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인종(仁宗) 7년

7390882@hanmail.net 2024. 9. 3. 06:06

세가(世家) 권제16(卷第十) 고려사16(高麗史十)

 

인종2(仁宗二) 7년

 

〈기유〉 7년(1129) 봄 정월 병술. 금(金)에서 영주관내관찰사(寧州管內觀察使) 양공효(楊公孝)를 보내 와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기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한충(韓冲)이 사망하였다.

기유. 정정숙(鄭旌淑)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삼았다.

2월 신해.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기사. 예종비(睿宗妃) 왕씨(王氏)를 책봉하여 귀비(貴妃)로 삼고, 최씨(崔氏)를 책봉하여 숙비(淑妃)로 삼았다.

서경의 신궁(新宮)이 완성되었다.

임신.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무인. 왕이 〈서경의〉 새 궁궐[新宮]에 들어가 머물렀다.

3월 기묘. 초하루 왕이 신궁(新宮)의 건룡전(乾龍殿)에서 여러 신하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상경유수(上京留守), 서경 인근 목(牧)과 도호부(都護府)에서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계미. 왕이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경인. 왕이 서경에서 돌아와 사면(赦免)하였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때를 따르고 변화를 좇아 거처를 옮기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우리나라[海東]의 선현(先賢)도 ‘대화세(大花勢)의 형국을 갖춘 곳에 궁궐을 창건하면 왕업을 오래 연장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였다. 지금 지세를 살펴서 새 궁궐[新宮]을 창건하고 때에 순응하여 순유(巡遊)하였으므로 은택(恩澤)을 중외에 두루 미치려 하노라. 사죄(死罪)를 범한 자는 유배형[流刑]에 처하고, 유배형 이하를 범한 자는 정상을 참작하여 풀어주며[原之], 이미 유배형을 받은 자는 사면할 수 없는 중죄(重罪)를 제외하고는 모두 형량을 헤아려 옮길 수 있도록 하라. 척준경(拓俊京)의 처자에게는 직전(職田)을 돌려 주고, 이지미(李之美)의 형제는 편한 대로 한 곳에 모여 살도록 허락하라. 서경 및 지나온 주현(州縣)에 있는 산천의 신령[神祇]들에게는 각각 존호(尊號)를 더해주고, 새 궁궐의 주산(主山)은 차례를 헤아려 사전(祀典)에 싣도록 하라. 서경 및 지나온 주현에 사는 기로(耆老), 효자와 순손(順孫), 절부(節婦)와 의부(義夫),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자(篤疾者)와 폐질자(廢疾者) 등에게는 술과 음식을 내리고 이어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 주도록 하라. 시종관 및 서경의 문·무관, 새 궁궐을 창건하는데 기여한 관리에게는 모두 관작(官爵) 한 등급을 주고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택을 입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을미.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신축.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계묘. 왕이 국학(國學)을 보고 공자[先聖]에게 석전(釋奠)을 행한 후 은반(銀盤) 두 개와 비단 명주 30필을 바쳤다. 돈화당(敦化堂)에 가서는 대사성(大司成) 김부철(金富轍)에게 명하여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을 강의하게 하고 기거랑(起居郞) 윤언이(尹彦頤)와 여러 학생으로 하여금 그것의 대의(大義)를 묻고 풀이하도록 하였다. 재추(宰樞)·시신(侍臣)·학관(學官)·제생(諸生)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더니 학관·제생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정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慮囚].

무신.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여름 4월 계축. 천성전(天成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열었다.

무오.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경신. 대안사(大安寺)에서 불사리[佛骨]를 받들어와서 인덕궁(仁德宮)에 안치하였다.

