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현종(顯宗) 21년
현종2(顯宗二) 21년
〈경오〉 21년(1030) 봄 정월 정사. 동여진(東女眞)의 오을나(烏乙那) 등 50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병인. 흥요국(興遼國)이 또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 고길덕(高吉德)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군대를 요청하였다.
2월 병술. 채충순(蔡忠順)을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로, 이작인(李作仁)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유소(柳韶)를 중추사(中樞使)로 임명하였다.
갑오. 교주(交州), 익령(翼嶺), 동산현(洞山縣)에서 지진이 났다.
을미.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가 와서 토종말을 바쳤다.
신축. 적경궁주(積慶宮主)가 죽자, 시호를 효혜(孝惠)라 하고 평릉(平陵)에 장사지냈다.
3월 계유. 곽신(郭伸)을 우승선(右承宣)으로, 최연수(崔延壽)를 고공낭중 겸 어사잡단(考功郞中 兼 御史雜端)으로, 류운(柳雲)을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을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작년 12월이 송(宋)의 책력(冊曆)에는 대진(大盡, 大月의 마지막 날 30일)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태사(太史)가 올린 책력에는 소진(小盡, 小月의 마지막 날 29일)으로 되어 있다. 또 올해 정월 15일에 월식[太陰食]이 있다고 아뢰었는데 끝내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반드시 술가(術家)가 정밀하지 못한 것이니, 어사대(御史臺)는 추국(推鞫)하여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무자. 동여진(東女眞)의 만투(曼鬪) 등 60여 인이 와서 과선(戈船, 戰船의 하나) 4척과 〈호목으로 만든 화살인〉 호시(楛矢) 117,600개를 바쳤다.
갑오.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시행하였고 최유선(崔惟善) 등을 급제시켰다.
기해.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여진(女眞)의 계타한(計陁漢) 등을 보내 노랑담비가죽[貂鼠皮]을 바치며 책력(冊曆)을 요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5월 갑인. 김맹(金猛)을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유징필(劉徵弼)을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황주량(黃周亮)을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로, 최충(崔冲)을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으로 임명하였다.
을묘. 동여진(東女眞)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蓋) 등이 와서 말 9필, 과선(戈船) 3척, 호시(楛矢) 58,600개 및 무기와 의장(儀仗)을 바쳤다.
을축. 거란(契丹)의 수군지휘사 호기위(水軍指麾使 虎騎尉) 대도(大道)와 이경(李卿) 등 6인이 내투(來投)하였다. 이때부터 내부(來附)하는 거란인(契丹人)과 발해인(渤海人)이 매우 많았다.
신미. 강감찬(姜邯贊)에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더해주었다.
6월 신묘. 사형[殊死] 2죄를 판결 받은 죄수들을 특별히 사면하여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형벌을 면제해주었다.
나성(羅城)을 쌓고 중광사(重光寺)를 건축한 관리, 승려, 속인(俗人), 공장(工匠)에게 모두 관계(官階)와 관직을 더하고, 부역자(赴役者)에게는 올해 바칠 조(調)와 포(布)를 줄여주었으며, 여러 주(州), 군(郡), 현(縣)의 미납된 조세 중에 무진년(1028)까지의 부채를 면제하였다.
인주(麟州), 위원진(威遠鎭), 정융진(定戎鎭)에 성을 쌓은 이들과 서쪽으로 순행할 때 호종(扈從)하여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차례대로 관직을 더하고, 벼슬이 없는 이들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가을 7월 갑자. 적경공주(積慶公主)가 죽었다.
을축. 흥요국(興遼國)의 행영도부서(行營都部署) 유충정(劉忠正)이 영주자사(寧州刺史) 대경한(大慶翰)을 보냈는데, 표문(表文)을 가지고 와서 구원을 간청하였다.
기사. 송(宋)의 천주(泉州) 사람 노준(盧遵)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무인. 내사시랑(內史侍郞) 진함조(晋含祚)가 죽었다. 진함조(晋含祚)는 술수(術數)를 익혀서 국가에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도참(圖讖)으로 대답하여 마침내 높이 등용되기에 이르렀지만, 당시 여론에서는 그를 깔보았다.
8월 무신. 왕가도(王可道)를 내사시랑 판삼사사(內史侍郞 判三司事)로, 이주좌(李周佐)를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였다.
9월 신해. 초하루 탐라(耽羅)에서 토산물을 바쳤다.
병진. 흥요국(興遼國)의 영주자사(郢州刺史) 이광록(李匡祿)이 와서 위급함을 알렸는데, 얼마 안 되어 흥요국이 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체류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갑술. 김가(金哿)를 거란(契丹)에 보내어 동경(東京)의 수복(收復)을 축하하였다.
을해. 거란(契丹)이 천우장군(千牛將軍) 나한노(羅漢奴)를 보내왔다.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요즈음 사신이 오고가지 못한 것은 응당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지금 발해왕(渤海王)이라 사칭하던 이들이 함께 포위되고 갇혀 있다가 모두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배신(陪臣)을 속히 우리나라로 보낸다면 반드시 걱정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신사. 초하루 한조(韓祚)를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로 삼았다.
이달에 거란(契丹)의 해가(奚哥)와 발해(渤海)의 백성 500여 인이 내투(來投)하여 강남(江南)의 주군(州郡)에 살게 하였다.
11월 을축. 서여진(西女眞)의 만투(曼闘) 등 27호가 내부(來附)하여 동계(東界)에 살게 하였다.
계유. 어사잡단(御史雜端) 최연수(崔延壽)가 탄핵하는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참지정사(叅知政事) 이작인(李作仁)이 태조공신(太祖功臣)의 후예라고 사칭하며 자기 아들에게 음직(蔭職)을 받게 하였으니 파직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2월 신묘. 서눌(徐訥)을 문하시랑동평장사 판상서이부사(門下侍郞同平章事 判尙書吏部事)로 삼았다.
정유. 중추사(中樞使) 김맹(金猛)이 죽었다.
계묘. 최제안(崔齊顔)을 중추사(中樞使)로, 황주량(黃周亮)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임명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목사아골(睦史阿骨), 유원장군(柔遠將軍) 알나(閼那)와 귀덕장군(歸德將軍) 아개주(阿箇朱)가 와서 말과 철갑옷, 호시(楛矢)를 바쳤다.
개경[京城]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