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의종(毅宗) 24년
의종3(毅宗三) 의종(毅宗) 24년
〈경인〉 24년(1170) 봄 정월 임자. 초하루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 신하들의 신년 하례 표문(表文)을 직접 지어 여러 신하에게 보여주었다. 표문에 이르기를,
“삼양(三陽)이 올해 차례가 되니 만물에 생기가 새롭고, 옥으로 꾸민 아름다운 궁전[玉殿]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龍顔)에 기쁨이 어렸도다. 사물의 근원을 체득하여 혜택을 베풀며, 모든 복을 누리어 대화합을 이루었으니 이는 곧 대인(大人)이 도를 닦는 첫 걸음이요 양기(陽氣)가 싹트는 시초로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요(堯)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福)이 모여들어 끊임없이 날마다 새롭고 옥체가 건강하여 다달이 무궁하리로다. 인자함이 넘치고 도(道)가 풍부하여 한 가지도 하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한 것이 없으며, 문화를 숭상하고 무력을 쓰지 않음으로 실로 만세의 무궁한 행복을 누리도다. 만물이 편안하고 태평한 때[交泰之時]를 당하여 닥쳐올 경사가 끝없으리라. 대궐[北闕]에 안녕을 빌고 남산(南山)에 나라의 장수를 축원하기 위하여 만방(萬邦)에서 앞을 다투어 주옥과 비단을 바치며 육지와 수로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뒤떨어지는 사람이 없도다. 좋은 날에 축하를 받으시니 더욱더 복을 받으시리. 하물며 요즈음 정무가 많은데도 저희를 만날 겨를을 주시며, 사신(詞臣)과 더불어 즐겨 사륙체(四六體)의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 보이고, 친히 가까이 앉아 시서(詩書)와 경사(經史)의 미묘한 뜻을 강론하나이다. 북방 사신이 와서 축수의 잔을 올리며 동방 먼 곳[日域]에서도 보물을 바치어 황제를 칭송하도다. 언제나 천지신명의 은덕[密助]을 입어 행복과 경사는 매양 냇물처럼 증대하고, 세상에 드문 새로운 상서(祥瑞)를 열어 임금의 통일이 이루어졌도다. 폐하의 아름다운 덕을 신하들이 칭송하니 이는 역사에 빛날 것이며 백성이 생긴 이래로 오늘에 비교할 〈성대한〉 때가 없었도다. 신들이 태평세월을 만나[涵泳明時] 천자의 위엄을 우러러 뵙고자 대궐[北辰之所]에 모였습니다. 여섯 가지의 음률을 아홉 번 연주하는 것은 비록 옛날 조간자(趙簡子) 때의 의식이기는 하나 어찌 만세를 세 번 불러 폐하의 장수를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백관(百官)이 표문을 올려서 하례하였다.
이날 〈왕이〉 봉원전(奉元殿)에 거둥하여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편을 강론하였다.
병인. 연등회(燃燈會)가 있었으므로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기묘.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가서 화엄회(華嚴會)를 열고 친히 부처에게 바치는 발원의 글[佛䟽]을 친히 지어 문신들에게 보여주자 백관(百官)이 찬양하는 표문을 올렸다.
신사. 〈왕이〉 궁으로 돌아와 제왕(諸王)에게 명하여 광화문(廣化門) 좌우편 행랑에 채색장막[綵幕]을 치게 하였다. 관현방(管絃房)·대악서(大樂署)는 채색장막[綵棚]을 치고 온갖 놀이판으로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는데, 모두 금은(金銀)·주옥(珠玉)·금수(錦繡)·나기(羅綺)·산호(珊瑚)·대모(玳瑁) 등으로 꾸며 기묘하고 사치스럽기가 이전에 비할 바가 없었다. 국자학관(國子學官)이 학생을 이끌고 나와 노래[歌謠]를 바치니 왕이 수레를 멈추고 음악을 구경하다가 밤 3경(三庚)이 되어서야 궁궐로 돌아왔다. 승선(承宣) 김돈중(金敦中)·노영순(盧永醇)·임종식(林宗植) 등이 봉원전(奉元殿)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여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새벽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대원공(大原公) 왕효(王侾)가 사망하였다.
2월 임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허홍재(許洪材)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최온(崔溫)을 판중군병마사(判中軍兵馬事)로 임명하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서순(徐醇)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광진(李光縉)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임명하였다.
