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① 북상하는 관음신앙
송나라① 북상하는 관음신앙
“관세음보살, 그 이름만 불러도 모든 재앙 벗어나게 되리니…”
남해 항로에서 선박 왕래가 왕성하고 승려 출입도
잦아지자 무엇보다 관음신앙이 득세했다. 뱃사람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생명의 손길을
꼽으라면 단연 관음신앙이었다. 12세기 이후로
백의관음과 함께 수월관음이 인기를 끌었다.
관음성지 하문대학교 정문 앞은 언제나 순례객으로
들끓는다. 복건 오로봉 자락의 남보타사는 인도에서
바다를 타고 건너온 관음신앙이 중국 땅에 처음
당도한 성지다. 항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남보타사에서 주산군도의 보타산으로 관음이
북상한다. 주산군도에 신라와 일본의 승려와
상인 출입이 빈번하여 관음도량이 성립된 것이다.
뱃사람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생명의 손길로는 관음신앙이 으뜸으로 꼽혔다. 사진은 목조 관음보살좌상(송 또는 금, 영국박물관).
송대에도 빈번했던 천축행
송대(宋代)에도 천축국으로 오가는 불교 순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쩌면 중국이 가장 활발하게 바다로 진출한 시대가 송이었다. 특히 북방세력에게 남쪽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남송은 해상무역 아니면 지탱하기 어려웠다. 남중국해와 동아시아의 고려·일본을 연계하면서 어쩌면 중국 최대의 무역국가로 거듭났다.
조여괄(1170~1231)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제번기>라는 독특한 책을 남겼다. 세계 각국의 정보를 담고 해국의 산물을 종합한 백과사전급 책이다. 이러한 책이 가능한 것은 송의 해양력을 반증하며, 이전 수·당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송대에 중국 해양력의 전범이 만들어졌으며, 이후 원으로 이어져서 훗날 명나라 초기의 정화 대원정이 가능케 한 밑거름이 되었다.
무역이 번성하자 상선을 이용하여 이전 시대보다 손쉽게 천축국을 오갔다. 천축행은 당나라 시대에 유행했으나 해상교통이 쉽지 않았다. 송대에는 활발한 상선 덕분에 천축행이 대단히 쉬웠다. 인도와 동남아의 해양력도 동시에 발전하고 있었다. 중개무역국인 동남아시아의 삼불제는 당 의정이 중간 기착지로 이용했듯이 송대에도 여전히 중간 거점으로 활용됐다.
송니라의 최대 무역항이던 천주의 번성기를 나타내는 그림.
<송사> 외국전에, “송 태조 건덕 3년(965) 창주 출신 승려 도원이 서역에서 돌아왔는데 부처님 사리 하나와 수정 용기, 패엽경 40묶음을 얻어 와서 조정에 헌상했다. 도원은 진(晉) 천복 연간(936~943)에 서역으로 떠나서 여행길에서 12년을 보내고 오인도(五印度, 동·서·남·북·중 인도)에서 6년을 지냈다”고 했다. 983년, 승려 법우가 천축으로부터 경전을 얻어 돌아오면서 삼불제에 들렸다. 거기서 천축 승려 미마라실려어불다령을 만났으며, 그가 중국에 가서 경전 번역을 희망했기에 그를 불러들인다. 이처럼 송대에도 끊임없이 천축에서 바다를 건너 불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옹희 연간(984~987)에는 승려 사한이 서역에서 돌아오면서 외국 승려 밀탄라와 함께 북인도왕의 서신을 받들고 내조한다. 또 바라문 승려 영세가 파사 외도(外道) 사람인 아리연과 함께 개봉에 이르렀다. 송 태종 지도 2년(996)에 천축 승려가 선박을 타고 해안에 이르렀는데, 불구와 불상 그리고 패엽경 한 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송 인종 천성 2년(1024) 서인도 승려 애현, 지신호 등이 와서 범어 경전을 바치니 자주빛 방포(方袍)와 속백(束帛)을 각각 하사했다. 인종 경우 3년(1036)에는 승려 선칭 등 9명이 범어 경전, 불골(佛骨) 및 청동과 상아로 만든 보살상을 바치자 속백을 하사했다. 이처럼 송대에도 끊임없이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왔으며 불교문화가 바다를 건너왔다.
