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비자야 해상제국 ②
스리비자야 해상제국 ②
적도 우림대 수마트라는 ‘완연한 불국토’였다
스리비자야의 수도가 있던 곳으로 추측되는 무시강의 수상가옥(1917년 사진).
1920년대 팔렘방에서 불상이 발견됐는데
머리 몸통이 따로 발굴되고 다리는 분실된 상태…
여래불입상으로 의정스님이 팔렘방에
들른 이후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2015년 이후 무시강 바닥에서 보석이 박힌
8세기의 불상 등 불교와 힌두 유물이 …
동남아시아 해양무역 거점 팔렘방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는 근대에 만들어진 국민국가이고, 이전에는 수마트라와 자바가 독립왕국으로서 경쟁관계로 발전했다. 수마트라는 말레이반도, 믈라카해협, 베트남과 태국, 남중국해, 나아가서 남인도와 벵골만에 가까워 국제무역이 발달하고 동서 문명교류가 활발했다. 수마트라는 적도 우림대에 해당하여 숲이 무성하고 강이 발달했으며, 동은 인도양, 서는 태평양에 접한 전략적인 곳이다. 그 수마트라에 만들어진 불교왕국이 스리비자야이고, 약간 남동쪽에 위치한 팔렘방이 수도다.
스리비자야의 전략거점은 팔렘방이다. 팔렘방은 장장 750㎞에 달하는 무시(Musi)강이 흐르고 지류가 잘 발달했다. 열대우림 지대에 속하여 강수량이 많고 우기에는 강의 수위가 높아진다. 팔렘방에서 강을 따라 하구로 내려가면 방카(Banka)섬이 외해를 막아주며 자연스럽게 방카 해협이 해양 진출의 길목이 된다.
당나라 시대에 조선과 항법기술의 발달로 동남아, 믈라카해협, 인도양, 홍해, 아프리카 항로가 개통되어 마침내 해양실크로드가 육상실크로드를 대체했다. 당대 해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수록된 가탐의 <광주통해이도(廣州通海夷道)>에서 잘 정리됐다. ‘광주통해이도’는 당 시대 중국 동해안을 따라 동남아, 인도양 북부, 홍해 연안, 아프리카 북동부, 페르시아만 국가로 이어지는 해로다. 해양실크로드의 다른 말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남중국해 광주에서 해남도를 거쳐서 현재의 베트남 참파, 신가파(新加波, 현 싱가포르) 해협을 내려와 불서국(佛逝國, 현 수마트라)에 당도한다. 불서국에서 바닷길은 사자국(스리링카)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팔렘방에서 북상하면 믈라카 해협을 통해 말레이반도를 끼고서 벵골만으로 접어들어 손쉽게 인도로 갈 수 있다. 북동으로 올라가면 베트남과 남중국해에 닿는다. 팔렘방은 수마트라에서도 남동쪽에 위치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순다해협을 통해 손쉽게 인도양으로 빠져나와 스리랑카나 남인도로 갈 수 있다. 스리비자야가 팔렘방에 수도를 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해양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지리적 위치 덕분에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 전역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말레이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믈라카 해협을 통제할 수 있었다. 팔렘방은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고 거대한 창고에 교역품(밀, 목재, 철 등)을 저장해 그곳을 경유하는 상품의 가격을 결정했다. 적어도 500년 이상 동남아시아의 해양무역을 지배했다. 팔렘방은 해군, 교역, 금융에서 동시대 유럽의 주요 해양세력인 브뤼헤, 제노바, 베네치아를 포함해 세계의 어떤 다른 항구도시보다 우월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팔렘방은 여러 시기에 걸쳐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다. 나란다대학에 경비를 지원하고, 중국과 천축에서 오가는 구법승들의 체류비를 전적으로 부담하고, 수천여 명의 스님들이 불경을 번역하는 등 다양한 불교사업은 경제력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구법승 의정이 장기 체류하면서 불경을 번역할 수 있던 것도 이같은 경제력에 기반한다. 그런데도 서방 역사서들은 이제껏 팔렘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스리비자야 불교왕국의 중요성은 뒤늦게 밝혀지는 중이다.
강물에 휩쓸려 거의 사라진 왕성 유적들
팔렘방에서 발견된 텔레가 바투(Telega batu) 금석문. 인도의 직접적 영향을 암시한다(팔라바문자, 7세기).
