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券第十) 신라본기(新羅本紀) 희강왕(僖康王)
희강왕(僖康王)
희강왕(僖康王)279 신라의 제4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6년~838년이다. 김헌정의 아들로 836년에 김명(金明) 등의 도움으로 김균정(金均貞)을 누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838년에 불만을 가진 김명, 이홍(利弘) 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1닫기이 즉위하니, 휘는 제륭(悌隆) 또는 제옹(悌顒)이고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 이찬(伊湌) 헌정(憲貞) 또는 초노(草奴)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281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희강왕의 어머니의 이름을 미도부인(美道夫人) 또는 침내부인(沈乃夫人) 혹은 파리부인(巴利夫人)이라 하고, 또 그녀는 충행(忠行(衍)) 대아간의 딸이라고 하여 《삼국사기》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포도부인(包道夫人)은 희강왕 2년에 순성태후(順成太后)로 봉해졌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1닫기이고 비는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니, 갈문왕(葛文王) 충공(忠恭)의 딸이다.282 《삼국유사》 왕력편 희강왕조에, 왕비는 문목왕비(文穆王后)로 충효(忠孝) 또는 중공(重恭) 각간의 딸이라 하였는데, 충효 또는 중공은 아마 충공(忠恭)와 동일인일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1쪽)닫기 앞서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시자, 그 사촌동생 균정(均貞)과 사촌동생283 김헌정(金憲貞)을 가리킨다. 김헌정과 김균정은 모두 예영태자(禮英太子)의 아들로 흥덕왕에게는 사촌 아우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1쪽)닫기의 아들 제륭(悌隆)이 모두 임금이 되고 싶어 했다. 이에 시중(侍中) 김명(金明)과 아찬(阿湌) 이홍(利弘)284 희강왕 2년(837년)에 시중이 되었고 동왕 3년에는 김명(金明)과 함께 희강왕을 압박하여 자살하게 했다. 김명이 즉위한 후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시해하고 신무왕으로 즉위하자, 이홍은 두려워 산으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결국 잡혀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1닫기, 배훤백(裵萱伯)285 희강왕 즉위 거사 시 반대파인 김양(金陽)의 다리를 활로 쏘아 맞추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희강왕과 민애왕 정권하에서 봉사(奉仕)하다가 839년 정월에 김우징에 의하여 민애왕이 타도된 후, 김양으로부터 지난날의 죄를 용서받고 목숨을 건졌다. 그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31~332닫기 등이 제륭(悌隆)을 받들고, 아찬(阿湌) 우징(祐徵)은 조카 예징(禮徵)286 《삼국사기》 권44 열전 김양(金陽)전에서 예징(禮徵)을 균정(均貞)의 매서(妹壻) 곧 누이의 남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원문 “阿祐徵與姪禮徵及金陽”에서 ‘질(姪)’은 혹시 ‘흥덕왕의 조카’가 아닐까 한다. 그는 흥덕왕 사후 우징(祐徵)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김명(金明)·이홍(利弘) 등에게 패하여 희강왕 2년(837년) 6월에 양순(良順) 등과 함께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그 후 민애왕 2년(839년)에 예징은 김양 등과 함께 민애왕을 몰아내고 신무왕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하고 상대등이 되었다가 문성왕 11년(847)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2 아래 글 및 김양전(金陽傳)에는 균정(均貞 : 우징(祐徵)의 부)의 매서(妹壻)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우징의 질(姪)이라 하였으니, 아마 잘못된 것인 듯하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69닫기 및 김양(金陽)287 자는 위흔(魏昕)으로 무열왕의 9세손이며, 증조부는 주원(周元), 조부는 종기(宗基), 아버지는 정여(貞茹(章如))이다. 839년에 우징(祐徵)과 함께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문성왕 때에는 벼슬이 시중 겸 병부령에 올랐다. 사후에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되었으며, 장례를 김유신(金庾信)의 예에 따라 하였고 무열왕릉에 배장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2 《삼국사기》 김양전에 의하면 그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9세손으로 증조는 주원(周元), 할아버지는 종기(宗基), 아버지는 정여(貞茹).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69닫기과 아버지 균정(均貞)을 받들어, 일시에 대내(大內)에 들어가 서로 싸웠다. 김양(金陽)이 화살을 맞아 288 《삼국사기》 김양전에 의하면 화살에 다리를 맞았다 한다.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69닫기우징(祐徵) 등과 함께 도망치고 균정(均貞)은 해를 당하니, 그 후에 제륭(悌隆)이 즉위한 것이다.
2년(837년) 봄 정월에 대사면을 하여 참수형 이하의 죄수를 풀어주었다.
아버지를 추봉(追封)하여 익성대왕(翌成大王)290 《삼국유사》 왕력표(희강왕)에는 “諡興聖大王, 一作□成”이라 하였다.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69닫기으로 삼고, 어머니 박씨(朴氏)를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삼았다.
시중(侍中) 김명(金明)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아찬(阿湌) 이홍(利弘)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당 문종(文宗)이 숙위(宿衛)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돌려보냈다.
아찬(阿湌) 우징(祐徵)이 아버지 균정(均貞)이 해를 당한 것 때문에 원망의 말을 하니, 김명(金明)과 이홍(利弘)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5월에 우징(祐徵)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처자식과 함께 황산진구(黃山津口)292 양산·김해 사이의 낙동강.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69쪽)닫기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궁복(弓福)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6월에 균정(均貞)의 매제인 아찬(阿湌) 예징(禮徵)과 아찬(阿湌) 양순(良順)293 《삼국사기》 권44 열전 김양(金陽)전에 보이는 ‘김양순(金亮詢)’과 동일인이다. 양순은 흥덕왕 사후에 일어난 왕위쟁탈전에서 균정(均貞)을 지지하다가 실패하여 김예징(金禮徵)과 함께 청해진 장보고에게 투탁하였다. 민애왕 2년의 동왕 축출 거사시에는 무주(鵡(武)州)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김양을 도와 신무왕을 즉위시키고 이찬이 되었다가 문성왕 5년(843년)에 시중이 되었으나 다음해 3월에 퇴임하였다. 그 후 문성왕 9년(847년)에 파진찬 흥종(興宗)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32~333닫기이 도망하여 우징(祐徵)에게 의탁하였다.
당(唐) 문종(文宗)이 숙위(宿衛) 김충신(金忠信) 등에게 차등을 두어 비단을 하사하였다.
3년(838년) 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김명(金明), 시중(侍中) 이홍(利弘) 등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며서 왕의 측근들을 해치니, 왕은 자신이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맸다. 시호(諡號)를 희강(僖康)이라 하고 소산(蘇山)에 장사지냈다.