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려사

세가(世家) 현종(顯宗) 5년~6년

7390882@hanmail.net 2022. 12. 21. 07:13

현종1(顯宗一) 5년~6년

 

갑인(甲寅) 5년(1014) 봄 정월 갑오(甲午). 궁궐이 완공되었다.

임자(壬子). 혜성이 오거(五車, 필수에 속한 별자리)에 나타났다.

2월 경신(庚申). 혜성이 대릉(大陵, 위수에 속하는 별자리)에 들어갔다.

갑자(甲子). 왕이 새 궁궐에 입주하였다.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여진(女眞)의 만두(萬豆)를 사신으로 보내 말과 담비의 초서피(貂鼠皮)와 날다람쥐의 청서피(靑鼠皮)를 바쳤다.

병자(丙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백성 중에 나이 70세 이상이면서 관직이 없는 자에게 모두 정위급(正位級)을 더하라.”라고 하였다.

갑신(甲申). 광휴(光休)·양일(梁一)·거정(巨貞)을 모두 낭장(郞將)으로 임명하여 전공(戰功)을 포상하였다.

3월 경인(庚寅) 흰 무지개(白虹)가 해를 꿰뚫었다.

신축(辛丑). 흰 기운(白氣)이 해를 꿰뚫었다.

임자(壬子).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조상[祖考]을 추존하여 공렬(功烈)을 밝히는 것은 사람의 자식 된 의무이다. 내가 다음 달에 날을 골라 비궁(閟宮, 종묘)에 제사지내려 하니, 마땅히 맡은 관청에서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예관(禮官)이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존호(尊號) 및 시호(謚號)를 더 올리자고 아뢰었다.

여름 4월 갑술(甲戌). 치사(致仕)한 문하시중(門下侍中) 유윤부(柳允孚)에게 내사령(內史令)을 더하였다.

병자(丙子). 왕이 친히 재방(齋坊)에서 체제(禘祭)를 지냈는데, 처음으로 목종(穆宗)을 합사하고 유배형[流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유진(劉瑨)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檢校太師 守門下侍中)으로, 최사위(崔士威)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김심언(金審言)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정축(丁丑). 우현부(禹玄符) 등을 급제시켰다.

5월 신묘(辛卯),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병오(丙午).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전공지(田拱之)가 죽었다.

6월 경신(庚申).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방수군(防戍軍) 중에 길에서 죽은 자는 관청에서 시신을 거두는 도구를 제공하고, 해골을 상자에 담아 역마(驛馬)에 실어 집에 빨리 보내도록 하라. 돌아다니는 행상(行商)으로 죽어 성명과 본관(本貫)을 알 수 없는 자는 소재지의 관사(官司)에 그를 위해 임시로 장사 지내고 늙고 젊은 정도의 용모 특징을 기록하여 실수가 없게 하며, 이를 영원히 법식으로 삼으라.”라고 하였다.

이 달에 진적(陳頔)과 이예균(李禮均)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왕동영(王同穎)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윤여(尹餘)를 사재경(司宰卿)으로, 왕좌섬(王佐暹)을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 관직을 더하였는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가을 7월 경인(庚寅). 사직단(社稷壇)을 수리하였다.

8월 갑자(甲子).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를 송(宋)에 보내 금실로 짜서 만든 용 봉황(龍鳳) 무늬의 안복(鞍幞)과 수를 놓은 용 봉황(龍鳳) 무늬의 안복(鞍幞) 각각 2벌과 좋은 말 22필을 바치고 예전처럼 귀부하기를 거듭 요청하였다. 송(宋) 황제가 등주(登州)에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바닷가 선착장에 관(館)을 설치하여 모시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기사(己巳). 명복궁(明福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병자(丙子). 경주(慶州)에 지진(地震)이 났다.

기묘(己卯).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김심언(金審言)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노전(盧戩)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였다.

계미(癸未). 양진(梁稹)을 이부시랑 중추부사(吏部侍郞 中樞副使)로 임명하였다.

9월 을유(乙酉). 손몽주(孫夢周)를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 承旨)로, 이공(李龔)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였다.

병신(丙申). 거란(契丹)이 장군 이송무(李松茂)를 보내 다시 6성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기미(己未). 거란(契丹)이 국구(國舅)인 상은(詳穩) 소적렬(蕭敵烈)을 보내 통주(通州)를 침략하였다. 흥화진(興化鎭)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別將) 주연(周演)이 공격하여 패퇴시켰는데, 7백 여 급의 목을 베었고 강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11월 계미(癸未). 초하루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군(衛軍)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유배보냈다.

