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인종(仁宗) 5년

7390882@hanmail.net 2024. 8. 24. 08:02

인종1(仁宗一) 5년

 

〈정미〉 5년(1127) 봄 정월 정유. 금(金)에서 고수(高隨)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경자.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병오. 금(金)의 사신이 귀국하자 왕이 중화전(重華殿)에서 전송하면서 사례의 표문(表文)을 부쳤다.

2월 기사.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김선(金璿)의 딸을 차비(次妃)로 맞아 들였다.

을해.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경진. 왕이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에 참배하였다.

3월 계사. 금(金)에서 김자류(金子鏐)와 유덕문(柳德文)이 귀국하였다. 〈금의 임금이 보낸〉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보낸 표문을 살펴보고, 선유사(宣諭使)를 보낸 것에 대한 사의와 아울러 예물을 올린 사실에 대하여 잘 알았다. 경(卿)은 내가 사신을 보내 설득하기 전에 귀부하기를 원하였고, 사신이 왕래하기 시작한 후에는 더욱 즐거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대국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음을 가상히 여겨 땅을 주는 은택을 베풀었는데, 얼마 전 공물을 보내면서 단지 사의를 표하는 글만 보낼 뿐이었다. 그 글을 받아보고 감탄하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였으나, 오히려 호구에 대해서는 핑계를 대면서 따로 맹서하는 문서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다만 일마다 모두 완수할 것이고 대대로 충성하겠다는 말은 믿겠지만, 내가 지시한 말로 확실히 정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얻은 땅을 장차 무엇으로 증거를 삼겠는가?”
라고 하였다.

간관(諫官)이 아뢰기를,

“김자류(金子鏐)가 금(金)에 가서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여 수종하던 사람이 금인(金人)과 싸워 상처를 입혔습니다. 금에서 꾸짖어 나무라고 도부서(都府署)에 신석(申錫)을 잡아놓고 매를 치게 하였으니, 왕명을 욕되게 한 죄를 묻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니, 김자류를 면직시켰다.

갑진. 서경(西京)의 요망한 승려 묘청(妙淸)과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이 왕을 설득하여 상안전(常安殿)에서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열었다.

무신. 왕이 왕비 및 두 공주와 함께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하였다가 재추(宰樞) 및 근신(近臣)들과 대동강(大同江) 중류에서 누선(樓船)을 타고 뱃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았다.

기유. 죄수를 재심하였다.

임자. 왕이 구제궁(九梯宮) 천흥전(天興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계축.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부일(金富佾)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갑인. 왕이 기린각(麒麟閣)에 행차하여 승선(承宣)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과 「주관편(周官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을묘. 척준경(拓俊京)을 암타도(嵒墮島)로, 최식(崔湜)을 초도(草島)로 유배 보냈으며, 상주목부사(尙州牧副使) 이후진(李侯進), 귀주사(龜州使) 소억(邵億), 낭장(郎將) 정유황(鄭惟晃), 서재장판관(西材場判官) 윤한(尹翰) 등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왕이 기린각(麒麟閣)에 행차하여 정지상(鄭知常)에게 명하여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강론하게 하고, 수종한 신하 및 서경(西京)의 유신(儒臣) 25인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병진. 왕이 왕비 및 두 공주와 함께 대동강(大同江)에서 용선(龍船)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며 뱃놀이를 즐겼으며, 재추(宰樞)와 시신(侍臣)을 불러 함께 잔치를 벌였다.

