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인종(仁宗) 12년
인종2(仁宗二) 12년
〈갑인〉 12년(1134) 봄 정월 정사. 금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 장호(張浩)를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유.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였다.
을해. 적전(藉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처음으로 대성악(大晟樂)을 사용했다.
무인.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기묘. 정심(淨心)을 삼중대통 지누각원사(三重大統 知漏刻院事)로 삼고, 자줏빛가사를 내렸다.
2월 을유.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해. 연강전(延康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예부터 왕태자를 책봉하면 잔치를 열게 되어 있었으나, 국가가 다사다난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야 행한 것이다.
병신.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계묘. 서경(西京)으로 행차하다가 마천정(馬川亭)에 이르렀는데, 친종장군(親從將軍) 김용(金勇)의 말이 무언가가 있는 듯이 크게 놀라 급하게 달려 어가(御駕) 앞을 지나는 바람에 김용(金勇)이 땅에 떨어져 거의 죽을 뻔했다.
기유. 왕의 어가(御駕)가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 용선(龍船)을 타고 호종(扈從)한 재추(宰樞)와 시신(侍臣) 및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갑자기 북풍이 일어나 배 위에 설치한 장막과 그릇 따위가 모두 흔들리고 날씨가 크게 추워져서 왕이 급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어가를 재촉하여 궁궐로 들어갔다.
3월 갑인. 대화궐(大華闕)로 거처를 옮기려고 어가가 막 출발하려는 참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먼지를 날려서 사람과 말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일산(日傘)을 든 자도 역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왕이 손수 복두(幞頭)를 잡고 궁궐로 들어가니 바람이 약간 잠잠해졌다.
갑자.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정묘.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와서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갔다.
임신.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민간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름 4월 기축.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정유. 임원애(任元敱)를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무인. 서리가 내렸다.
정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5월 경술. 초하루 도성(都省)에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
신유. 허홍재(許洪材) 등을 급제시켰다.
병인.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요즈음 하늘의 변화가 이상하고 가뭄 또한 심하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걱정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너희 3품 이상의 관원들은 각자 봉사(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숨김없이 진술하라.”
라고 하였다.
무진. 여러 왕릉과 종묘사직(宗廟社稷), 산천에 비를 빌었다. 왕이 태조 진전(眞殿)을 알현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하기를,
“신(臣)이 진실로 부덕하여 선왕께서 만든 규범을 따르지 못하였으며, 정치도 하늘과 땅을 기쁘게 하고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데 부족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은 재이(災異)를 내려 3월에 눈이 오고, 4월에는 서리가 내렸으며, 이에 더해 사람과 물건에 벼락이 친 곳이 40여 곳이나 되었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마른 땅이 천 리나 되니 백성들은 삶을 잇지 못하고 굶어 죽는 자들은 서로를 베개로 베고 누웠습니다. 죄는 실로 신에게 있는데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이제 마음을 씻고 잘못을 참회하며 조상님께서 남긴 가르침을 본받으려 합니다. 『시경(詩經)』에서는 ‘부모님과 선조께서는 어찌 차마 저를 보고만 계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조(聖祖)께서는 자애롭게 저희를 보살펴 조화로운 기운을 불러 모으시고 모든 신령들을 고무하시어 크게 비를 내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와 여러 신하들 및 백성들이 함께 그 복을 받게 해 주시면 신령께서도 또한 길이 의지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왕이 대명궁(大明宮)으로 거처를 옮기고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바야흐로 한재(旱災)가 심각하여 농토가 메말라서 풍년의 희망을 잃고 끼니를 걱정하게 될까 두려우며, 무고한 사람들이 잘못된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다. 참형과 교수형에 해당하는 죄인들은 극형을 면제하여 멀리 유배할 것이며 유배형 이하의 죄인들은 모두 면제해주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시장을 옮겼다(徙市).
기사. 다시 우제(雩祭)를 올렸다.