갑진. 〈왕이〉 연복정(延福亭)으로 행차하여 허홍재(許洪材)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복기(李復基), 기거주(起居注) 한뢰(韓賴) 등을 불러 배를 띄우고 종일 잔치를 벌이고, 화평재(和平齋)로 가서 머물렀다.
갑신. 낭성(狼星)이 남극에 나타나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 박순하(朴純嘏)가 노인성(老人星)이라 여기고 역마를 띄워 〈왕에게〉 보고하였다.
신해.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3월 을묘. 〈왕이〉 연복정(延福亭)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사. 왕이 서강(西江)으로 놀러가려 하였더니 꿈에 어떤 부인이 문에 서서 고하기를, “왕이 만일 서강에서 노시려거든 반드시 5월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잠을 깨어 놀러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경신. 〈왕이〉 허홍재(許洪材)·이복기(李復基)·한뢰(韓賴)·김돈중(金敦中) 등과 함께 뱃놀이하며 간단하게 잔치[曲宴]를 벌였다.
임술. 〈왕이 허홍재(許洪材)·이복기(李復基)·한뢰(韓賴)·김돈중(金敦中) 등과 함께 뱃놀이하며 간단하게 잔치를 벌였던 것처럼〉 또 그렇게 하였다.
을축. 또 배에서 잔치를 벌이고 밤중에 현화사(玄化寺)로 행차하다가 도중에 큰 비를 만나자 말을 달려 도착했다.
기사. 지문하성사 최온(崔溫)을 서경(西京)의 노인당(老人堂)에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우부승선(右副承宣) 임종식(林宗植)을 해주(海州)의 상산(床山)에 파견하여 노인성(老人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릇 서울이나 지방의 노인당이 있는 곳에는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신사. 초하루 〈왕이〉 친히 내전(內殿)에서 노인성(老人星)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갑신.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 최광균(崔光鈞)이 아뢰기를, “지난 달 28일에 죽장사(竹杖寺)에서 노인성(老人星)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날 저녁에 노인성[壽星]이 나타났다가 술잔을 세 번 올린 뒤에야 사라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백관(百官)은 축하를 올렸다.
임진. 〈왕이〉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배를 띄워 시신(侍臣)들에게 잔치를 벌였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병신. 대궐 안의 6개 기관[禁內六官]의 문신들이 표문을 올려 노인성[壽星]이 다시 나타난 것을 하례하자 왕이 술과 과일을 내려주었다.
을사. 노인성[壽星]이 다시 나타난 것과 관련하여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복원궁(福源宮)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게 하고, 평장사(平章事) 허홍재(許洪材)는 상춘정(賞春亭)에서 초제를 지내게 하였으며, 좌승선(左承宣) 김돈중(金敦中)은 충주(忠州)의 죽장사(竹杖寺)에서 초제를 지내게 하였다. 왕이 친히 노인성에 초제를 지내기 위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김우번(金于蕃)·낭중(郞中) 진역승(陳力升)에게 명하여 진관사(眞觀寺) 남쪽 산기슭에 노인당을 짓게 하고, 또 별은기소(別恩祈所)를 세워 금꽃·은꽃과 금그릇·옥그릇을 만들게 하였다.
무신. 〈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다.
5월 신해. 초하루 〈왕이〉 화평재(和平齋)에서 문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밤이 되도록 시를 지어 읊으면서 내시(內侍) 황문장(黃文莊)에게 명하여 붓을 들어 쓰도록 하니, 여러 신하가 왕의 성덕(聖德)을 찬양하며 ‘태평성대의 글 좋아하는 임금님[大平好文之主]’이라고 하였다.
무진. 〈왕이〉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밤에 배를 띄우고 시신(侍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경오. 〈왕이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밤에 배를 띄우고 시신(侍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던 것처럼〉 또 그렇게 하였다.
정축. 〈왕이〉 염현사(念賢寺)로 거처를 옮겼다.
윤5월 신사.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연복정(延福亭)으로 돌아와 밤에 시신(侍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계미. 〈왕이〉 내시(內侍) 전중감(殿中監) 김천(金闡)에게 명하여 연복정(延福亭)에서 잔치를 열게 하고, 재추(宰樞)·승선(承宣)·대간(臺諫)과 함께 배를 띄워 취하도록 즐기며 밤새도록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여러 신하가 모두 크게 취하여 모자에 꽃을 잔뜩 꽂은 채 수레에 거꾸로 실려 물러나왔다.