정사. 왕이 관풍전(觀風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오. 왕이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내가 천지신명의 크나큰 명령을 받아 조종(祖宗)의 유업을 이어받아 삼한(三韓)을 다스린 지 6년이 되었다. 그러나 슬기는 지략을 내지 못하고, 지혜는 욕심․성냄․어리석음을 밝히지 못하여[明無所觸] 재변이 계속 일어나 조금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지난해 2월에는 불충(不忠)한 무리가 그 틈을 타서 군대를 일으켰다가 음모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모두를 법으로 다스렸고, 이로부터 허물을 반성하고 몸을 자책하고 보니 내가 저지른 잘못이 참으로 많았다. 이제 일관(日官)의 건의에 따라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유신(惟新)의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과 지방에 모두 반포하니 백성들이 모두 알도록 하라.
첫째, 방택(方澤)에서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내 4교(四郊)의 좋은 기운을 받아들일 것. 둘째, 수레와 의복의 제도는 검약하도록 힘쓸 것. 셋째, 불필요한 관리와 급하지 않은 사무를 없앨 것. 넷째, 농사를 권장하고 토지에 힘써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할 것. 다섯째, 관곡(官穀)의 비축에 힘써 백성들의 구휼에 대비할 것. 여섯째, 백성에게서 거두는 데는 법도가 있으니 정해진 조세와 공물(貢物) 이외에는 함부로 거두어들이지 말 것. 일곱째,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고향 땅에 편안히 살게 하여 도망하여 떠돌게 하지 말 것. 여덟째, 제위포(濟危鋪)와 대비원(大悲院)에 넉넉히 비축하여 질병을 구제할 것. 아홉째, 관청 창고에 저장된 묵은 곡식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억지로 나누어주고 강제로 이자를 강제로 거두어들이지 말며, 또 오래 묵고 썩은 곡식을 백성들에게 주어 강제로 쌀을 찧어 내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열 번째, 산림과 천택(川澤)에서 나는 이익은 백성들과 함께 나고 절대 침탈하지 말 것.”
이라고 하였다.

여름 4월 병인. 큰 우박이 쏟아졌다.

경오. 왕비 임씨(任氏)가 원자(元子)를 낳자, 백관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을해. 왕이 장락전(長樂殿)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을 열었다.

을유. 문공미(文公美)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한안중(韓安中)을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한충(韓冲)을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문공유(文公裕)를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이신기(李神倚)를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으로, 정극영(鄭克永)을 동경유수사(東京留守使)로, 임존(林存)을 진주목부사(晉州牧副使)로, 최거린(崔巨鱗)을 상주목부사(尙州牧副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문공미(文公美) 등은 모두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유배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소환되어 복직되었다.

5월 임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유적(崔惟迪)을 경주(慶州)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채석(蔡碩)을 진도현(珍島縣)으로 유배 보냈다.

을미. 왕이 영봉루(靈鳳樓)에 행차하여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의 신기병(神騎兵)에게 명하여 격구를 하도록 하고 차등을 두어 상품을 하사하였다.

신축. 죄수를 재심하였다.

김부식(金富軾) 등이 송(宋)의 명주(明州)까지 갔다가 마침 금(金)의 군대가 변경(汴京)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이내 계묘에 돌아왔다.

6월 을축. 왕좌재(王佐材) 등을 급제시켰다.

경오. 김인존(金仁存)을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이공수(李公壽)를 판병부사(判兵部事)로, 김부일(金富佾)을 호부상서 판예부사(戶部尙書 判禮部事)로, 김향(金珦)을 검교태위 수사공(檢校太尉 守司空)으로, 김부식(金富軾)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최자성(崔滋盛)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최사전(崔思全)을 이부상서 지도성사(吏部尙書 知都省事)로, 문공미(文公美)를 예부상서 지제고(禮部尙書 知制誥)로, 정극영(鄭克永)을 판위위사 한림학사(判衛尉事 翰林學士)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유. 죄수를 재심하였다.

가을 7월 신해.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와 연덕궁(延德宮)으로 들어가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올 봄 서경을 순시(巡視)하며 머물다가 가을이 되어 환궁하였다. 장차 많은 사람들에게 은전을 내리려고 한다. 서경으로 〈나를〉 호종(扈從)한 사람 중에 죄를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고의로 저지른 것이 아니면 논죄하지 말라. 어가(御駕)를 수행한 관원들과 서경에서 어가를 영접한 각 관청의 관리들에게는 동정직(同正職) 1급씩 올려주고, 수고로운 노동에 동원된 노복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물품을 주도록 하라. 그 나머지 미처 거론하지 못한 자들은 해당 관청[攸司]에서 계층별로 보고한 후 상을 내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병진. 송(宋)에서 교련사(敎練使)로 명주부사(明州副使) 장선(張詵)이 왔다.

이 달에 서경(西京) 서북도(西北道)에서 누리떼[蝗蟲]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8월 갑자.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을해.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정축. 이위(李瑋)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임원애(任元敱)를 예빈소경 어사잡단(禮賓少卿 御史雜端)으로 임명하였다.

신사. 연경궁(延慶宮)을 인덕궁(仁德宮)으로, 천복전(天福殿)을 천성전(天成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9월 기축. 금(金)에 국자사업(國子司業) 이중(李仲)을 보내 천청절(天淸節)을 축하하였다.

갑오.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정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계묘. 죄수를 재심하였다.

