재추와 시신(侍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한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가을이 되어서야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왔다.
겨울 11월 갑술. 금(金)에서 완안정(完顔靖)을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축. 탐라안무사(耽羅安撫使) 조동희(趙冬曦)가 입근(入覲)하였다. 탐라(耽羅)까지는 험준하고 멀어 공전(攻戰)이 미치지 않는 곳인데다 토지가 기름져서 나라의 재정에 충당되었다. 이보다 앞서서는 공부(貢賦)가 번다(煩多)하지 않아 백성들이 생업에 즐거워하였는데 근자에 들어와 관리들이 불법을 행하고 도적의 우두머리 양수(良守) 등이 모반하여 수령을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왕이 조동희(趙冬曦)에게 명하여 지절(持節)로 선유(宣諭)하게 하자 적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양수(良守) 등 두 명과 그 무리 5인을 참수하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곡식과 포백(布帛)을 내려 이들을 위무하였다.
이 달에 예빈소경(禮賓少卿) 서추(徐諏)를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12월. 사재소경(司宰少卿) 진현광(陳玄光)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게 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 최윤서(崔允偦)에게는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