스리비자야의 수도 위치에 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팔렘방은 무지강이 세 개의 강(Belidah, Ogan, Komering)과 합류하는 강북에 위치한다. 중심부는 특히 2개의 강이 합류하는 수로교통의 전략 요충지다. 그대로 동쪽으로 항해하여 바다에 이른다. 내륙과 바다를 수로를 이용하여 연결하면서 해상제국으로 번영하기에 적절하다. 고고학자들은 스리비자야 왕궁이 팔렘방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5마일 떨어진 부킷 세군탕(Bukit Seguntang)과 무시강 사이에 위치한 카랑안야르(Karanganyar) 마을인 것으로 본다. 세군탕은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면적의 언덕인데 저습지 무시강 일원에서는 높은 정상이라 유일하게 전경이 굽어보인다.
팔렘방은 정교한 자연 항구다. 얼기설기 엮인 강상루트로 인해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호칭을 후대에 유럽인이 붙였다. 150㎞ 이상 내륙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무시강은 쉽게 항행할 수 있는 강이다. 훗날 19세기에 바다로 향하는 대형 기선조차도 부두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정도였다. 또한 팔렘방은 무시강의 세 지류 합류점이란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 팔렘방 위쪽으로 작은 배를 타고 무시강과 그 지류를 항해할 수 있다. 강을 이용하여 수마트라 내륙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고, 습윤한 열대우림에서 생산되는 온갖 자원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스리비자야는 막강했던 국력에 비하면 수도의 흔적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무시강이 자주 범람하는 저지대 평야이기 때문이다. 강가의 고대도시는 나무, 대나무, 초가지붕 재료로 만든 떠 있는 수상가옥의 집합체였을 것이다. 수상가옥이 강을 따라 도시를 형성했을 것이기에 온전한 궁성 유적은 나오지 않는다. 강바닥에서 금붙이 등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는 것도 이같은 수상가옥의 역사를 말해준다. 정화의 기록관 마환도 <영애승람>에서 보편화 된 수상가옥을 기록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은 본토 주요 지역이나 중앙 및 동부 자바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에 비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강바닥에서 발견되는 불상들
팔렘방의 세쿤탕에서 발굴된 불상(6-7세기).
1920년대 팔렘방에서 불상이 발견됐는데 머리와 몸통이 따로 발굴되고 다리는 분실된 상태다. 남인도에서 2~5세기에 번성하던 아마라바티(Amaravati) 양식이 스리비자야 양식으로 접목되어 7~8세기에 조성됐다. 여래불 입상으로 의정이 팔렘방에 들린 이후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언덕에는 사암과 벽돌로 만든 사리탑 유적, 비문 조각, 보살 석상, 후광이 있는 비로자나 불상도 발견됐다. 팔렘방 중심지의 한 정원에서는 가네사(Ganesa, 코끼리 머리를 한 힌두교신) 그림이 발견됐다. 청동 불상 3점이 무시강에서 회수됐다. 팔렘방 동부 교외에서는 청동 보살상 2점(이중 하나는 거대한 관세음보살상)과 시바상 1점이 발견됐다.
세군탕 언덕의 남쪽, 카랑안야르 마을과 그 근처에는 주택, 논, 타피오카 정원, 길, 소규모 공장 등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은 현지에서 ‘대나무 성채(Bamboo Fort)’라 불리는 장소를 둘러싼 정교한 수로와 저수지 복합체 흔적을 발견했다. 가로 230m, 세로 310m의 이 장소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당과 송 초기 양식의 석기와 도기 조각이 언덕과 이 장소 모두에서 상당량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7~13세기 사이의 왕궁터로 여겨진다.
2015년 이후, 무시강 바닥에서 보석이 박힌 8세기의 불상, 바다를 휘저어 불사의 영약을 빚은 라후의 상징물 등 불교와 힌두 유물이 나오는 중이다. 궁궐에서 쓰였을 금반지와 여타 장신구, 몇 톤에 달하는 고대 주화와 중국 도자기도 발굴됐다. 인도와 중국과의 잦은 교섭을 충분히 설명한다. 강바닥에서 귀한 보물이 발굴됨은 보물조차 챙기기 어려운 급박한 사정에 의해 궁성을 포기했다는 증거다. 무시강은 지금도 자주 범람하여 강줄기가 변화하는 중이다. 무시강 바닥의 고급 유물은 스리비자야의 수도가 팔렘방 무시강변에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