5월 경진. 기거랑(起居郞) 윤언이(尹彦頤),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 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이 상소하여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자 왕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해. 왕이 연덕궁(延德宮)에 옮겨가서 임씨(任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경인.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갑진/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법은 형벌과 명분을 바르게 하고 지켜야 할 바[分守]를 나누어 상세히 함으로써 큰일을 대비하고 옳지 않은 일을 막으려고 하였다. 관면(冠冕)의 법식과 의복 제도는 상하가 구별이 있고 존비(尊卑)가 다르다. 그리하여 귀한 자는 핍박하지 않고 천한 자는 감히 규정을 넘어서지 않아서 인심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덕이 점차 쇠하고 법도 더불어 시폐(時弊)가 된데다가 의복에는 등급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절약하고 검소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태조께서는 개국하셨을 때에 검소한 덕을 지극히 지키면서 오로지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셔서 중국의 문물[華夏之法]을 살펴 받아들이고 거란의 풍속[丹狄之俗]을 엄하게 금지하셨다. 오늘날에는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을 경쟁하고 거란의 풍속을 받아들이고는 돌이키지 않으니 깊이 탄식할 일이다. 이제 짐은 여러 면에서 솔선하여 말세의 풍속을 없애려고 한다. 수레와 가마, 의복 등의 물품에 있어서는 모두 화려함을 버리고 질박함을 숭상할 것이다. 아아! 너희 공경대부들은 짐의 뜻을 잘 체득하여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6월 무신.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경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아뢰기를, “충주(忠州) 사람 유정(劉挺)이 아버지를 시해하였는데, 이는 그곳 수령[牧守]과 향리[州吏]가 능히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모두 법관을 내려 보내 죄를 다스리고[下吏] 충주는 강등하여 군(郡)으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좌우의 관리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른 것은 ‘〈주(周)나라 제후국인〉 주[邾婁]의 정공(定公) 때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시해하였는데, 그 사람을 죽이고 그가 살던 집을 허문 뒤 그 터를 웅덩이로 만들었다.’라고 하였을 뿐 그가 살던 고을[州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州)를 군으로 삼는 것은 옛 법이 아닙니다.” 라고 하므로 왕이 이를 따랐다.

무오.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신유. 중화전(重華殿)에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을 열었다.

가을 7월 정축. 초하루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는데[經天] 15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무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8월 무신. 왕이 서적소(書籍所)에 나아가 승선(承宣)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송의 『충의집(忠義集)』을 읽게 하였다. 왕은 정무를 처리하다 틈을 내어서는 여러 학사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자 하여 수창궁(壽昌宮) 옆에 있는 시중(侍中) 소태보(邵台輔)의 집을 서적소로 삼고는 많은 문헌을 수집하였다. 대사성(大司成) 김부철(金富轍),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임완(林完)으로 하여금 여러 유신(儒臣)과 더불어 번갈아 당직을 서도록 하였다.

계해.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병인. 오랫동안 비가 와서 산천(山川)과 불우(佛宇)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신미.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을해.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윤8월 기묘. 병부낭중(兵部郞中) 최관(崔灌)을 금에 파견하여 천청절(天淸節)을 축하하였다.

9월 병오. 초하루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자.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경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계유. 법왕사(法王寺)에서 3일 동안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전국에서 승려 3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게[齋僧] 하였다.

겨울 10월 임오. 동북 양계(兩界)에 사신을 나누어 보내 여러 성의 관리에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무기를 점검하라고 명령하였다.

11월 을묘. 호인영(胡仁穎)을 금에 파견하여 신년을 하례하였다.