정미,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기유. 금(金)에서 선경사(宣慶使)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야율거근(耶律居瑾)과 진주단련사(秦州團練使) 장회(張淮) 등이 왔다.

병진. 왕이 천성전(天成殿)에서 금(金)의 임금이 보낸 조서(詔書)를 받았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강한 적과 겨루고 천명(天命)을 받들어 임금을 폐하고 새로 다른 임금을 맞아 세우는 것은 대개 예사로운 일이 아니므로, 나의 울타리가 되는 제후에게 의리상 이 사실을 알려야 마땅할 것이다. 당초 변경(汴京)의 송(宋)이 유연(幽燕)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은밀히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 이웃나라로서의 우호를 맺고자 하였다. 선황제는 그 간절한 요청을 불쌍히 여겨 즉시 윤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굳은 맹서를 지켜야 함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도망간 자들을 받아들여 원한을 만들었다. 뒤이어 〈송 흠종(欽宗)〉 조환(趙桓)이 황위를 계승하더니 다시 〈송 휘종(徽宗)〉 조길(趙佶)이 하던 짓을 되풀이하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을 보였으나 끝내 허물을 뉘우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결국 신과 사람의 분노를 일으켜 천지가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한 번의 출정(出征)으로 그들의 소굴을 전복시키자, 그들은 종묘[宗祧]를 지키지 못하고 황제 부자(父子)는 포로가 되었다.
서로 간에 쌓인 불화가 깊어져 심지어 왕조가 교체되는 일도 있었지만, 임금의 자리[神器]는 비울 수 없다고 말하기에 새 황제를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 나라 백성들도 지극히 어진 이를 마음에 품고는 함께 옛 재상을 추대하였다. 이에 올해 3월 7일 원수부(元帥府)에 지시하여, 사람을 보내 〈송 황제〉 조주(趙主) 부자와 연왕(燕王)·월왕(越王)·운왕(鄆王) 등 황족 470여 인을 조정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멸망한 송에서 태재(太宰)를 지낸 장방창(張邦昌)을 예를 갖추어 대초황제(大楚皇帝)로 책봉하여 금릉(金陵)에 도읍하게 하였다.
아아! 죄로 가득 찬 악인의 우두머리를 잡아 보내는 데 성공하고 천하를 창조하는 공을 완성하였으니, 마땅히 함께 경축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卿)에게 관복, 서대(犀帶), 금은, 비단 등의 물건을 보내니 도착하면 수령하라.”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정묘. 유사(有司)에 명하여 이자겸(李資謙) 일족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압수하여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기사. 금(金)의 사신 야율거근(耶律居瑾)이 귀국하자 왕이 감사의 표문(表文)을 부쳤는데, 그 표문에 이르기를,
“예사롭지 않은 승전(勝戰)과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은혜는 진실로 오랜 세월 속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온 나라가 공경하고 감복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땅·사람 3령(三靈)의 예언에 부응하여 대대로 이어온 군왕의 자리를 계승하였습니다. 인(仁)의 번짐이 깊어지면 정의로 통제되는 것이 많게 되고, 덕의 베풂이 넓어지면 그 위엄에 굴복하는 것이 많게 됩니다. 이 때문에 천자의 군대가 한번 일어나자 천하가 모두 평정되었으며, 동서남북으로 국경을 개척하여 넓혀나가도 중국과 여러 오랑캐 나라는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황제의 공업(功業)은 사서(史書)에 길이 빛나고, 위엄은 온 세상에 솟구쳐 뛰어 오릅니다. 이제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알리면서 제후의 나라들과 경사를 함께하겠다고 하니, 우리나라를 보살펴 주는 의례가 극진하고 아름답습니다. 먼 나라까지 베푸는 두터운 은혜에 보답해야 하겠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에 귀국을 섬길 것을 새기고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정축. 천성전(天成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온 나라에 명하여 3만 명의 승려에게 반승(飯僧)을 베풀게 하였다.

11월 을미. 왕이 봉암사(奉嚴寺)의 낙성식에 행차하였다.

금(金)에 석준(石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에 사례하고 이진(李瑱)은 신년하례를 올리게 하였다.

12월 경오.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인존(金仁存)이 사망하였다.

무인. 죄수를 재심하였다.

임오. 이공수(李公壽)를 판이부사 감수국사(判吏部事 監修國史)로, 김부일(金富佾)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김향(金珦)과 최자성(崔滋盛)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김부식(金富軾)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문공미(文公美)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명하였다.

이 달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