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세계의 석굴 이야기

실크로드 사막길 향해서 ⑥ 사막남로

7390882@hanmail.net 2023. 7. 2. 06:29

실크로드 사막길 향해서 ⑥ 사막남로

 

가장 험하지만 매력적인 그 곳, 사막남로

 

라와크 사원의 불탑.


실크로드의 길 가운데 가장 험하면서 매력있는 ‘사막남로’는 한 번쯤 다녀볼 만 하다. 과거에 중국 동진(東晉)의 유명한 승려이자 여행가인 법현(法顯)스님이 지은 책인 <불국기(佛國記)>에는 399년 계율을 구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장안을 출발하여 천축으로 가면서 “장안을 출발한 일행은 돈황 옥문관을 벗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 접어들자 처참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득할 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 길 없다. 오직 죽은 이의 마른 해골로 표지를 삼을 뿐이다”라고 나온다.

현장스님도 서기 7세기에 경전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다가 이 사막을 건너면서 만난 흑풍(사막 폭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런 바람이 일어나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정신을 잃고 망연자실해져서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 때로는 슬프고 애처로운 선율이나 가엾게 울부짖는 소리가 눈앞의 여러 광경과 소리들 사이로 들려온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행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이것은 모두 악마와 요괴들의 짓이다.”

불교의 흐름과 문화가 서려있는
사막남로는 유사(流沙), 즉 사막의 모래가 흘러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험한 곳이다. 현재도 이 길을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과거의 번성했던 도시들은 물길이 말라 현재 사막남로 주요 도시 북쪽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거기에 한때 중국이 핵실험을 해서 감추고자 하는 지역은 GPS까지 먹통이 되거나, 위도와 경도가 1도씩 어긋나기도 한다. 수집한 GPS 자료들은 보정을 거쳐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조사팀도 천산북로와는 다른 환경에 많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이드들도 현지 가이드와는 다른 지역별 현지인을 고용해야 한다.

사막남로의 주요 유적을 통해 그 흐름과 문화를 찾아야 한다. 현재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는 고속도로는 현재까지는 3개가 있다. 그중에 라와크(Rawak) 사원지가 있다. 라와크는 호탄 60km 북동쪽에 있는 불교 사원지로 20세기 초에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불탑의 평면구조는 쿠샨 왕조시대 후기의 간다라에서 자주 만들어지던 모습으로, 규모가 크고(약 43m×49.7m) 시대가 오랜 점에서 중앙아시아에서의 중요유적의 하나로 꼽힌다. 발굴 당시에는 탑과 그것을 둘러싼 회랑의 벽이 보인다고 했지만, 현재는 외벽의 흔적만 보일 뿐이다.

불탑의 평면구조는 탁실라 불탑과 비슷하며, 4면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옆벽에는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불탑 숭배가 불상 숭배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초기 불교 단계의 ‘스투파’ 신앙이 간다라 지방과 실크로드를 통하는 과정에서 불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인 호탄
라와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호탄 시(위구르어: خوتەن شەھىرى)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호탄 지구의 수도이다. 오아시스 도시 호탄은 중국인에게 위톈(于窴)으로 알려져 있었다. 쿤룬 산맥 북쪽의 타림분지에 있던 호탄은 과거 우전국(和田市, 중국어 병음: Hétián Shì)으로 불리었으며 중국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인 도시이다. 오아시스 도시 호탄은 중국과 서방을 잇는 비단길과 중국과 인도-티벳과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주요 도로 상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그곳은 편리한 회합 장소를 제공하였는데 상품뿐만 아니라 기술, 철학과 종교가 한 문명에서 다른 문명으로 전파되었다.

호탄은 일명 우전(于田), 화전(和田) 또는 쿠사다나 등으로 알려진, 한나라 때부터의 서역남로의 최대의 오아시스로서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중개무역의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거대한 곤륜산맥이 티베트와 경계를 지으며 뻗어내려 만년설의 녹은 물을 풍부하게 공급해주고, 북쪽으로는 대사막을 안고 있어서 기후가 온화하기에 예부터 과일, 곡물, 비단, 카페트가 많이 생산되어 실크로드 도시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의 흑옥(黑玉)과 취옥(翠玉)은 멀리 로마에까지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현장의 눈에도 이곳의 넉넉함이 눈에 띄었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쿠사타나국 ‘호탄’은 주위가 4천리이다. 모래와 돌이 태반이지만 흙이 있는 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있어서 온갖 과일이 산출된다. 모직물과 옥이 많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 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은 예의범절이 있고 성격은 온순하고 학문을 좋아하면서 기예가 발달했다. 대개 부유한 편이며 음악을 존중하고 가무를 즐긴다.”

불교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는 곳
호탄은 사막남로의 중심국가로서 불교가 매우 발달된 국가였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등장하는 기록을 보면 가구 수는 3300호, 인구는 19300명, 병사는 2400명이며 옥석이 많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 우전국(호탄)의 도읍은 서성(西城)으로 나온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현재 호탄시 서남쪽에 있는 요트칸(Yotkan) 유지로 추정되고 있다. 관직명에도 동성장(東城長), 서성장(西城長)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에 두 개의 성이 있었을 것이다.

호탄국의 국가명은 <한서(漢書)>, <위서(魏書)>, <양서(梁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오대사(五代史)>, <송사(宋史)>, <명사(明史)>, <불국기(佛國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고승전(高僧傳)>과 <속고승전(續高僧傳)> 및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서 모두 우전(于闐)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는 구살단나(瞿薩旦那)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장스님의 표기는 ‘Kustana’를 음역한 것이다. 또 <대방등대적경(大方等大積經)>에서는 ‘우전은 야나(于闐卽優地耶那)’라고 표기하고 있어 범어의 ‘우다나(Udyana)’를 음역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3세기 중반까지는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의 사상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5세기 경에는 대승불교가 성행했음을 살필 수 있는데 사막남로 지역 불교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법현전(法顯傳)>에서는 호탄의 ‘행상(行像)’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14일간에 걸친 행상에 관한 규모로 보아도 호탄지역의 불교는 매우 발달된 규모로 볼 수 있다. 행상은 성 밖에 있는 부처님을 성으로 모셔오는 행사로 국왕이 직접 맞이했다는 행사로, 요즘의 부처님오신날 즈음에 하고 있는 봉축연등법회의 원조로도 볼 수 있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도 호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호탄은 안서도호부 남쪽 200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 중국 군사가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절과 승려가 많고,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또한 호탄을 경계로 동쪽이 모두 당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호탄지역은 석굴을 파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기본적으로 가장 가까운 산이 곤륜산인데 곤륜산 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다. 그런데 호탄 주변에 석굴굴의 흔적이 보인다.

문무왕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외래교수 출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