병진. 노령거(盧令琚)와 홍약이(洪若伊)를 금에 보내 맹세의 표문[誓表]을 올렸는데, 말하기를,
“사절이 급히 와서 훈계하는 말씀으로 은밀하게 이르셨는데 엎드려서 황제의 명령을 들으니 너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례(周禮)』〉 주관(周官)에 따르면, 사맹(司盟)은 맹약(盟約)의 법도를 맡아 맹을 맺은 여러 나라들이 사이가 좋지 않고 명을 어긴 백성이 있으면 신의가 없다고 저주할 뿐이었습니다. 쇠퇴기에 이르러 춘추시대에 열국(列國)은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면서 성신(誠信)을 반드시 다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맹서(盟誓)를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詩人)들은 자주 맹서하는 것을 조롱하였고 공자(孔子)께서는 〈제후끼리 맹서하지 않고 약속을 하는〉 서명(胥命)에 찬성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의 지극한 덕은 어느 황제보다 높고[帝先], 큰 신의는 천하를 덮었습니다. 통일[一統]의 빛나는 업적을 열어 사방을 다스리니 큰 나라는 그 위세에 떨고 작은 나라는 그 은혜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고려[小邑]는 변방의 한 귀퉁이에 있으면서 진인(眞人)께서 나라를 세우셨다는 말을 듣고는 다른 나라들보다 앞장서서 조회하고 하례를 드렸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중에 참여하여 주륙을 당하는 죄[防風之罪]를 면하였고 외람되이 의부(儀父)의 포상을 받았을 뿐더러 여러 작은 허물은 용서받고 특별한 예우까지 받았습니다. 〈황제께서는〉 변방의 땅을 내려주시고 공물을 바치는 규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상국의〉 조정에서 다시 별다른 말이 없는 데 속국이 감히 다른 마음을 가지겠으며, 엄명(嚴命)이 거듭 이르고 있는데 감히 공손하게 따르지 않겠습니까? 삼가 군신(君臣)의 의리에 맞추어 맹세하고 대대로 번병(藩屛)의 직책을 수행할 것입니다. 충성스런 마음은 밝은 해와도 같습니다. 만약 제가 마음이 달라져서 변한다면 신이 죽음을 내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김철의(金鐵衣)·최파희(崔頗喜) 및 주인 없는 말을 돌려보낸 것을 사례하고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황제폐하의〉 성덕(聖德)이 커지자 큰 나라는 위엄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흠모의 마음을 품고서 모두 조회하고 있으며 황제의 덕[龍光]은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미물에까지 빠짐없이 널리 미치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서경(書經)』〉 「비서편(費書編)」에서는 ‘달아난 말과 소, 도망쳐 나온 노비는 쫓아버리지 말고 공경히 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제후에게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 말은 모두 삼황오제의 글[墳典]과도 잘 어울리며 그 가르침은 제왕(帝王)에게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인(聖人)의 책에 인용되었으며 천자의 명령에 버금가는 것으로써 만세의 규범이 되었으므로 6경(六經)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신명(神明)을 문득 일으키고 위엄과 덕망을 겸비하셨으므로 길이 통하는 곳의 사람들이 복종하였고 중국과 오랑캐의 백성들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下邑]는 상국의 동쪽 구석에 나라가 있으면서 울타리가 되어 일찍부터 천자를 섬기는 예를 다해왔으며, 작은 나라를 배려하는 은혜로 일찍이 영토를 나누어받는 덕을 입었습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보낸 사신의 공문을 받아 보니 다시금 천자의 자애로움이 만물에 두루 미쳐서 변방의 하찮은 일까지도 잊지 않고 계심을 깨달았으며, 상국 조정이 지극히 인자하며 관대하도록 애쓰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외로운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척에서 보고 계시는 듯한 위엄을 우러르면서 성실하게 명령을 받들겠으며, 매년 조공을 바치는 일은 남에게 뒤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경신. 짙은 안개[大霧]로 낮이 10여 일이나 계속하여 어두웠다.

병인.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계유. 문공유(文公裕)를 금에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한 것을 사례하였다.

12월 정축. 동교(東郊)에서 대규모로 열병하였다.

계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경자. 대원공(大原公) 왕효(王侾)를 검교태사 수태보 겸 상서령(檢校太師 守太保 兼 尙書令)으로, 최자성(崔滋盛)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 叅知政事)로, 문공인(文公仁)을 이부상서 지문하성사(吏部尙書 知門下省事)로, 임경청(林景淸)을 형부상서 동지중추원사(刑部尙書 同知樞密院事)로, 이준양(李俊陽)을 전중감 추밀원부사(殿中監 樞密院副使)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