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인종(仁宗) 원년
인종1(仁宗一) 원년
〈계묘〉 원년(1123) 봄 정월 갑자. 송(宋)에서 지첩사(持牒使) 허립(許立)이 왔다.
기사. 왕이 친히 순복전(純福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오.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경진. 왕이 친히 건덕전(乾德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임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이자량(李資諒)이 죽었다.
2월 갑오. 왕이 친히 대궐 뜰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술.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계묘.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가 장원정(長源亭)으로 옮겼다.
3월 병자. 죄수를 재심하였다.
여름 4월 정해.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계사. 예종(睿宗)의 소상(小祥)이라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가서 분향하였다.
계묘. 변순부(卞純夫) 등을 급제시켰다.
기유. 왕이 친히 우제(虞祭)를 지냈다.
경술. 김연(金緣)을 판비서성사 감수국사(判秘書省事 監修國史)로 임명하였다.
임자.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5월 정사. 가뭄 때문에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여 거처하였고, 승려들을 내전(內殿)에 모아 놓고 불경을 강독하며 비를 빌게 하였다.
기미.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계해. 죄수를 재심하였다.
갑자. 토룡(土龍)을 만들어 놓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게 하였다.
왕이 구산사(龜山寺)에 행차하였다.
기사/ 회경전(會慶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며 비를 빌었다.
6월 계미.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을유.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使) 박경린(朴景麟)이 여진(女眞)의 병선(兵船) 30척이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잘못 보고하여 가발병마판관(加發兵馬判官) 양제보(楊齊寶) 등을 더하여 파견하였다. 경주(慶州)까지 갔으나 적군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갑오. 송(宋)에서 국신사(國信使) 예부시랑(禮部侍郞) 노윤적(路允迪)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부묵경(傅墨卿)이 왔다.
경자. 왕이 회경전(會慶殿)에서 송(宋) 황제가 보낸 조서(詔書)를 받았다.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가 왕위를 이어받아 겨우 조심스럽게 국사를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멀리서 들었다. 살펴보니 왕위를 계승한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선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열심히 힘쓰는 것인데, 갑자기 닥친 변고 때문에 매우 크게 상심하였을 것이다. 이에 급히 사신을 보내 선대의 어진 성왕(聖王)을 잇는 후계자[象賢]임을 유시(諭示)하고 예물을 내려서 애도와 더불어 영광의 뜻을 나타낸다. 마땅히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에 복종하며, 제후로서의 법도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卿)에게 내리는 예물은 별지 목록과 같다.”
라고 하였다.
계묘. 왕이 선왕의 혼당(魂堂)에 나아가 송(宋) 황제가 보낸 제수(祭需)와 위문하는 조서(詔書)를 받았다.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의 선왕은 공손한 몸가짐과 밝은 덕을 지녀 참으로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며 나 한 사람을 잘 보필해 왔다. 천명을 알기 어려워 갑자기 부고를 알려오니, 〈그대가〉 어버이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끝이 없을 것임을 짐작한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한 초반에 국가를 잘 다스리는 일이 모두 그대에게 속하였으니, 슬픔을 억제하려는 생각에 힘쓰고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보내는 제전(祭奠)과 조위(弔慰)하는 예물은 도착하는 대로 수령하라.”
라고 하였다. 〈송 황제가〉 예종(睿宗)을 위해 지은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왕은 순일한 덕을 간직하고 동쪽 땅을 이어받았다. 효성과 우애를 갖추고 정중하며 공손하였으니 천지신명을 따라 선정을 펼쳤으며, 전대의 문덕(文德)이 있는 이의 뜻을 계승하니 사방의 나라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일찍부터 충성이 드러났고 돈독한 의리로 왕을 위하여 힘썼으며, 보낸 공물이 뜰에 가득하고 명령에 복종함이 근엄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왕은 바다 한 모퉁이의 외지에 있으면서도 공물을 진상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여 마음이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 큰 업적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돌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사신을 보내 나의 뜻을 알리고 그대의 나라를 잘 진무(鎭撫)하려고 하였는데, 하늘이 아껴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는다 하였는지[天不憖遺] 갑자기 부음을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으며 놀라고 애도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제 그대에게 휼전(恤典)을 내려 그 위업을 기리도록 하고, 덕을 드러내어 그대 나라를 평안하게 하려 한다. 바라건대 내려오시어 내가 보낸 큰 총애를 흠향하고, 후손들에게 영원히 복을 드리워 끝없는 복록을 누리게 하라.”