정해. 왕이 궁궐로 돌아왔는데, 노인성[壽星]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하례를 받기 위해서였다.
경인. 〈왕이〉 대관전(大觀殿)에 거둥하여 하례를 받고, 이어 문무(文武) 상참관(常參官) 이상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왕이 친히 악장(樂章) 5수(首)를 지어 악공(樂工)에게 노래하게 하였으며 채색장막을 치고 온갖 놀이를 벌이다가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잔치에 참여한 관리에게 각각 말 1필을 하사하였으며, 이날 밤에 또 한뢰(韓賴)·이복기(李復基)를 데리고 편전(便殿)에서 간단히 잔치[曲宴]를 벌이고, 특별히 홍정(紅鞓)과 서대(犀帶)를 하사하여 각별한 총애를 나타냈다.
임진. 〈왕이〉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눈에 띄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상서로운 것이라 하였다. 쑥[蓬艾] 3줄기가 정자에서 난 것을 서초(瑞草)라고 하였고, 내시(內侍) 황문장(黃文莊)은 물새를 현학(玄鶴)이라고 하면서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왕이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이어 친히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즉석에서 〈황문장을〉 정언(正言)으로 임명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국자박사 직한림원(國子博士 直翰林院)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병신. 왕의 손자가 태어나자 왕이 기뻐하여 금(金)에 사신을 보내려고 즉시 동문원(同文院)에 명하여 첩문를 보내어 금의 지휘를 기다리게 하였다. 금의 임금[金主]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그 나라에 뒤를 이을 왕손이 태어났으니 진실로 경사로운 일이다. 이 일을 알리려고 한다 하는데, 내가 그 충성스럽고 근실함[忠勤]은 알겠으니, 번거롭게 멀리까지 사신을 보내지 말라.”
라고 하여 일은 시행되지 않았다.
병오. 배에서 가벼운 잔치[曲宴]를 열었다.
6월 경술. 초하루 연복정(延福亭)의 남쪽 제방이 터졌으므로 〈왕이〉 다시 쌓으라고 명령하였다.
무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군졸들의 힘이 다하여 제방을 쌓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고을에서 장정을 징발하여 이를 쌓도록 하라. 수문(水門) 4, 5개를 내고 제방 위에는 정자를 세우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으라.”라고 하였다.
계유. 〈왕이〉 보현원(普賢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을 7월 기묘. 초하루 일식이 일어났다.
경진. 왕이 허홍재(許洪材)·이복기(李復基)·한뢰(韓賴) 등과 함께 보현원(普賢院) 남쪽 시내에 배를 띄우고 술자리을 벌이며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였다.
임오. 또 간단한 잔치[曲宴]를 열었다.
갑신. 이복기(李復基)가 개인적으로 왕에게 의복과 보물, 술과 고기, 육포(肉脯)와 과일 등을 바치자, 밤에 왕이 배를 띄우고 재추(宰樞)와 시신(侍臣)들에게 잔치를 열었는데, 이복기(李復基)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 그대와 같은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을유. 〈이복기(李復基)가 개인적으로 왕에게 의복, 보물, 술과 육포(肉脯), 과일 등을 바치자, 왕이 밤에 배를 띄우고 재추(宰樞)와 시신(侍臣)을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이복기(李復基)를 돌아보고는,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 그대와 같은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는가?”라고 하였던 것처럼〉 역시 그렇게 하였다.
갑오. 허홍재(許洪材)를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 同平章事)로, 최온(崔溫)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광진(李光縉)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양순정(梁純精)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하였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서순(徐淳)을 좌천시켜 상서좌복야 판비서성사(尙書左僕射 判秘書省事)로 임명하였는데, 서순(徐淳)은 사람이 순박하고 정직하여 가식이 없었으며 〈왕의〉 측근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이복기(李復基)에게 밉보인 탓이었다. 밤에 〈왕이〉 배를 띄우고 허홍재(許洪材) 및 여러 시신(侍臣)들과 함께 간단한 잔치[曲宴]를 열었다.
8월 무신. 초하루 연복정(延福亭)의 남쪽 제방이 또 터지자 군졸을 많이 징발하여 막게 하였는데, 온 거리에 원성이 자자하였다.
무오. 〈왕이〉 동강(東江)의 서재(書齋)에 행차하였다. 수주(水州) 농민이 밭을 갈다가 금 한 덩이를 얻었는데 길이가 두 치(寸) 가량이고 머리와 꼬리가 뾰족하여 마치 거북이 같았다. 지주사(知州事) 오록지(吳錄之)가 이것을 가지고 급히 달려와 〈왕에게〉 바치자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보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금 거북이를 내린 것은 성덕(聖德)에 감응해서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병자. 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흥왕사(興王寺)로 갔다.