무인. 지진이 일어났다.
6월 기묘. 초하루 무당 250명을 도성(都省)에 모아 비를 빌었다.
동경(東京)에 지진이 일어났다.
경진.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사. 왕이 대명궁(大明宮) 수락당(壽樂堂)에 나아가 한림학사(翰林學士) 김부의(金富儀)에게 명하여 『예기(禮記)』의 「월령(月令)」을 강론하게 하였다.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갑신. 서경의 대화궐(大華闕) 건룡전(乾龍殿)에 벼락이 쳤다.
경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신묘.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계사. 숭문전(崇文殿)에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을 열었다.
갑오. 왕이 수락당(壽樂堂)에 나아가 한림학사(翰林學士)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시경(詩經)』 「칠월편(七月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기해. 왕이 궁궐 마당에서 친히 초제를 지냈다.
가을 7월 갑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예기(禮記)』 「월령편(月令)」을 강론하게 하였다.
경오.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을해. 큰 비가 3일간 내렸다.
이 달에 내시(內侍) 정습명(鄭襲明)을 홍주(洪州) 소대현(蘇大縣)에 보내 운하를 파게 하였다. 원래 안흥정(安興亭) 아래 바닷길은 물살이 몰려 급류를 이루고 또 암초가 험하여 종종 배가 뒤집혔다. 어떤 사람이 의견을 올리기를, “소대현(蘇大縣)의 경계로부터 운하를 파 뱃길을 만들면 선박이 운항하는데 이로울 것입니다.”라고 하자, 정습명을 보내어 부근의 군에서 역졸 수천 명을 뽑아 운하를 팠으나 마침내 완공하지 못하였다.
8월 경진.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자. 왕이 명인전(明仁殿)에 나아가 한림학사(翰林學士) 김부의(金富儀)에게 명하여 『서경(書經)』 「열명(說命)」을 강론하게 하였다.
임인. 산승(山僧) 계응(繼膺)을 불러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하였다.
병오. 차예부시랑(借禮部侍郞) 박경산(朴景山)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천청절(天淸節)을 축하하였다.
9월 정미. 초하루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계축. 왕이 문경태후(文敬太后)의 기일이어서 경천사(敬天寺)에 행차하여 분향하였다.
경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겨울 10월 무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경인. 왕이 국청사(國淸寺)로 거처를 옮겼다.
갑오. 왕이 대명궁(大明宮)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정유.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순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 너희들 22명은 공손하게 명을 받들지어다. 오직 때에 맞아야만 하늘의 이치[天工]에 부합하리라.’라고 하셨다. 대개 공손하게 받들지 않으면 태만하거나 가벼이 생각할 걱정거리가 있게 되고, 때에 맞지 않으면 뒷날에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게으르지 않는다는 것은 공손하게 받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때에 맞추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적당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능히 때에 맞게 공손히 받들어서 하늘의 이치에 부합한다면 공을 이룰 것이다. 이제 듣건대 백관이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대개 업무에 태만히 직책을 소홀히 하여서 조정은 텅비고 정무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국왕이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게 되기 때문에 대신들은 게으르게 되고 모든 일들은 실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은(殷)의 태갑(太甲)은 이윤(伊尹)의 힘을 빌려 나라를 중흥시켰고, 제(齊)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패업(覇業)을 이루었다. 무릇 모든 관료들은 각기 직무상의 능력을 발휘해 동료들과 마음을 합하여 국가의 사업을 성공시킴으로서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여 짐으로 하여금 과오가 없게 해 준다면 나라에 무궁한 경사가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11월 병오. 초하루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신. 원외랑(員外郞) 김영관(金永寬)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것을 사례하였다.
임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이식(李軾)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10월부터 이달까지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12월 무인. 우정언(右正言) 황주첨(黃周瞻)이 묘청(妙淸)과 정지상(鄭知常)의 비위를 맞추느라 왕에게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하자고[建元] 건의하였으나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