라고 하였다.
〈송(宋) 사신〉 노윤적(路允迪) 등이 왕에게 보고하여 아뢰기를,
“황제께서 선대의 국왕이 훙서하고 다음 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사신을 보내 제물을 올리게 하셨습니다. 조위(弔慰)하는 조서(詔書)와 제문(祭文)은 모두 황제께서 직접 지은 것입니다. 원풍(元豊) 연간에 보낸 조위하는 제문과 조서가 단지 관례적인 것이었다면 이번의 예우는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대관(大觀) 연간에 보낸 조서에서는 특별히 임시라는 뜻의 권(權)자를 쓰지 않고 정식 국왕으로서의 예우를 보이셨습니다. 이번의 친서에서도 또한 특별한 은혜를 보이셨습니다. 다만 선왕께서는 이미 요(遼)의 책명(冊命)을 받았기 때문에 휘(諱)를 피하였지만, 지금은 요의 운명이 이미 다하였으니 〈송의〉 조정에 〈책봉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조상대대로 중국의 문화를 기꺼이 사모하였소. 더욱이 나의 선왕께서는 예의를 다하여 큰 나라를 섬기고 충실히 제후로서의 직무를 다하였으며, 비록 바다 밖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송〉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천자께서는 이를 환히 보고 여러 차례 은택을 더하였소. 지금 또 손수 제문까지 지어 각별한 은총을 보였소. 나의 직함에서 또 권(權)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으니, 비록 선고께서도 일찍이 이런 예우를 받기는 하였지만 소자(小子)에게 어찌 가당한 일이겠는가? 책명이라는 것은 천자가 제후를 포상하는 큰 의례인데, 지금 아직 상(喪)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큰 의례를 요청하는 것은 예의상 미안하니 실로 황공하고 부끄러울 뿐이오. 이듬해가 되면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면서 아울러 작은 정성이라도 전하고자 하오. 공들께서 이런 사정을 잘 아뢰어 주기 바라오.”
라고 하였다.
갑진. 죄수를 재심하였다.
무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가을 7월 신유. 송(宋)의 사신 노윤적(路允迪) 등이 귀국하였다. 왕이 표문(表文)을 부쳐 사의를 표하였다.
임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을축.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김고(金沽)가 사망하였다.
계유. 왕이 친히 건덕전(乾德殿)에서 5일 동안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8월 신사. 초하루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경자. 이자겸(李資謙)을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로 임명하였다.
갑진.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요(遼)에 하칙보(河則寶)를 보내려고 용주(龍州)에서 배를 띄웠으나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9월 을묘. 문경태후(文敬太后)의 기일이므로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가서 분향하였다.
정사. 전국의 중죄인의 형량을 결정하였다.
기미.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병자. 죄수를 재심하였다.
겨울 10월 을유. 왕이 친히 우제(虞祭)를 지냈다.
무자. 회경전(會慶殿)에서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열고, 3만 명의 승려에게 반승(飯僧)을 베풀었다.
11월 임술.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갔다.
12월 임오. 사면령을 내리고 산천에 차례대로 제사를 지냈다. 노인 및 독질자(篤疾者)와 폐질자(廢疾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였다.
병오. 김지화(金至和)를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임유문(林有文)과 최홍재(崔弘宰)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김약온(金若溫)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척준경(拓俊京)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박승중(朴昇中)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김인규(金仁揆)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이자덕(李資德)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