을유(乙酉). 김훈(金訓) 등이 요청하기를, “상참(常叅) 이상의 무관(武官)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경인(庚寅). 북산(北山)에 있는 여러 사찰의 승려(僧)가 군대를 일으켜 온다는 헛소문이 돌자, 개경(京城)에서는 크게 놀라 방비를 삼엄하게 하였다.

12월 정사(丁巳). 유배형(流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고, 모든 사형(死刑)·장형(杖刑)·유형(流刑)의 죄는 형량을 줄였다. 황보유의(皇甫兪義)와 장연우(張延祐) 및 보통 사면에 해당되지 않는 죄수 이외에 여러 유배된 사람들을 모두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바다와 강, 산천(山川)의 신들에게 훈호(勳號)를 각각 더하였다. 개경(開京) 안의 백성들에게 곡식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효자(孝子)·순손(順孫)·의로운 남편[義夫]·절개 지킨 부인[節婦]에게 형편을 헤아려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7품 이상의 문관으로 출사한 지 20년 된 자들은 복장(服章)을 바꾸고 도관(道官)의 직(職)을 차례대로 높여 주었다.

을묘(乙卯) 6년(1015) 봄 정월 거란(契丹)이 압록강(鴨綠江)에 다리를 만들고, 다리를 끼고 동쪽과 서쪽에 성을 쌓았는데,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파괴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계묘(癸卯). 거란군[丹兵]이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 등이 격퇴하였다.

갑진(甲辰). 또 통주(通州)를 침략하였다.

3월 계미(癸未). 왕이 서경(西京)에 갔다.

갑오(甲午). 왕이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 19인을 처형하였다.

기해(己亥). 거란(契丹)이 용주(龍州)를 침략하였다.

여진(女眞)이 배 20척으로 구두포(狗頭浦)를 노략하자 진명도도부서(鎭溟道都部署)가 격퇴하였다.

여름 4월 경신(庚申). 거란(契丹)의 사신 장군 야율행평(耶律行平)이 와서 또 6성을 돌려달라고 하자, 사신을 억류하여 보내지 않았다.

이 달에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왔다.

5월 신축(辛丑). 큰 유성(流星)이 서남쪽에 떨어졌다.

계묘(癸卯). 김은부(金殷傅)를 지중추사(知中樞事)로 삼았다.

6월 기유(己酉).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발생하였다.

윤6월 갑진(甲辰). 이주헌(李周憲)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장연우(張延祐)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송(宋)의 천주인(泉州人) 구양징(歐陽徵)이 내투(來投)하였다.

가을 7월 경신(庚申). 무관(武官)이 요청하여 세운 관호(官號)를 없앴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임영함(林英含) 및 군사 12,500여 인이 모두 변방을 지킨 공이 있으므로 관급(官級)을 높여 포상해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8월 을미(乙未) 내사령(內史令) 유윤부(柳允孚)가 죽자,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중지하고 경안(敬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9월 갑인(甲寅). 거란(契丹)의 사신 감문장군(監門將軍) 이송무(李松茂)가 와서 6성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기미(己未). 거란(契丹)이 통주(通州)를 공격하였다.

계해(癸亥), 흥화진(興化鎭) 대장군(大將軍) 정신용(鄭神勇), 별장(別將)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大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군대를 이끌고 거란군(契丹軍)의 후미로 가서 7백 여 급을 격살(擊殺)하였으며, 정신용(鄭神勇) 및 6인이 전사하였다.

정묘(丁卯). 거란(契丹)이 영주성(寧州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경오(庚午). 대장군(大將軍) 고적여(高積餘), 장군 소충현(蘇忠玄)과 고연적(高延迪), 산원(散員) 김극(金克), 별장(別將) 광참(光參) 등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거란군[丹兵]이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좌(王佐)와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를 잡아갔다.

11월 기사(己巳).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우(張延祐)가 죽었다.

갑술(甲戌). 경주(慶州)에 지진(地震)이 났다.

이 해에 거란(契丹)이 선화진(宣化鎭)과 정원진(定遠鎭)을 탈취하여 성을 쌓았다.

민관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을 송(宋)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거란(契丹)이 해마다 침략한다고 알렸다. 표문(表文)을 보내 말하기를, “성스러운 위세를 빌어 지혜로운 계략을 보이고자 하므로, 혹시 위험한 때에 이를지 모르니 미리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