관음신앙의 득세
남해 항로에서 선박 왕래가 왕성하고 승려 출입도 잦아지자 무엇보다 관음신앙이 득세했다. 뱃사람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생명의 손길을 꼽으라면 단연 관음신앙이었다. 12세기 이후로 백의관음과 함께 수월관음이 인기를 끌었다. 무역선이 빈번해지면서 관음신앙도 힘을 얻었다.
관음은 연화, 꽃병, 진주, 아이들과 함께 표현됐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자비의 여신, 고통과 괴로움에 처한 모든 이들의 보호자, 어머니를 후원하는 여신 그리고 아이를 주는 신으로 숭배됐다. 사람들은 관음을 중국 미인의 이상형으로 좋아했다. 관음신앙은 위기에 처한 중생을 구하는 보살이니, 항해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뱃사람의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은 이렇게 말했다.
“선남자야. 만일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한량없는 수백 수천 수만 수억의 중생들이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이름을 한마음으로 부르면, 곧 그 음성을 알아듣고 모두 고통에서 해탈케 할 것이다. (… …) 만일 수백 수천 수만 수억의 중생들이 금, 은, 유리, 거거, 마노, 산호, 호박, 진주 등 보물을 얻기 위해 큰 바다에 나갔다가 흑풍(黑風)을 만나 나찰(羅刹)의 나라에 떨어진다 해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 모두 나찰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되리니, 이러한 까닭으로 관세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관음이 거주하는 보타낙가산은 ‘꽃과 나무가 가득한 작은 산’이란 뜻의 산스크리트어 포타라카(Potalaka)의 음역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낙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온다.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현장법사는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보타낙가산이 있다’고 기록했다.
관세음보살 거주지는 곳곳에 등장한다. 관음성지는 세계에 일곱 군데를 꼽는다. 인도 남해의 포타라카, 스리랑카의 포타라, 복건의 보타산, 티베트의 납살(拉薩, 라사), 주산군도의 보타락사, 일본 기이(紀伊)의 보타락, 한국의 낙산사를 7대 포타라로 친다. 복건성의 보타산이 힘을 얻은 것은 송대였다. 중국인은 남해 바닷길인 복건에 남보타사, 북쪽 바닷길인 주산(舟山)에는 불긍거관음원을 설정함으로써 인도에서 북상한 관음신앙의 현현(顯現)을 내외에 알렸다.
관음성지 하문대학교 정문 앞은 언제나 순례객으로 들끓는다. 복건 오로봉 자락의 남보타사는 인도에서 바다를 타고 건너온 관음신앙이 중국 땅에 처음 당도한 성지다. 항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남보타사는 오대에 창건됐다. 그 유명한 철불 천수관음이 모셔진 대비전이 있고, 불경 수만 권과 불상, 서화가 보존된 장경각도 있다. 오로봉에 오르면 불자(佛字) 석각이 계곡마다 숨어 있다. 오로봉 자체가 신성한 ‘불국토의 산’이다. 국제 항로가 오가는 바닷가에 강남 최대의 관음사찰이 있어 원해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
동아시아 관음의 바닷길
남보타사에서 주산군도의 보타산으로 관음이 북상한다. 주산군도에 신라와 일본의 승려와 상인 출입이 빈번하여 관음도량이 성립된 것이다. 보타산 개산은 장보고 이후 산동 연해에서 절동 연해로 이동한 해양불교의 새로운 전개 양상으로 여겨진다. 보타산 관음원은 6세기 전반에 양 무제에 의해 시작됐으나, 보타산이 항해의 안전을 비는 관음도량으로 크게 발전한 것은 동아시아 해양교류가 극성기를 맞은 9세기 중엽으로 비정된다.
신라 상인과 승려가 주도하고 일본 상인과 승려도 개입하여 관음상을 안치함으로써 동아시아 해양신앙 거점으로 부상했다. 주산의 보타산은 한국의 낙산사와 관련이 깊다. 신라 의상대사가 보타낙가산 불긍거선원에서 관음을 전수받아 양양 낙산사를 세웠기 때문이다. 하문에서 주산군도를 거쳐 한반도 양양에 이르기까지 ‘관음의 바닷길’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 불교문화가 대개 송대에 성숙된 것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