정축.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는 길에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侍臣)을 불러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자 좌우 신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이 땅에서는 병법을 익힐 만하도다.”라고 하였다.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하였다. 저물 무렵 어가(御駕)가 보현원(普賢院)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이 앞질러 가서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순검군(巡檢軍)을 모았다. 왕이 원문(院門)에 막 들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려는데 이고(李高) 등이 임종식(林宗植)·이복기(李復基)·한뢰(韓賴)를 죽였으며, 왕을 모시던 문관 및 대소 신료(臣僚)·환관[宦寺]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또 개경에 있던 문신 50여명도 살해되었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9월 무인. 초하루 포시[哺時, 오후 3~5시]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으로 들어가자,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모시던 내시(內侍) 10여 인과 환관(宦官) 10인을 수색해서 살해하였다.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태연자약하게 영관(伶官)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밤중에야 잠이 들었다. 이고(李高)와 채원(蔡元)이 왕을 시해하려고 했으나 양숙(梁淑)이 막았다. 순검군(巡檢軍)이 창과 벽을 뚫어서 내탕(內帑)의 귀한 보물을 훔쳤다. 정중부(鄭仲夫)가 왕을 협박하여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기고, 태자(太子)는 영은관(迎恩館)으로 옮겼다.
기묘. 왕이 혼자 말을 타고 거제현(巨濟縣)으로 쫓겨 가고, 태자(太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되었다.
이날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이하여 왕위에 앉혔다.
명종(明宗) 3년(1173) 8월 김보당(金甫當)이 사람을 보내어 왕을 모셔다가 계림(雞林)에 살도록 하였는데,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나이는 47세로서 왕위에 25년간 있었고 왕위에서 밀려난 지 3년만이었다. 시호(諡號)는 장효(莊孝)이고 묘호(廟號)는 의종(毅宗), 능호(陵號)는 희릉(禧陵)이다. 고종(高宗) 40년(1253)에 강과(剛果)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사신(史臣) 김양경(金良鏡)이 찬술하기를,
“옛날 후당[唐] 명종(明宗) 때에 대리소경(大理少卿) 강징(康澄)이 상소하여 당시의 정치를 논하며 말하기를, ‘국가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다섯 가지요, 매우 두렵게 생각해야 할 것이 여섯 가지입니다. 해·달·별[三辰]이 제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천문[天象]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또 소인(小人)들의 잘못된 말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고갈되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수해·한재·충해[水旱虫蝗]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진 선비가 〈쓰이지 못하고〉 숨어 지내는 것은 깊이 두려워해야 하며 염치와 도덕이 없어지는 것은 깊이 두려워해야 하고, 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잘못을 감싸주는 것은 매우 두려워해야 하며, 비방과 칭찬이 구별되지 못하는 것[毁譽亂眞]은 깊이 두려워해야 하고, 바른 말이 들리지 않는 것도 깊이 두려워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구양공(歐陽公)이 이를 기록하며 말하기를, ‘무릇 국가를 통치하는 자로서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옳구나! 이 말이여.’라고 하였다.
무릇 왕이 불교를 숭상하고 신령들을 경건히 받든 나머지 경색(經色)·위의색(威儀色)·기은색(祈恩色)·대초색(大醮色)을 별도로 세웠으며, 재초(齋醮)의 비용을 함부로 징수하여 구차하게 부처와 귀신을 섬겼다. 게다가 간악하고 아첨하는 이복기(李復基)·임종식(林宗植)·한뢰(韓賴) 등을 좌우에 두고, 간사한 정함(鄭諴)·왕광취(王光就)·백자단(白子端) 등과 같은 자들을 내시[內宦]로 두었으며, 구차스럽게 아첨하는 영의(榮儀)·김자기(金子幾) 등과 같은 자들을 술사(術士)로 두었다. 〈왕이〉 총애하는 첩 무비(無比)가 궁내에서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왕의 비위를 맞추려 갖은 아첨을 다하였다. 교묘한 말이 그득하고 충직한 말은 끊어져, 변란이 임금[輦轂]의 눈앞에서 일어났지만 마침내 알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막상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환란이 발생한 초기에 어느 한 사람도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가 없었으니 더욱 탄식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